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50화

이지원의 손이 마우스에서 떨어졌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모니터에는 여전히 그 메일의 미리보기가 떠 있었다. '박 고문님께. 1998년 건 관련 요청하신 자료 정리했습니다.' 태산경영연구원.

박동수. 아버지의 보고서를 묵살한 결재자. 지금은 윤태호의 납품사 고문으로 앉아 있는 인물.

그리고 INF-04는 이 두 사람 모두에게 정보를 팔고 있었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원의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의 연쇄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한경숙이 USB를 건네받아 조끼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지원 씨, 지금 볼 거요?”

이지원이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시계 밴드를 쥔 손가락 마디가 여전히 하얬다.

신우진이 입을 열었다.

“열람은 나중에.”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나중이 언제입니까.”

“이 건을 끝낸 다음.”

이지원이 잠시 신우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모니터를 끄지 않은 채 노트북 덮개를 닫았다.

“알겠습니다.”

한경숙이 시계를 봤다. 오전 9시 48분.

“난 노조로 돌아간다. USB 데이터 사본 만들어서 암호화해 둘게.”

“김영수 건은.”

한경숙이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아직 연락 안 닿아. 어머니께서 마지막 통화가 작년 11월이라고 했어.”

“위치 추적은.”

“번호가 세 번 바뀌었어. 지금은 끊긴 상태.”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경숙이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한 가지 더. 노조 감시망에서 재미있는 거 나왔어. 구매처 쪽에서 보관 창고 쪽으로 인력 파견 나간 기록이 작년 10월부터 있어.”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부서에서요.”

“비축관리과. 문서가 아니라 사람이 움직였어.”

한경숙이 그 말을 남기고 소회의실을 나갔다.

신우진이 서류 봉투를 집었다. 증거 목록과 연쇄표를 함께 넣었다.

“보관 창고에 갑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열었다.

“지금이요.”

“원본 성적서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 출력본만으로는 증거 능력에 한계가 있다.”

“보관 창고 열람에는 사전 신청이 필요합니다.”

“공문 접수증이 있습니다.”

신우진이 주머니에서 접수증을 꺼냈다. 어제 기록관리부서에 보냈던 증거보전 공문의 접수증이었다. 번호는 AUDIT-2024-0087.

이지원이 접수증을 확인했다.

“이걸로는 보관 창고 열람 권한이 생기지 않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근거는 된다.”

신우진이 서류 봉투를 들었다.

“정보원 쪽 통신 로그는 계속 모니터링하십시오. INF-04의 추가 접촉선이 나오면 즉시 알려주십시오.”

이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임님.”

신우진이 문간에서 돌아봤다.

“박동수라는 이름을 아버지 보고서에서 처음 봤을 때, 저는 그걸 20년 전의 일로 치부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도요.”

이지원이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닫힌 메일 클라이언트의 아이콘이 보였다.

“그런데 지금 INF-04가 그 박동수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묵살된 해와 똑같은 문건 분류 체계로요.”

신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20년은 지난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이지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그래서 묻습니다. 주임님은 이 싸움이 언제쯤 끝난다고 보십니까.”

신우진이 문손잡이를 쥔 채 멈췄다.

“끝내는 게 아니라, 멈추지 않는 겁니다.”

이지원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말, 기록해도 됩니까.”

“필요하면.”

신우진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오전 10시 15분.

감사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공기관 물품 계약 보관 창고는 철도공사 본사에서 차로 25분 거리였다.

외곽의 낮은 건물. 주차장에는 관용차 세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신우진이 내비게이션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서류 가방에는 공문 접수증과 신분증, 그리고 출력본 사본이 들어 있었다.

민원실로 들어서자 냉방기 소리만 들렸다.

접수 창구에 40대 초반의 남성 직원이 앉아 있었다. 명찰에는 '김민수'라고 적혀 있었다. 소속은 보이지 않았다.

신우진이 신분증과 공문 접수증을 창구에 올렸다.

“철도공사 감사실 신우진입니다. 대한정밀의 2018~2022년 시험 성적서 원본 파일을 열람하러 왔습니다.”

김민수가 공문 접수증을 집었다. 한 번 훑더니 다시 내려놓았다.

“열람 불가합니다.”

“사유가 뭡니까.”

“해당 파일은 현재 이관 중입니다.”

“이관 상태면 이관 신청서와 이동 경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민수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을 보지 않고 신우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부 규정상 이관 중인 문서의 열람은 제한됩니다. 이관 완료 후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이관 완료 예정일이 언제입니까.”

“그건 확인이 어렵습니다.”

신우진이 탁자 위의 공문 접수증을 한 번 더 가리켰다.

“이 공문은 감사실이 발행한 증거보전 요청입니다. 대상은 바로 그 파일입니다. 보전 요청된 문서의 이관 진행 자체가 절차 위반입니다.”

김민수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만요.”

김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신우진은 민원실 벽면의 직원 현황판을 훑었다. 4명의 직원 사진. 김민수의 사진은 왼쪽에서 두 번째. 그런데 사진 아래 소속란에 '철도공사 구매처 비축관리과'라고 적혀 있었다.

신우진이 그 글자를 몇 초간 응시했다.

약 5분 후 김민수가 돌아왔다. 손에는 내부 규정집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규정 제12조 3항입니다. 이관 절차 개시 후에는 외부 열람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신우진이 규정집을 받지 않았다.

“이관 신청서의 접수 일자와 이관 사유서를 보여주십시오.”

“그건 상부 승인 없이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럼 즉시 정보공개청구를 하겠습니다.”

신우진이 가방에서 빈 정보공개청구서 양식을 꺼냈다. 볼펜을 뽑아 신청인란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김민수의 표정이 당황으로 바뀌었다.

“정보공개청구는 처리에 최장 20일이 걸립니다.”

“압니다.”

신우진이 신청서 작성을 멈추지 않았다.

김민수가 다시 한 번 자리를 떴다. 이번에는 민원실 뒤편의 유리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신우진은 신청서를 다 썼다. 청구 대상: 대한정밀 시험 성적서 2018~2022년 파일. 청구 목적: 감사 증거 확보. 접수 번호란은 비워 두었다.

김민수가 7분 만에 돌아왔다. 손에 묻은 물기를 휴지로 닦고 있었다.

“상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보공개청구는 접수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관 상태 확인 요청은 별도 심의가 필요합니다.”

신우진이 신청서를 창구로 밀었다.

“접수증을 주십시오.”

김민수가 신청서에 접수 번호를 기입했다. PID-2024-0312. 접수증을 인쇄해 신우진에게 건넸다.

“이관 신청서를 조회하고 싶습니다. 정보공개청구와 무관하게 현장에서 확인 가능한 기록입니다.”

김민수가 잠시 망설였다.

“잠시만요.”

세 번째로 자리를 떴다.

이번에는 3분도 지나지 않아 유리문이 열렸다. 김민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50대 초반의 여성 직원이 나왔다. 명찰에는 '과장 박은희'라고 적혀 있었다.

“주임님, 직접 안내드리겠습니다.”

박은희가 민원실 안쪽의 PC 한 대를 켰다. 화면이 부팅되는 동안 말을 이었다.

“아까 우리 직원이 설명을 충분히 못 한 것 같습니다. 이관 시스템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모니터에 문서 관리 시스템이 떴다. 박은희가 검색창에 '대한정밀 시험 성적서'를 입력했다.

결과가 하나 떴다.

“여기 보시면, 현재 상태가 '이관 요청 등록'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우진이 화면을 가까이서 봤다.

상태: 이관 요청 등록. 요청 일자: 지난주 금요일. 요청 부서: 구매처. 실행 상태: 미실행.

“물리적 이동은 아직 안 된 겁니까.”

박은희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입니다. 이관 결재가 완료되지 않아서요.”

“그럼 파일은 아직 이 창고에 있다는 말입니까.”

박은희가 대답을 피하며 화면을 닫았다.

“기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관 요청 등록된 문서의 현장 열람은 선례가 없습니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례가 없으면 지금 만드십시오.”

박은희가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건 제 권한이 아닙니다. 구매처 비축관리과장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비축관리과는 구매처 소속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금 이 창고의 문서 열람에 구매처 승인이 왜 필요한지 설명해 주십시오.”

박은희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상부 지침입니다.”

신우진이 서류 가방을 닫았다.

“정보공개청구 접수증은 받았습니다. 처리 기한을 지켜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신우진이 민원실 출입문 앞에서 돌아봤다.

“이관 신청서와 구매처의 파견 인력 현황도 정보공개청구에 포함합니다. 추가 서류는 오늘 중으로 감사실에서 공문 발송하겠습니다.”

박은희의 입술이 얇아졌다.

“알겠습니다.”

신우진이 민원실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휴대폰을 꺼냈다.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의 신호음 뒤에 받았다.

“주임님.”

“보관 창고에서 열람 거부됐습니다. 이관 요청은 등록됐지만 물리적 이동은 미실행입니다.”

“확인했습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민원실 담당 직원의 원 소속이 구매처 비축관리과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경숙 지부장님이 말한 그 파견 인력 말이군요.”

“맞습니다. 보관 창고 열람을 차단하는 게 구매처의 의도된 조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보공개청구는 접수하셨습니까.”

“네. 접수 번호 PID-2024-0312. 처리 기한 20일.”

“너무 깁니다.”

“압니다. 그래서 감사실에서 독촉 공문을 보내주십시오.”

“이미 작성 중입니다.”

이지원의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공문 번호 AUDIT-2024-0091. 제목은 '정보공개청구 이행 촉구 및 보관 창고 열람 협조 요청'. 수신처는 보관 창고와 구매처 비축관리과 동시 발송입니다.”

“좋습니다.”

“한경숙 지부장님께도 연락했습니다. 노조 감시망으로 보관 창고의 파일 이관 기록과 구매처 문서 파기 요청 타임라인을 교차 조회 중입니다.”

“언제쯤 결과가 나옵니까.”

“오늘 저녁쯤이면 윤곽이 나올 거라고 합니다.”

신우진이 차 문을 열었다. 서류 가방을 조수석에 올렸다.

“감사실로 복귀합니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아직입니다.”

“사 옵니다. 김밥.”

“한 줄이면 됩니다.”

전화가 끊겼다.

신우진이 시동을 걸었다. 계기판 시계는 낮 12시 42분.

차량이 주차장을 빠져나와 대로로 진입했다. 앞좌석에 놓인 서류 가방에서 정보공개청구 접수증이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신호 대기 중에 신우진이 접수증을 집어 들었다. 접수 번호 PID-2024-0312. 접수 일자 오늘. 담당자 김민수.

그런데 담당자 소속란을 보던 신우진의 눈이 멈췄다.

'물품 계약 보관 창고'라고 인쇄되어 있을 거라 예상한 그 칸에, 실제로 찍힌 것은 이것이었다.

철도공사 구매처 비축관리과.

현장에서 본 명찰에는 소속이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이 출력한 접수증에는 실제 인사 기록이 찍혀 있었다.

신우진이 접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신호가 바뀌어 있었다.

신우진이 액셀을 밟았다.

보관 창고의 담당자는 구매처 직원이었다. 이관 지연은 태만이 아니었다. 구매처가 보관 창고에 사람을 심어 원본 증거로 가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공단 외곽의 풍경이 흘러갔다.

무정차 통과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