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5화
오전 9시. 철도공사 본사 7층 감사실.
이지원은 모니터 앞에 앉았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화면에 사고 조사 보고서 초안을 띄웠다. 오른쪽 창에는 전자 결재 로그를 분리해 배열했다. 마우스 포인터가 로그 항목을 하나씩 짚었다.
보고서 생성: 2월 14일 오전 10시 2분. 작성자: 신우진. 금정차량기지 검수 주임.
로그를 아래로 내렸다.
구매처 검토 요청: 오전 10시 14분. 구매처 접수: 오전 10시 15분. 구매처 과장 서명 완료: 오전 11시 57분.
이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포인터를 해당 라인에 멈췄다.
1시간 57분. 사고 부품이 특정되지도 않은 초안에 구매처 과장이 서명했다.
그녀는 왼쪽 손목 시계를 힐끗 봤다. 그리고 다시 로그로 시선을 돌렸다.
평균 구매처 검토 시간을 알고 있었다. 부품 사양 검토만 최소 4시간 20분. 이번 보고서에는 부품 점검 소견조차 비어 있었다.
이지원이 새 문서를 열었다. 내부 보고용 메모 초안.
제목: 무정차 통과 사고 관련 구매처 결재 특이사항.
첫 줄에 날짜와 사고 번호를 적었다. 다음 줄에 구매처 과장의 서명 완료 시각을 썼다. 그 아래에 평균 검토 시간과의 차이를 병기했다.
'사고 보고서 초안 검토 1시간 57분. 평균 대비 54.7% 수준.'
더 쓸 것이 있었다. 윤태호 과장의 납품사와의 계약 기간. 7년. 대영산업의 KD-2037 포함 제동 계통 부품 14종 납품 기간도 7년.
이지원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었다. 등받이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건 단순한 신속 결재가 아니다. 결재자가 이미 그 부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떤 부품인지, 어떤 문제인지.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걸어갔다. 철도안전법 시행규칙 파일을 뽑았다. 관련 조항을 펼치지 않고 다시 꽂았다. 법 조문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자리로 돌아왔다. 메모 초안을 저장했다. 파일명은 '250214내부검토초안'.
그리고 개인 태블릿을 꺼냈다. 비공식 제보 라인을 열었다.
암호화된 메시지 창에 입력했다.
'금정 무정차 통과 건. 구매처 회의 일정 로그 요청. 2월 13~14일분.'
전송했다.
화면을 닫았다. 태블릿을 서랍 속에 넣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
이지원은 메모 초안을 다시 열었다. 마지막 줄을 추가했다.
'본 건에 대한 공식 감사 개시 전까지 관련 문서 접근 로그 보존 요망.'
파일을 저장하고 로그아웃했다.
시스템 접근 로그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습관이었다.
로그 목록이 화면에 떠올랐다. 날짜별, 계정별, 문서별 접근 기록.
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오늘 오전 7시 48분. 감사실 내부 계정 중 하나가 사고 보고서 원문을 조회했다. 이지원의 배정 이전에. 배정 사실을 시스템이 통보하기 전이다.
그녀는 로그를 스크롤했다. 해당 계정의 최근 활동 이력을 열었다.
같은 계정으로 어젯밤 11시 15분에도 접근했다. 사고 보고서 초안. 구매처 결재 로그. 정비 일지 사본.
이지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감사실 직원의 정규 업무 범위 안이었다. 사고 발생 후 초동 모니터링은 관행이다. 하지만 배정 전 조회는 드물었다.
그녀는 해당 로그 항목을 드래그해 복사했다. 별도 파일에 붙여넣었다. 파일명: '접근로그_특이사항'.
현 단계에서는 시스템 오류일 수도 있다. 사용자 세션 만료 시간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 일단 기록만 남겼다.
파일을 닫았다. 모니터 전원을 껐다.
오전 10시 30분. 철도공사 본사 3층 구매처.
신우진은 복도 벽면 안내판 앞에 섰다. '구매처, 계약관리과'라는 명판을 확인했다. 그대로 사무실 문을 밀었다.
접수대에 앉은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30대 초반 남자. 명찰에 '계약관리과 주임 박성훈'이라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품 시험 성적서 열람하러 왔습니다.” 신우진이 기능복 상의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금정차량기지 검수 주임 신우진입니다.”
박 주임은 신분증을 받아 들었다. 잠시 살피더니 돌려주었다.
“어떤 부품 말씀이시죠.”
“KD-2037-114. 2월 13일 무정차 통과 사고 관련 제동 밸브입니다.”
박 주임의 손가락이 키보드에 닿았다. 품번을 입력했다. 화면을 응시하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건은 사고 조사 진행 중인 건입니다.” “일반 열람이 제한됩니다.”
“검수팀도 안 됩니까.”
“검수팀이면 부품 점검 소견서 제출하실 수 있죠.” 박 주임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시험 성적서 열람은 정비팀장님 결재가 먼저 필요합니다.”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영호 팀장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어제 그 팀장은 보고서에서 부품 항목을 삭제하라고 했다. 운전 부주의로 결론 내자고 했다.
“본부장 승인까지 필요한 사항입니까.”
“네. 팀장 결재 후 본부장 승인까지.” 박 주임이 처음으로 신우진과 눈을 마주쳤다. “규정상 그렇습니다.”
신우진은 구매처 사무실 안을 둘러봤다. 책상마다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다. 벽면 캐비닛에는 '계약서 보관'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 시험 성적서 원본이 있을 터였다.
“사본으로도 안 됩니까.”
“규정상 원본 사본 모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박 주임의 목소리는 예의 바르지만 단호했다. 신우진은 그 눈빛을 읽었다. 이미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알겠습니다.”
신우진은 뒤돌아섰다. 복도로 나왔다.
구매처 문이 닫혔다. 복도는 고요했다. 벽면 안내판의 형광등이 웅웅거렸다.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몇 개의 획을 그었다. 결재 라인. 팀장. 본부장. 구매처.
모든 경로가 막혀 있었다.
사무실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오늘 날짜 옆에 적었다.
'구매처 열람 거부. 팀장 결재 조건. 본부장 승인 필요.' '박성훈 주임 — 사전 지시받은 태도.'
수첩을 덮어 주머니에 넣었다.
구매처 과장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신우진은 그냥 복도를 걸어 나갔다.
오전 10시 45분. 구매처 과장실.
박 주임이 과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과장 최병호가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50대 초반. 안경을 벗으며 눈을 비볐다.
“방금 금정차량기지 검수 주임이 다녀갔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로?”
“KD-2037-114 시험 성적서 열람 요청이었습니다.”
최 과장의 손이 멈췄다. 안경을 다시 쓰며 박 주임을 바라봤다.
“뭐라고 했어요.”
“규정대로 팀장 결재 필요하다고 안내했습니다. 본부장 승인도요.”
“그래요. 잘했어요.”
최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확인했다. 닫혔다.
“검수원 반응은 어땠어요.”
“별말 없었습니다. 알겠다고 하고 나갔습니다.”
박 주임이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이미 지시받은 것 같다는 눈치였습니다.”
“눈치?” 최 과장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갔다. “뭘 눈치챈다는 거요.”
“그냥.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최 과장은 책상 위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됐어요. 나가보세요.”
문이 닫혔다.
최 과장이 윤태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짧게 울리고 연결됐다.
“윤 과장님. 최병호입니다.”
— 예, 과장님.
“방금 검수원 신우진이 구매처에 다녀갔습니다.”
잠시 침묵.
— 시험 성적서 열람이었습니까.
“맞습니다. 팀장 결재 없이 왔더군요.” “규정대로 돌려보냈습니다.”
— 잘하셨습니다. 어떤 부품이었죠.
“KD-2037-114. 사고 당일 그 제동 밸브입니다.”
— 그 외에 다른 자료는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성적서만.”
— 알겠습니다. 혹시 시스템 접근 로그는 확인하셨습니까.
최 과장이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직입니다.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그 부품 관련 시험 성적서 사본과 정비 일지 사본을 이번 주 금요일까지 일괄 정리하시죠. — 문서고 이관을 앞둔 정기 점검 명목으로요.
“기간을 금요일로 못 박으면 눈에 띄지 않을까요.”
— 그러면 다음 주 화요일로 하시죠. — 자연스럽게.
“알겠습니다. 접근 로그는 어떻게 할까요.”
— 열람 요청이 있었으니 기록은 남을 겁니다. — 그건 어쩔 수 없고. — 실제로 누군가 해당 문서 파일을 열람했는지는 확인하시고. — 필요한 부분은 정리하시면 됩니다.
최 과장이 목을 풀었다. “그 정리라는 게... 삭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과장님.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윤태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 삭제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내부 규정에 따른 문서 관리죠. — 구매처 규정 제12조. 비정기 문서 점검 절차에 따른 정리.
“하지만 실제로는...”
—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 부품 시험 성적서는 원래 구매처 보관 문서고에 있었고. — 검수원은 열람 권한이 없어서 돌아갔고. — 그게 전부입니다.
최 과장은 잠시 생각했다. 이미 발을 들였다. 지난 7년간의 계약. 그 사이 여러 번의 작은 편의들. 이번도 같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금요일까지 조치하겠습니다.”
— 과장님, 한 가지만 더. — 아까 그 검수원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했는지도 확인하시고요. — 특히 감사실 쪽과 접촉이 있었는지.
“감사실이요? 거기까지 갔을까요.”
— 모르는 일이니까 확인하는 겁니다. — 7년 동안 유지해온 계약입니다. — 문제가 생기면 우리 모두가 손해죠.
“명심하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최 과장은 의자에 앉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서류를 만지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모니터를 켰다. 시스템 접근 로그 관리 화면을 열었다.
'부품 시험 성적서 — KD-2037 시리즈' 문서 항목을 검색했다. 최근 72시간 접근 이력을 불러왔다.
두 건.
오늘 오전 10시 32분. 박성훈 주임의 검색 이력. 어젯밤 11시 15분. 감사실 계정의 조회 이력.
최 과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감사실이 이미 와 있었다.
화면을 닫았다. 전화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윤태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감사실에서 어젯밤 접근 로그 있음. 확인 요망.'
저녁 7시 45분.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검수고의 형광등이 절반쯤 꺼져 있었다. 야간 근무조가 들어오기 전의 짧은 공백.
신우진은 사무실 문을 밀었다. 냉기가 감돌았다.
자리로 걸어가 기능복 상의를 의자 등받이에 걸치려다 멈췄다.
누군가 그의 책상 옆에 앉아 있었다.
노조 조끼. 팔을 걷어붙인 팔뚝. 낡은 기름 화상 흉터.
한경숙이었다.
“오늘 길었네, 신 주임.” 그녀가 의자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신우진은 기능복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작년에 받은 제보 건.” 한경숙이 수첩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이제 말할 때가 된 것 같아.”
신우진은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오른손 검지가 바지 옆 솔기를 한 번 쓸었다.
“무슨 제보입니까.”
한경숙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앉아.” 그녀가 맞은편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좀 길 거야.”
신우진은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낡은 금속 책상 하나가 놓였다. 그 위로 한경숙의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 빼곡한 글씨. 몇몇 페이지가 접히고 찢겨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속도로. 서울 외곽 방향.
윤태호는 뒷좌석에서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차창 밖으로 납품사 로고가 점멸했다. 붉은 원 안에 'DS'.
최 과장의 문자가 화면에 떠 있었다.
'감사실에서 어젯밤 접근 로그 있음. 확인 요망.'
윤태호는 손가락으로 인장 반지를 한 번 돌렸다. 입가가 1mm 올라갔다.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일 오전 일정 비우세요.” “본부장님 면담 잡아야 합니다.”
비서가 고개를 돌렸다.
“내일은 명절 인사차 방문 예정이었습니다만.”
“그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생겼습니다.” 윤태호가 자세를 바로 했다. “계약 갱신 관련 사전 협의 건입니다.”
차량이 터널로 진입했다. 실내가 어두워졌다. 윤태호의 얼굴에 터널 조명이 띄엄띄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듯 눈을 감았다. 태블릿 화면만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