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47화

저녁 9시 32분. 모니터 화면에 레이드 보스의 체력 바가 12퍼센트 남아 있었다.

최명식은 헤드셋을 쓰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길드 디스코드 채널에 다섯 명이 접속해 있었다.

“탱커 도발 한 번 더. 힐러 마나 체크.”

길드장의 목소리가 짧게 지시를 내렸다. 최명식은 마우스 휠을 올려 캐릭터 위치를 조정했다.

“아, 씨. 나 진짜 오늘 회사에서 멘탈 다 털렸다.”

음성 채팅에 길드원 하나가 푸념을 쏟았다. 닉네임 ‘철가방123’. 최명식이 알기로는 대한정밀 품질관리팀에서 근무한 지 4년쯤 된 사원이었다.

“왜 또 무슨 일 있었어?”

“야, 검수팀장이 오늘 퇴근 직전에 불러서 말이야.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시험 성적서 원본 파일 다 정리하래.”

철가방123이 키보드를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헤드셋 너머로 들렸다.

“정리? 그게 대단한 일이야?”

다른 길드원이 물었다.

“그게, 폴더별로 분류만 하라는 게 아니고 외장하드에 복사해서 목록 만들고. 원본 서버 건드리지 말라면서 사본 뜨라고.”

철가방123이 말을 이었다.

“아니 업무 끝나기 오 분 전에 시키면 어쩌자는 거냐. 그것도 검수팀장이 본부장실 갔다 와서 바로. 표정이 진짜 굳어 있었어.”

“본부장? 윤태호?”

최명식이 물었다. 캐릭터가 스킬 한 번을 빗맞췄다.

“어. 구매처 윤태호 본부장. 그분이 직접 품질관리팀 검수팀장 불렀대.”

철가방123의 대답에 최명식의 손가락이 멈췄다.

“야, 근데 그 시험 성적서라는 게 B4 계열 부품 거야?”

“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 맞아. B4 계열이 대부분이래. 그걸 왜 아냐?”

철가방123의 목소리가 의아해졌다.

최명식은 헤드셋 마이크를 손바닥으로 살짝 가렸다가 뗐다.

“아, 예전에 검수실에서 비슷한 부품 번호 봤어. 그냥 궁금해서.”

“하여간 이번 주말까지 끝내래. 야근 수당도 없는데 진짜 열받는다.”

레이드 보스가 쓰러졌다. 전리품 분배 창이 떴지만 최명식은 듣고 있지 않았다. 왼손으로 책상 옆 메모지를 끌어당겼다.

볼펜 뚜껑을 이로 뽑으며 한 손으로 타이핑을 이어갔다. ‘아이템 분배 동의’ 버튼을 누르고 메모지에 글을 적었다.

‘대한정밀 품질팀. 2018~2022 시험 성적서 파일 정리 지시. B4 계열. 윤태호 본부장 직접 지시. 오늘 오후 퇴근 직전.’

볼펜 끝을 메모지에 꾹 눌러 마침표를 찍었다.

“철가방님. 그 파일들 원래 원본 서버에 보관된 거 아니었어?”

“응, 그동안은 건드린 적 없어. 오늘 갑자기. 그것도 본부장 전화 한 통에 검수팀장이 뛰어가더니 와서.”

최명식은 메모지를 접어 통풍이 잘 되는 케이스 위 검수복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시계를 보니 9시 48분. 내일 아침 신우진 선배에게 가장 먼저 보여줘야 한다.

“아, 길드원들. 나 내일 출근 일찍 해야 해서 먼저 간다.”

“벌써? 일요일 레이드 시간 체크하고 가.”

“알겠습니다. 수고!”

디스코드를 종료했다. 컴퓨터 전원을 끄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렸다.

최명식은 검수복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지 않고 접어서 가방 옆에 두었다. 메모가 든 주머니 쪽을 위로 향하게 했다. 뒷목을 한 번 만졌다. 손바닥에 땀이 밴 것을 느꼈다.

‘시험 성적서 파일 정리. 그것도 2018년부터.’

최명식은 컴퓨터의 전원 케이블까지 뽑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윤태호가 증거 인멸을 준비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원본 서버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파기보다 더 교묘한 무언가.

알람을 평소보다 40분 빠른 오전 6시 10분으로 맞췄다. 검수복 주머니의 메모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글자가 번지지 않게 볼펜 잉크를 말린 자국이 선명했다.

오전 7시 50분. 차량기지 검수실.

형광등이 절반만 켜진 복도를 지나 최명식이 검수실 문을 밀었다. 신우진은 이미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왼손으로 부품 식별용 확대경을 닦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고영호의 조사 노트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선배님.”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확대경을 내려놓으며 최명식을 바라보는 눈이 가늘어졌다.

“평소보다 빠르네.”

“전할 게 있어서요.”

최명식은 문을 닫고 신우진 앞으로 걸어갔다. 검수복 주머니에서 접은 메모지를 꺼내 작업대 위에 펼쳤다. 손끝이 약간 떨렸지만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어젯밤 게임 길드원한테 들었습니다. 대한정밀 품질관리팀 소속인데, 퇴근 직전에 검수팀장 지시 받았대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시험 성적서 원본 파일을 외장하드로 전부 복사해서 목록 정리하라고.”

신우진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눈이 글자를 한 줄 한 줄 훑었다.

“B4 계열이라고 했어?”

“네. 대부분 B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시가 윤태호 본부장한테서 직접 나왔대요. 본부장실에 검수팀장이 불려 갔다 와서 바로.”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선을 그었다. 확인. 그는 메모를 작업대에 다시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었다.

“언제 들었지.”

“어젯밤 9시 반쯤이요. 레이드 중에.”

“그 길드원. 예전에도 업무 얘기 했던.”

“네. 평소에 검수팀장 불만 같은 거 자주 얘기했어요. 어제는 진짜 열받은 티가 났고요.”

신우진이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 앱을 실행했다. 수신인은 이지원.

“원본 서버는 그대로 두고 사본만 만들라고 했다고?”

“예. 그 부분이 좀 이상했어요. 파기하라는 것도 아니고.”

신우진이 타이핑을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이 짧고 정확하게 화면을 눌렀다. 문자 메시지가 한 줄 완성되고, 두 번째 줄, 세 번째 줄로 이어졌다.

「대한정밀 내부에서 2018~2022년 시험 성적서 파일 정리 지시. B4 계열. 윤태호 직접 지시. 증거인멸 가능성 있음. 공문 준비 예정.」

전송 버튼을 누르며 신우진이 말했다.

“잘 전했어.”

최명식은 뒷목을 만지려다 손을 내렸다. 대신 작업대 모서리를 짧게 움켜잡았다.

“선배님. 이거… 진짜 증거인멸 시도 맞죠?”

“그래.”

신우진이 짧게 답했다. 휴대폰 화면에 ‘읽음’ 표시가 떴다. 이지원의 답장이 돌아오기까지 7초가 걸리지 않았다.

「확인. 공문 기안 즉시 진행. 접수번호 오전 중 통보.」

신우진은 이지원의 답장을 읽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작업대 위에서 고영호의 조사 노트를 집어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검수실에 짧게 울렸다.

최명식은 그 모습을 보며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이 먼저 왔다. 자신이 주워들은 정보가 농담이나 잡담으로 끝나지 않고 공식 기록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내 긴장이 다시 올라왔다. 증거인멸이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이는 조직적 행위라면. 윤태호는 이미 다음 수를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전조끼를 집었다.

“오늘 출고 점검은?”

“제가 할게요. 선배님은 감사실부터.”

“공문 접수증 받아서 기록관리부서에 증거보전 신청도 넣을 거야.”

신우진은 이미 유성 매직을 왼쪽 가슴 주머니에 꽂으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최명식이 물었다.

“그 파일들, 정리 끝나기 전에 막을 수 있을까요.”

신우진이 문고리를 잡은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정리는 시작됐어도 목록은 아직 없을 거다. 오늘 중으로 공문 들어가면 보전 요청이 우선한다.”

문이 열리고 복도의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최명식은 신우진이 사라진 복도를 몇 초 더 바라보았다. 작업대 위에는 자신이 적은 메모지 한 장만 남아 있었다.

그는 메모지를 집어 두 번 접었다. 검수복 안주머니에 넣으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차량기지 사무실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신우진은 키보드 위에서 손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안정기 교체 주기가 지난 지 두 달째다. 시설팀에 구두로 두 번 말했고, 메모도 한 번 남겼다. 답은 없었다.

그는 시선을 모니터로 내렸다. 전자문서시스템 공문 작성 화면이 열려 있었다. 수신처는 감사실과 본사 기록관리부서. 제목은 이미 입력해 놓았다.

「Daehan Parts 납품 부품 시험 성적서 관련 모든 기록의 보존 및 열람 권한 유지 요청」

본문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손가락이 키보드를 세 번 두드렸다. '2018~2022년' 앞에 '해당 연도'를 추가했다. '원본 및 사본 일체' 뒤에 '전자문서 포함'을 덧붙였다.

좌측 가슴 주머니에서 유성 매직을 꺼내 책상 위 메모지에 짧게 적었다. '열람 권한 — 기록관리부서 협조 필수.' 메모지를 모니터 옆에 붙였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결재선 알림이 화면 오른쪽 아래에 떴다. '접수 대기 중 — 감사실'. 시계를 봤다. 오전 9시 4분.

휴대폰을 들었다.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한 번에 연결됐다.

“공문 보냈다. 확인해라.”

“지금 열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다섯 초쯤 지나 이지원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본문 확인했습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전자문서 포함, 원본 및 사본 일체. 보존과 열람 권한 유지. 빠진 항목 없습니다.”

“기록관리부서에도 동시 발송했다.”

“접수 절차 진행합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짧게 끊겼다. 클릭 소리가 이어졌다.

“감사실 전자문서시스템에 정식 접수 완료. 접수번호 AUDIT-2024-0087. 발급 시각 오전 9시 6분.”

신우진이 수첩을 펼쳤다. AUDIT-2024-0087을 적었다. 접수 일시와 담당자 '이지원'도 함께.

“내부 감사 기록에는 증거인멸 우려 사안으로 분류했습니다. 등록 완료.”

“고맙다.”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프린터에서 용지가 밀려 나왔다. 접수증이었다. 신우진은 출력물을 들어 접수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잉크가 살짝 번져 있었지만 판독에 문제는 없었다.

서랍에서 개인 파일을 꺼냈다. 표지에는 'TH-1187 및 B4 계열 — 감사 자료'라고 적혀 있었다. 플라스틱 클리어 파일을 넘겨 접수증을 가장 앞쪽에 끼웠다. 파일을 닫고 서랍에 넣으려던 순간,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내선 번호. 031-620-3317.

본사 기록관리부서였다.

신우진이 송수화기를 들었다.

“차량기지 정비팀 신우진입니다.”

“네, 신우진 주임님. 본사 기록관리부서 김현수 대리입니다. 방금 주임님께서 접수하신 공문, AUDIT-2024-0087 건 확인했습니다.”

목소리가 잠시 뜸했다. 신우진이 기다렸다.

“그런데 주임님. 요청하신 해당 연도 Daehan Parts 시험 성적서 파일은…… 지난주 금요일에 이미 폐기 이관 신청이 접수되어 있습니다.”

송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끼손가락 쪽 유압유 흉터가 하얗게 질렸다.

“누가 신청했나.”

“구매처의 요청이 있었고, 법무팀에서 사규에 근거한 정기 문서 폐기 절차로 접수했습니다. 아직 상부 결재는 나지 않아서 저희가 보류 중입니다만, 결재가 나면 절차를 막을 수 없습니다.”

신우진은 수첩을 열었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가로선을 그었다. 손가락이 멈추고 다시 한 번 같은 선을 그었다.

“보류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됩니까.”

“이번 주 금요일 오후 5시까지입니다. 그 안에 결재가 완료되면 월요일 오전에 물리적 폐기가 진행됩니다.”

신우진은 모니터를 올려다봤다. 접수번호 AUDIT-2024-0087이 화면에 그대로 떠 있었다. 그의 공문 아래로 '폐기 이관 신청 — 결재 대기 중'이라는 항목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수첩에 날짜를 적었다. 금요일 오후 5시. 손가락 끝이 약간 떨렸다가 멎었다. 그는 파일을 다시 꺼내 접수증 옆에 메모지를 끼워 넣었다.

'폐기 이관 신청 접수일 — 지난주 금요일. 마감 — 금주 금요일 17:00.'

증거인멸이 소문이 아니었다. 공식 절차 안에서, 문서 번호까지 받으며, 이미 진행 중이었다. 신우진은 파일을 닫았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사무실 안에 짧게 울렸다.

무정차 통과4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