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46화
사흘 뒤 아침.
한경숙은 노조 사무실 철제 캐비닛 앞에 서 있었다. 왼쪽 팔뚝의 기름 화상 흉터가 형광등 아래서 옅게 빛났다. 캐비닛 문을 열었다. 3단 서랍. 맨 아래 서랍에서 '2023년 부품 비리 제보'라고 적힌 파일 폴더를 꺼냈다.
책상 위에 펼쳤다. 폴더 안에는 제보 접수증, 요약 보고서, 녹취록 사본이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한경숙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팔을 걷어붙였다. 먼저 접수증을 집어 들었다.
접수 일자: 2023년 4월 7일. 제보자: 김영수. 소속: 대한정밀 품질관리팀. 제보 내용: B4 계열 패킹 부품 시험 성적서 조작.
손가락으로 접수증의 빈 칸을 짚었다. 처리 결과란은 비어 있었다. '담당자 이첩'이라는 빨간 도장만 찍혀 있고, 그 아래로 아무것도 없었다.
한경숙이 녹취록 사본을 집어 들었다. 앞장을 넘겼다.
“대한정밀에서 B4 패킹 부품을 시험도 안 하고 성적서를 발급하는 걸 봤습니다.”
김영수의 육성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문장 끝이 조금씩 올라가는 말투. 긴장한 상태에서 말을 빠르게 쏟아내는 패턴이 그대로 느껴졌다.
“2021년부터 계속된 관행입니다. 저는 그걸 보고했습니다. 내부 감사팀에 공식 보고서도 제출했습니다.”
한경숙이 녹취록을 한 장 더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상담원이 기록한 것. 빨간 볼펜 글씨.
“2023년 5월 12일, 회사에서 허위 보고를 사유로 해고 통보 받음. 이후 연락 두절.”
한경숙이 수첩을 꺼냈다. 접수증에 적힌 인사 기록 열람 권한 코드를 확인했다. 일어나서 벽 쪽의 노조 공용 단말기로 걸어갔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인사 기록 시스템에 접속했다.
검색창에 김영수의 주민등록번호 앞 여섯 자리를 입력했다. 접수증에 기재된 정보 그대로.
시스템이 응답했다. 고용 이력 화면이 떴다.
김영수. 1987년 9월 14일생. 2010년 3월 2일 대한정밀 입사. 2023년 5월 12일 해고. 해고 사유: 사규 제47조 위반(허위 보고 및 회사 명예 훼손).
한경숙이 인쇄 버튼을 눌렀다. 프린터가 종이를 빨아들였다. 출력물이 나오자마자 집어 들었다.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해고 사유란의 '허위 보고'라는 글자를 손톱으로 긁었다. 토너가 묻어나지 않았다. 방금 인쇄한 생생한 기록.
수첩에 김영수의 인적 사항을 간략히 옮겨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 비상 연락처.
등록된 번호는 031으로 시작하는 유선 전화번호였다.
한경숙이 수첩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노조 사무실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9시 45분.
전화를 걸기에 빠른 시간은 아니었다. 책상으로 돌아와 유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네 번 울렸다. 다섯 번째에서 수화기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 목이 약간 잠겼다. 아침에 처음 내는 목소리 같았다.
“김영수 씨 댁입니까.”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런데요. 누구세요?”
“철도노조 지부장 한경숙입니다. 작년에 김영수 씨가 노조에 제보한 건과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만 들렸다. 한경숙은 기다렸다. 상대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영수가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반년 전부터 연락이 안 돼요. 집에도 안 들어오고, 전화도 안 받아요.”
“어머니십니까.”
“네. 저는 영수 엄마예요.”
한경숙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수첩을 펼치고 펜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게 언제입니까.”
“작년 가을쯤. 집에 잠깐 들렀다 갔어요. 그때 이걸 맡기고 갔어요.”
“이거라면.”
“USB요. 이거 꼭 간직하라고. 언젠가 필요할 때가 올 거라고.”
한경숙의 펜이 멈췄다. 왼손으로 수화기를 더 단단히 쥐었다.
“그 USB, 지금도 가지고 계십니까.”
“네. 집에 있어요. 영수가 그렇게 부탁했으니까. 버리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한테 준 적도 없어요.”
한경숙이 눈을 감았다 떴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형광등을 정면으로 받았다.
“혹시 USB에 뭐가 들었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컴퓨터를 몰라서. 그냥 영수가 파일이라고만 했어요. 회사 일과 관련된 거라고.”
“그 USB, 제가 직접 찾아뵙고 받아도 되겠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는 숨소리.
“그게 무슨 일인데요.”
한경숙이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 말이 빨라졌다.
“아드님이 회사에서 봤던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걸 증명할 자료가 필요합니다. USB가 그 자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수는 그래서 해고된 거예요? 그 일 때문에?”
한경숙이 한 박자 기다렸다.
“네.”
수화기 너머로 길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떨리는 날숨.
“알겠습니다. 저는 경기도 파주에 살아요. 주소를 알려드릴게요.”
한경숙이 수첩에 주소를 받아 적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번지수와 우편번호까지 정확하게.
“며칠 안에 찾아뵙겠습니다. 가기 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오세요.”
전화가 끊겼다. 한경숙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첩을 똑바로 펴서 주소를 다시 읽었다. 펜으로 주소 옆에 별표를 쳤다. 수첩을 접어 노조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인쇄물을 집어 들었다. 구멍 펀치로 구멍 두 개를 뚫었다. 파일 폴더에 철해 넣고, 폴더를 캐비닛 3단 서랍에 다시 넣었다. 자물쇠를 잠갔다.
일어서서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3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신우진의 번호를 찾았다.
문자를 입력했다. '김영수 확인. 대한정밀 전 품질관리팀.
USB에 증거자료 보관 중. 파주에서 확보 예정. 추후 연락.'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멈췄다. 'USB 파일 내용: 확인 전'이라고 한 줄을 더 추가했다.
보냈다.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이 꺼졌다. 한경숙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왼쪽 팔뚝의 흉터가 접힌 팔 사이로 사라졌다.
눈이 캐비닛을 향했다. 3단 서랍의 자물쇠가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 안에는 이제 김영수의 인사 기록 출력본과 녹취록 사본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한경숙이 일어나 조끼를 여몄다. 파주까지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한경숙은 다음 날 아침 KTX에 올랐다. 조끼 안주머니의 수첩이 갈비뼈 쪽으로 접혀 있었다. 조사관 신분증을 상의 주머니에 옮겨 넣고, 노조 조끼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열차가 수색을 지날 무렵부터 버릇처럼 왼쪽 팔뚝의 흉터를 문질렀다. 흉터 위로 김영수의 주소와 별표가 겹쳐졌다. 파주역에 가까워지자 가방에서 조끼를 다시 꺼내 입었다.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
파주역 도착은 오후 1시 12분이었다. 한경숙은 30번 버스를 타고 법원읍 방면으로 이동했다. 세 정거장 뒤에 내려 좁은 골목길을 5분쯤 걸었다. 2층짜리 적벽돌 다세대 주택 1층 우편함에 ‘김영수’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인터폰을 누르자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도노조 한경숙입니다. 아드님 김영수 씨 건으로 잠시 대면하고 싶습니다.”
긴 침묵 끝에 수화기가 끊겼고, 30초 뒤 현관문이 열렸다. 60대 후반의 어머니는 체구가 작고 눈가가 깊게 패여 있었다. 거실 벽면에는 김영수의 졸업사진이 걸려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자 어머니는 손수건을 접었다 폈다 했다.
“영수가 퇴사한 지 일 년 됐습니다. 그 뒤로 연락은.”
“두 달에 한 번쯤 전화 오는데, 번호는 계속 바뀌고요.”
한경숙이 무릎 위에서 손을 포갰다. “아드님이 회사를 나오기 직전, 일주일간 집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방에 틀어박혀서 컴퓨터만 붙잡고 있었어요. 프린터가 밤새 돌아갔어요. 그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습니다.”
“무엇을 출력했는지 말한 적 있습니까.”
“그런 말은 안 했어요. 대신 마지막 날, 이걸 주면서 당분간 맡아 달라고 했어요. 회사에선 절대 못 찾을 거라고.”
어머니가 장롱 서랍 깊숙이에서 비닐 봉지를 꺼냈다. 검은색 USB 메모리 표면에 ‘BJ-09-03’이라고 적힌 하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손가락이 가볍게 떨리며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무섭다고 했어요. 회사에서 몇 번이나 찾으러 왔다고. 기록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할 거라고.”
한경숙이 16기가바이트 무광택 USB를 집어 들었다. 스티커의 볼펜 글씨는 잉크가 약간 번져 있었다. “노조에서 공식적으로 보관하겠습니다. 절차는 임의 제출 형식으로 처리하고, 사본이 필요하시면 제공합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고,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다. “영수가 무사하면 됐어요.”
한경숙은 녹음기 앱을 켜고 휴대폰을 식탁에 올렸다. 어머니의 동의를 받고 퇴사 직후 일주일간의 상황과 USB 임의 제출 과정을 녹취했다. 김영수가 외부 연락을 끊고 프린터와 외장 하드로 작업했으며, USB를 맡기며 ‘원본을 회사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겼다’고 말한 진술이 기록되었다. 녹음 종료 후 한경숙은 USB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
“이걸로 아드님에게 불이익이 가지는 않을까요.”
“노조가 막을 겁니다. 내부고발자 보호는 노동조합법상 권리입니다.”
파주역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한경숙은 안주머니 속 USB 위치를 손으로 확인했다. 오후 4시 48분이었다. 역 광장을 가로질러 ‘PC ZONE’ 간판 아래 계단을 올랐다.
한산한 PC방 구석 17번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물리적 쓰기 방지 잠금 장치를 USB 포트에 먼저 꽂고 그 위에 USB를 연결했다. 읽기 전용 마운트가 실행되자 파일 탐색기가 열렸다. 루트 디렉토리에 네 개의 폴더가 표시되었다.
‘2009입고검사’. ‘2013시험성적서비교’. ‘2015개정안문제점’. ‘202311_최종’.
속성 창을 열어 최종 수정일을 확인했다. 네 폴더 모두 작년 11월 13일에서 17일 사이. 김영수가 퇴사 직후 기록한 것과 일치하는 타임스탬프였다.
‘2009입고검사’는 47개 파일, 1.2GB. ‘2013시험성적서비교’는 스프레드시트 파일 여섯 개. ‘2015개정안문제점’은 PDF 네 개와 워드 문서 두 개. ‘202311_최종’은 날짜별 하위 폴더 8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파일 내용은 열지 않았다. 한경숙은 스크린샷을 세 장 찍은 뒤 USB를 안전 제거해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노트북을 가방에 수납하고 암호화 메신저를 열었다. ‘감사TF-비공식’ 그룹 채팅방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USB 확보. 파일명 기준 2009년 입고검사부터 2023년 11월까지. 내용 미개봉. 내일 오전 노조 회의실 격리 PC에서 공동 개봉 제안.」
오후 5시 48분 KTX 시간을 확인한 뒤 전송했다. 확인 표시 두 개가 4초 만에 떴다. 신우진과 이지원이 읽음 표시를 남겼다.
PC방을 나서며 바람이 세졌다. 재킷 앞섶을 여미는 손이 안주머니 USB 위를 스쳤다. 서울역 도착은 오후 6시 32분. 3호선 지하철이 종로3가를 지날 무렵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지원의 일반 전화였다.
“한 지부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집에 가는 중이다. 무슨 일이야.”
“30분 전, 감사실 내부 네트워크 로그에서 이상 접근이 발견됐습니다. 지부장님께서 보내신 암호화 메신저 서버 로그를 감사실 내부 권한으로 조회한 기록이 있습니다.”
한경숙이 자세를 곧추세웠다. “누군지 특정했나.”
“아직입니다. 하지만 정보원 라인 중 한 명입니다. 메시지 내용을 봤단 말이지요. USB 입수 사실이 오늘 밤 안에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USB는 절대 자택에 보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안전한 장소로 옮기십시오.”
“알았다.”
통화를 끊자 지하철이 다음 역에 정차했다. 문이 열리고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한경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킷 안주머니 속 USB가 걸을 때마다 가슴께에 작게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