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6화

한경숙은 수첩을 펼친 채였다.

“작년 11월. 익명 제보 하나가 노조로 들어왔어.” 그녀가 접힌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KD-2037 계열 부품, 교체 주기 조작 의혹. 내부 감사 회피 정황.”

신우진의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에서 멈췄다.

“왜 지금 말합니까.”

“제보자가 증거를 더 모으겠다더군.” 한경숙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한 달 뒤, 그 사람은 부서 이동됐어. 희망 부서도 아닌 지방 발령.”

신우진은 잠시 숨을 고르듯 멈췄다. 오른손 검지가 책상 아래로 내려갔다.

“제보자는 누굽니까.”

“그건 아직.” 한경숙이 수첩을 덮었다. “하지만 제보 내용은 지금 네가 들춰내는 것과 정확히 겹쳐.”

신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목 깊숙이 무언가를 삼키는 듯 턱 근육이 움직였다.

“노트가 있습니다.”

한경숙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7년 전. 우리 팀 선임 검수원이 남긴 조사 노트.” 신우진은 책상 위로 손을 올리지 않았다. “같은 부품 계열. 같은 납품사.”

“원본이 있나.”

“사본만. 선임은 4년 전 퇴직했습니다.” 신우진이 한경숙의 눈을 똑바로 봤다. “노조 쪽 제보 기록, 언제부터 보관됐습니까.”

한경숙은 팔짱을 풀었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 그녀가 일어나며 수첩을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다음에 연락할게. 혼자 가지는 말고.”

사무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복도 발소리가 멀어졌다. 신우진은 의자에 앉은 채로 검수고의 어둠을 바라봤다. 한경숙이 앉았던 자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며칠 뒤 저녁 9시 무렵. 사물함 구역은 형광등 세 개 중 두 개가 꺼져 있었다. 야간 근무조는 반대쪽 유도로에서 작업 중이었다. 신우진은 사물함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단 칸의 잠금장치가 낡은 키에 천천히 돌아갔다. 철제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기능복 여벌, 낡은 공구함, 그리고 A4 크기의 두꺼운 파일 한 권.

파일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표지는 누렇게 변색되었고 귀퉁이가 닳아 있었다. 검은 매직으로 쓰인 글씨. '검수 이상 기록 — 000725~080312'.

숫자 두 개가 연도를 의미했다. 신우진은 첫 페이지를 넘겼다. 손가락이 종이 위를 한 줄 한 줄 짚어 내려갔다.

'06. 11. 14. / KD-2032 제동 밸브 / 대영상사 / 마모 한계치 초과.' '교체 권고. → 구매처 회신: 정상 범위 내. 이상 없음.'

페이지를 넘겼다.

'07. 3. 8. / KD-2032 제동 밸브 / 대영 / 누유 흔적.' '교체 재요청. → 반려. 사유: 규격 적합 판정.'

손가락이 빨라졌다. 신우진의 호흡이 약간 짧아졌다. 눈이 특정 줄에서 멈췄다.

'07. 9. 25. / KD-2035 제동 계통 부품 / 대영 측 / 밀봉 불량 의심.' '로트 번호: DSL-0703-11.' '육안 검사 결과 패킹 홈 깊이 불균일.'

그는 손을 멈췄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왼손으로 기능복 상의에서 유성 매직을 꺼냈다. 파일 옆 빈 A4 용지 위에 숫자를 적었다.

KD-2035. DSL-0703-11. 그 옆에 지금 문제가 된 부품 번호를 적었다. KD-2037-114. 납품 코드는 똑같이 대영.

7년 전과 지금. 모델 번호가 다를 뿐, 계열은 같았다. 결함 양상도 유사했다. 패킹·밀봉·마모.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더 두꺼운 기록이 나타났다.

'08. 2. 19. / KD-2037 초기 로트 / 대영상사 / 작동 불량 보고.' '검수 의견: 제동력 불균형. 납품 규격과 실측치 차이 확인.' '대응: 2개월 후 전량 교체. → 보고서 미작성으로 종결.'

신우진의 손끝이 떨렸다. 떨림이 아니라, 힘이 들어간 정지였다.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짧은 가로선을 그었다.

7년 전에도. 같은 납품사. 같은 증상. 같은 패턴.

그가 일어섰다. 무릎 관절에서 가벼운 소리가 났다. 파일을 사물함 상단으로 옮기고 휴대폰을 꺼냈다.

선임의 노트에서 DSL-0703-11이 적힌 페이지를 폈다. 빛이 나지 않도록 플래시를 끄고 사진을 찍었다. 한 장. 다른 각도에서 한 장 더. 그 옆의 결함 양상 기록도 찍었다.

사진을 확인했다. 번호가 선명하게 보였다.

파일을 닫아 철제 문 안에 넣었다. 자물쇠를 잠그고 일어섰다. 왼손으로 사물함 문을 두드렸다. 두 번.

이제 확실해졌다. 사고 부품의 결함은 우연이 아니었다. 7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묻혔다. 그리고 이번 사고가 터질 때까지 아무도 고치지 않았다.

신우진은 어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입가가 굳게 다물린 채로.

“알고 있었군.”

목소리는 나직했다. 오른손 검지가 바지 옆 솔기를 한 번 쓸었다.

오전 10시 30분. 직원 휴게실.

신우진은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캔커피가 철컥 소리를 내며 배출구에 떨어졌다. 뜨거운 표면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창가 쪽 빈 테이블로 향했다.

기능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 한 번, 짧게 끊겼다. 고개를 들자 한경숙이 휴게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자리 좀 비었나.” 한경숙이 물었다.

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오늘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왼쪽 팔뚝의 오래된 기름 화상 흉터가 형광등 아래서 반들거렸다.

“어젯밤은 짧았네. 퇴근도 못 하고.” 한경숙이 자신의 수첩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동안 뭘 잡았나 궁금해서.”

신우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혀끝을 찔렀다.

“별건 아닙니다.”

“별건 아니고.” 한경숙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구매처에서 문전박대당할 정도는 아닌 모양이지.”

신우진의 손가락이 캔 표면에서 멎었다. 고개를 들어 한경숙을 똑바로 바라봤다. 시선이 곧 질문이었다.

“박정호한테 들었어.” 한경숙은 수첩 표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네가 구매처에 올라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열람 요청이 거부됐고.”

잠시 침묵. 환풍기 소리가 천장에서 웅웅거렸다.

“작년에 내가 제보 하나 받았어.” 한경숙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부품 납품 비리 관련이야. 익명. 목소리 변조.”

신우진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캔이 플라스틱 테이블에 부딪히며 짧은 소리를 냈다.

“노조 차원에서 공론화할 뻔했지.” 그녀가 수첩을 펼쳤다. 몇 페이지 넘기다가 접힌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그런데 증거가 부족했어. 목소리만으론 안 돼. 녹취록만 있고 문서가 없었거든.”

“무슨 부품입니까.”

“그걸 대놓고 말 못 해. 제보자 보호 때문에.” 한경숙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납품 현장 잘 아는 사람이었어. 검수 절차와 부품 교체 시기, 결재 라인까지 꿰고 있더군.”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테이블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왜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가 구매처 문턱을 넘으려다 부딪힌 이유.” 한경숙이 수첩을 덮었다. “그 부딪힘이 단순한 관료적 지연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뒤에 조직적 침묵이 있다면.”

그녀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혼자만의 싸움보단 방법이 있다는 뜻이야.”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유성 매직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플라스틱 몸체가 손가락 마디 사이를 천천히 돌았다.

“제보 내용이.” 매직이 세 번째 회전에서 멈췄다. “제가 보고 있는 부품과 같은 계열입니까.”

한경숙은 잠시 그를 응시했다.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그건 지금 말할 수 없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가의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내가 가진 건 녹취록 하나. 그걸로 공식적인 움직임을 만들 순 없어. 네가 가진 것과 맞춰봐야 해.”

“맞춰본다는 건.”

“네가 잡은 단서와 나의 제보 사이에 연결점이 있느냐.” 한경숙이 수첩을 집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만.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네 입장도 정리해야 할 테니까.”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네가 혼자 부딪혀서 벽을 확인한 건 전화위복일 수도 있어.” 한경숙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디에 벽이 쳐져 있는지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까.”

신우진도 일어났다. 두 사람 사이에 빈 커피 캔 하나만 남았다.

“한 가지 더.” 한경숙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제보자는 아직 살아 있어. 다만 조용히 지내고 있지.”

잠시 뜸을 들였다.

“네 선임 얘기 아니다.”

말을 마치기 전에 그녀는 몸을 돌렸다. 노조 조끼의 형광 주황색 선이 휴게실 문 밖으로 사라졌다.

신우진은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캔을 분리수거함에 눌러 넣으며 생각했다. 제보자 보호. 녹취록. 검수 절차까지 아는 내부자.

오후 1시. 검수고 내 개인 작업 테이블.

신우진은 선반 위에서 낡은 바인더 두 권을 꺼냈다. 하나는 어젯밤 검토한 선임의 조사 노트 사본. 다른 하나는 지난주 구매처에서 받아온 정비 일지 사본이었다. 표지가 손때에 절어 색이 바랬다.

두 자료를 테이블 위에 나란히 펼쳤다. 선임 노트의 부품 로트 번호 목록이 왼쪽. 정비 일지의 교체 기록이 오른쪽.

선임의 필체를 따라가며 날짜를 짚었다. 명확했다. 7년 전 8월 12일.

제동 밸브 TH-1187 계열. 마모패턴 기재. '예상 수명의 67% 시점에서 시트면 박리 발생.' 그로부터 사흘 뒤, 8월 15일.

동일 계열 부품 3건이 긴급 교체 기록 없이 '정상 마모'로 종결 처리됐다. 결재자는 차장 정태섭. 현재 퇴직. 연락 불가.

신우진은 다시 정비 일지의 KD-2037 페이지를 넘겼다. 교체 주기 연기 기록이 세 줄 늘어서 있었다. 날짜와 결재자.

그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향해 한 번,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두 부품은 계열이 다르다. TH-1187은 오래전 단종된 모델. KD-2037은 현재 사용 중인 개량형.

하지만 납품사는 같다. 그 회사. 마모 패턴도 유사했다.

시트면 박리. 그리고 결재 라인. 7년 전과 지금 모두 구매처를 통했다.

오른손 검지가 바인더 철제 클립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기억이 맞물렸다. 한경숙이 말했던 것. '검수 절차와 부품 교체 시기, 결재 라인까지 꿰고 있더군.' 이건 우연이 아니다.

단독 사고도, 개별적 실수도 아니다.

서랍에서 빈 A4 용지 한 장을 꺼냈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유성 매직을 뽑아 뚜껑을 열었다. 매직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짧게 풍겼다.

용지 상단에 썼다. '정비 일지 대조표 — 제동 계통 부품.'

첫 줄을 긋기 전에 잠시 손을 멈췄다. 지난 사흘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검수팀장의 압박.

구매처의 거부. 선임의 노트. 한경숙의 제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는 흩어져 있었다. USB, 개인 수첩, 사무실 외부 보관함. 파편화된 기록들은 조각난 채로는 아무 힘도 없었다. 연결해야 한다.

매직 끝이 용지에 닿았다. 첫 번째 열 제목. '부품 식별 번호.' 두 번째.

'제조 로트 번호.' 세 번째. '교체 예정일.' 네 번째. '실제 교체일.'

선임 노트의 첫 번째 부품 번호를 읽어 내려갔다. TH-1187-A42. 손가락으로 해당 라인을 짚으며 정비 일지의 같은 로트 번호를 찾았다. 없었다. 최소한 이 정비 일지 사본에는.

빈 칸에 작은 점을 찍었다. 일단 비워두기로 했다.

KD-2037-114로 넘어갔다. 이쪽은 기록이 충분했다. 교체 예정일로부터 첫 번째 연기까지의 기간을 표에 적었다. 두 번째까지. 세 번째까지.

숫자가 늘어설수록 패턴이 눈에 박혔다.

매직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피로가 아니라 긴장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기록이 먼저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매직 뚜껑을 닫아 가슴 주머니에 다시 꽂았다. 대조표의 빈 칸들을 훑어보며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세었다. 정비 일지 원본과 사본을 모두 확보할 것. 부품 교체 이력이 있는 페이지는 페이지 단위로 복사할 것. 사본은 최소 두 곳에 분산 보관할 것.

그리고 이지원. 감사실의 그 직원이 며칠 전 검수고로 찾아왔을 때는 거절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 패턴은 감사실의 공식 조사 권한 없이는 입증이 불가능하다.

대조표를 반으로 접어 기능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선임의 노트 사본과 정비 일지 사본을 겹쳐 바인더로 묶었다. 철제 클립을 누르자 퍽 하는 마찰음이 났다.

그 소리가 호흡보다 컸다.

신우진은 사물함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단 칸의 잠금장치가 낡은 키에 천천히 돌아갔다.
철제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기능복 여벌, 낡은 공구함, 그리고 A4 크기의 두꺼운 파일
무정차 통과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