FeverStory

무정차 통과

45화

오전 9시 10분. 감사실 분석실.

복도 너머 어딘가에서 공조기가 낮게 울리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칸막이 책상 위를 균일하게 덮고 있는 방. 공기는 아침 청소 후 뿌린 탈취제의 느글거리는 레몬 향으로 약간 눅눅했다. 이지원의 자리 구석에는 식지 않은 커피가 담긴 텀블러에서 가느다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신우진이 문을 열었다. 경첩이 마른 소리를 냈다. 외투는 벗은 채였다.

왼쪽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접혀 있고, 왼손에 투명 파일 한 장. 안에는 접힌 A4 출력본이 들어간 상태였다. 종이 모서리가 파일 밖으로 살짝 비틀려 닳은 흔적이 보였다.

이지원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등을 곧게 펴고 허리만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였다. 노트북 화면 두 개가 켜져 있다.

왼쪽은 구매 시스템의 부품 배치 검색창. 텍스트 상자 안에서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오른쪽은 빈 대조표 양식. 엑셀 셀에 옅은 회색 테두리선이 그어져 있을 뿐 아직 어떤 숫자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다.

“출력본입니다.”

신우진이 파일을 테이블에 놓았다. 플라스틱이 대리석 무늬 상판에 닿으며 가볍게 미끄러졌다.

이지원이 파일을 집었다. 엄지와 검지로 지퍼 백처럼 봉합된 부분을 벌려 출력본을 꺼내 펼쳤다. 종이에서 오래된 잉크와 약간 탄 듯한 토너 냄새가 번졌다.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왼쪽 손가락이 종이의 좌측 마진을 따라 살짝 내려갔다. 멈췄다.

“수치가 명확하군요. 디지털과 비교하겠습니다.”

이지원이 왼쪽 노트북을 돌렸다. 화면 지지대가 덜컥, 하고 걸리며 각도가 조정되었다. 화면에 TH-1187 로트의 현재 디지털 성적서가 떠 있었다. 창 왼쪽 사이드바에는 같은 로트 번호로 검색된 과거 이력이 작은 글씨로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품번, 로트 번호, 시험일을 기준으로 정렬했습니다. 출력본과 항목별 대조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지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마지막 음절이 아주 약간 빨라져 있었다.

신우진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바퀴가 플라스틱 매트를 긁으며 둔탁하게 굴러갔다. 상체를 숙이며 오른손 검지가 출력본의 첫 번째 줄을 짚었다. 네모난 손톱이 종이에 닿으며 미세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중량부터 합시다.”

오전 10시 30분.

키보드 자판 소리가 한동안 일정한 속도로 이어졌다. 타닥타닥, 하고 가볍게 튀는 소리와 엔터 키가 눌릴 때마다 나는 묵직한 클릭. 이지원이 일곱 번째 부품의 피로 한계 수치를 입력했다.

눈이 모니터의 입력 칸과 출력본을 한 번 더 오갔다. 엔터를 눌렀다. 대조표의 마지막 칸이 채워졌다.

화면에 빨간색 숫자가 줄지어 떴다. 셀 서식이 한꺼번에 조건부 강조를 먹으며, 규격 범위를 벗어난 값들이 옅은 붉은색 음영 위에 진빨간 글씨로 두드러졌다. 사무실 특유의 정적 속에서 모니터 한 화면만 유난히 공격적인 색을 내뿜고 있었다.

“전부 초과입니다.”

이지원이 숫자들을 한 번 더 훑으며 낮게 말했다.

신우진이 출력본과 화면을 번갈아 봤다. 동공이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얇게 바싹 말라 있었다.

“말해봐.”

“중량은 전 부품에서 규격 상한을 0.5그램 이상 초과했습니다. 인장 강도는 평균 1.8뉴턴 초과. 피로 한계는 세 부품에서 허용오차를 넘었습니다.”

이지원이 대조표를 인쇄했다. 프린터가 종이를 빨아들였다. 내부 롤러가 돌아가며 윙, 하는 작은 기계음이 났고, 토너가 열에 눌어붙는 미세한 탄 냄새가 잠시 올라왔다.

“디지털 성적서에는 이 수치들이 전부 허용오차 내로 조정돼 있습니다. 조작 방향이 일관돼요.” 이지원이 화면의 디지털 셀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줄을 따라 내려갔다. 손톱이 액정에 가볍게 닿아 작은 지문 자국을 남겼다.

신우진이 출력본의 검수자 코멘트를 가리켰다. 손으로 누른 부분의 종이가 약간 움푹 들어갔다. 볼펜으로 눌러쓴 글씨라 필압이 강한 부분은 뒷면까지 만져질 듯했다.

“EPDM 혼합재 의심. 원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디지털에는 HNBR로 등록돼 있습니다. 패킹 재질을 속인 거죠.” 이지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세한 경멸의 빛이 섞였다.

이지원이 프린터에서 나온 대조표를 집었다. 아직 따뜻한 종이를 테이블 중앙에 펼쳤다. 종이 양 끝이 스스로 살짝 말려 올라갔다. 토너 냄새가 출력물을 따라 얇게 퍼져나갔다.

신우진이 숫자들을 훑었다. 양손을 테이블 모서리에 올린 채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7개 부품. 7개의 조작 수치.

“패턴이 같다. 전부 허용오차에 걸리지 않을 만큼만 깎았다.” 그 목소리가 복도 쪽 유리 벽에 부딪혀 약하게 울렸다. “시험도 안 하고 수치부터 맞춘 거야.”

“한 사람이 일괄 조정한 흔적입니다.” 이지원이 대조표의 수정 전후 수치 차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가락 끝이 각 셀을 짚을 때마다 미세한 손톱 소리가 났다.

신우진이 대조표 왼쪽 아래를 짚었다.

“TH-1187-04. 이 부품만 실제 수치와 디지털 간극이 가장 크다.”

“패킹 재질이 다르니 물성 차이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거겠죠.”

오전 11시 15분.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았다. 액정이 덮이며 찰칵, 하고 걸쇠가 잠겼다. 대조표 위에 손을 포갰다. 왼손과 오른손 손가락을 교차시키고 엄지손가락 끝을 살짝 눌렀다.

“이건 단순한 조작이 아닙니다. 계약 기준에 부적합한 부품을 합격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의도적 수정이에요.” 그녀의 검지가 대조표의 한 셀을 톡톡 두드렸다.

“납품사는?”

“대영산업. TH-1187 로트의 계약서와 납품 이력 모두 대영산업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신우진이 파일에서 또 다른 출력물을 꺼냈다. 종이가 파일 안쪽 마찰면에 쓸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박중호가 그때 제출한 보고서 사본. 디지털 이미지로 스캔한 것을 인쇄한 종이였다. 곳곳에 스캔 과정에서 생긴 옅은 세로줄 무늬가 끼어 있었고, 종이 재질은 오래되어 약간 바래 있었다.

“9년 전.”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목 근육이 긴장하며 턱선이 약간 당겨졌다.

“박중호 팀장 보고서입니까.”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읽어봐.”

신우진이 세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오래된 종이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접힌 부분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이지원이 읽었다. 중량 초과. 인장 강도 초과. 패킹 재질 의심. 읽는 동안 입술이 미세하게 실룩였다.

“똑같은 결함.”

“같은 항목. 같은 방향으로 초과.” 신우진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책상 모서리를 쥐고 비틀었다.

이지원이 9년 전 보고서 옆에 오늘의 대조표를 나란히 놓았다. 두 문서의 숫자를 번갈아 봤다. 동공이 양쪽 종이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며, 때때로 멈춰 특정 수치를 재확인했다.

“9년 전에도 패킹 재질을 의심했고, 이번에도 같은 패턴입니다. 납품사는 그때도 대영산업이었습니까.”

“대한부품산업. 지금의 대영산업 전신이다.”

이지원의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얼굴 다른 근육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회사 이름만 바뀌고 동일한 방식의 조작이 반복됐다면,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조직적 비리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성대가 약간 갈라졌다.

이지원이 대조표를 들어 올렸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결재 라인을 봐야 합니다. 누가 이 성적서에 서명했는지. 누가 허용오차 조정을 승인했는지.”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서 뼈가 가볍게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윤태호.”

이지원이 잠시 멈췄다.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만 아주 작게 들렸다.

“근거는.”

“구매처장 결재 라인. 9년 전 보고서 묵살도 구매본부장이 했다. 지금 구매처장은 윤태호.” 신우진의 말투는 건조했으나 오른손 약지가 책상 면을 불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신 과장님. 그 연결은 합리적이지만 법적 증거로는 부족합니다. 구매처장의 성적서 결재 시점과 명시적 지시가 필요해요.”

“지금 대조표는 그 지시의 결과물이다. 지시한 사람이 있으니까 조작이 7개 부품에 걸쳐 동일하게 나왔다.” 신우진이 대조표의 빨간 수치들을 한 번에 짚듯 손바닥으로 덮었다.

이지원이 대조표를 내려놓았다. 종이 테두리가 공기를 가르며 작게 펄럭였다.

“감사 보고서 개시 논거로는 충분합니다. 다음 단계는 이 조작을 실행한 내부 단말기를 특정하는 겁니다.”

정오 12시 5분.

이지원이 증거 보관함을 열었다. 보관함 문 경첩에서 기름 마른 금속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번호표를 출력해 출력본 원본에 부착했다. 번호표 스티커가 종이에 붙을 때 기포 하나 없이 밀착되도록 손끝으로 눌러 매끄럽게 정리했다.

“AU-2024-003-07. 증거물 번호입니다.” 이지원이 번호를 천천히 소리 내 읽었다.

신우진이 출력본을 보관함에 넣었다. 봉인 스티커를 붙였다. 스티커 접착면이 보관함 프레임에 닿으며 얇게 긴장하는 소리가 났다. 날짜와 사번을 서명했다. 볼펜 끝이 스티커 표면에서 약간 밀리며 반짝이는 잉크 선을 남겼다.

이지원이 대조표 원본도 동일한 절차로 봉인했다. 그녀의 서명은 각지고 빠르게 내리그어졌다.

“증거 등록 완료.” 그녀가 보관함 뚜껑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신우진이 보관함 문을 닫았다. 철제 프레임이 만나는 지점에서 묵직하고 단단한 공명이 한 번 울렸다.

“삭제 로그는.”

이지원이 노트북을 열었다. 전자 결재 시스템에 접속했다. 로그인 화면이 깜빡이고, 메인 대시보드 알림 숫자가 빨간 동그라미로 쌓여 있었다.

“IT보안팀장 앞으로 내부 네트워크 접속 기록 열람 신청서를 기안하겠습니다. 근거는 방금 등록한 대조표와 출력본.”

화면에 신청서 양식이 떴다. 기본 입력 필드들이 좌측에 정렬되어 있었고 문서 번호는 자동으로 발번되었다.

이지원이 신청 사유 칸에 입력했다. 키보드 자판 소리가 이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이어졌다. 화면에 뜨는 글자들은 다음과 같았다.

「감사 건 AU-2024-003 관련, B4 계열 검수 기록 삭제 실행자의 접속 단말기 특정을 위해 삭제 일시 전후 네트워크 접속 로그 열람을 요청함.」

마침표까지 정확히 찍고 손을 키보드에서 잠시 뗐다.

“신 과장님, 문구 확인해주십시오.”

신우진이 화면을 읽었다. 모니터 불빛이 그의 얼굴에 옅은 푸른색 톤을 더했다.

“충분하다.”

이지원이 결재 버튼을 눌렀다. 마우스 클릭 한 번이었지만, 그 소리가 방 안에 유난히 분명하게 퍼졌다. 전자 결재 라인을 타고 신청서가 올라갔다. 화면 오른쪽 위에 작은 알림 배너가 순간 떴다 사라졌다.

“접수번호 ACRC-2024-0891. IT보안팀장 결재는 통상 4시간 이내 완료됩니다.”

신우진이 대조표 사본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종이가 주머니 안쪽 안감에 닿으며 부스러졌다.

“열람 권한만 나오면 삭제 명령을 내린 단말기를 찾는다.”

“그 단말기의 사용자를 특정하면 조작 실행자가 누군지 알 수 있습니다.” 이지원이 문서 위에 손을 평평하게 올리며, 마치 무언가를 제자리에 고정시키듯 눌렀다.

이지원이 결재 확인증을 인쇄했다. 프린터 트레이에 종이가 한 장 떨어졌다. 약간 따뜻한 종이를 반으로 접어 서류철에 꽂았다. 서류철 클립이 스프링 장력으로 닫히며 찰칵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실행자의 상부 지시 경로를 추적하면 윤태호까지 연결됩니다.”

신우진이 보관함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봉인은 단단했다. 손가락으로 스티커 가장자리를 살짝 눌러보았다. 뜯어진 흔적 없이 모서리가 완벽하게 프레임에 밀착되어 있었다.

“오늘 안에 접속 기록 나오면 바로 분석 들어간다.”

“준비하겠습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충전기 케이블을 말아 챙기고, 마우스를 전용 포켓에 밀어 넣었다. 일어서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2시 11분. 시계 유리판에 형광등이 작게 반사되었다.

“점심은 드시고 오십시오.”

“당신도.”

신우진이 문을 열었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작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복도로 나서기 전에 잠시 멈췄다. 어깨 너머로 방 안을 한 번 훑었다.

“IT보안팀 답변 오면 바로 연락해.”

“물론입니다.”

이지원이 대조표 사본을 들었다.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종이에서 토너 냄새가 났다. 코끝이 약간 간지러울 정도로 화학적인 향.

신우진이 복도로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복도 바닥 타일 위에서 구두 굽이 내는 리듬이 점차 작아지다가, 엘리베이터 쪽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지원은 잠시 서 있었다. 대조표의 숫자들을 다시 한 번 훑었다. 눈이 한 셀에서 다음 셀로 옮겨갈 때마다 숨소리가 한 박자씩 느려졌다.

7개 부품. 전부 같은 방향으로 조작됐다. 한 사람이 수치를 정리한 흔적.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까지만 깎은 미세한 정교함.

그 한 사람 위에는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9년 전에도 똑같은 일을 묵살한 결재자가 있었다.

이지원이 대조표를 접었다. 접힌 선을 따라 손톱을 눌러 정확히 선을 만들었다.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금속 지퍼 이빨이 하나씩 맞물리며 통합되는 소리가 멈춤 없이 이어졌다.

화면에 빨간색 숫자가 줄지어 떴다. 셀 서식이 한꺼번에 조건부 강조를 먹으며, 규격 범위를 벗어난 값들이 옅은 붉은색 음영 위에 진빨간 글씨로 두드러졌다. 사무실 특유의 정적 속에
무정차 통과4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