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51화
차량기지 검사실은 오전 9시 30분이면 빈 곳이다.
신우진이 형광등을 켰다. 수은등이 깜박이다 안정됐다. 검사대 위에 서류 가방을 올리고 잠금을 풀었다.
박중호의 출력본을 꺼냈다. TH-1187-04. 가장 상태가 나빴던 부품.
옆 서랍에서 동일 로트 샘플을 꺼냈다. 로트 번호 KD-2037-114-B. 무정차 통과 사고 차량에서 빼낸 것이다.
현미경 전원을 켰다. 배율을 50배로 맞추고 부품 샘플을 스테이지에 고정했다. 초점 조절 다이얼을 돌렸다.
표면이 드러났다.
미세 균열이 패킹 고정면을 따라 방사형으로 퍼져 있었다. 피로 파단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균열 간격이 일정했다. 반복 하중에 의한 진행성 손상 외에는 설명이 안 되는 형태였다.
신우진이 출력본을 집어 들었다.
규격상 허용되는 피로도 수치는 인장 강도 4.2뉴턴, 중량 3.7그램 이내. 출력본에는 4.1뉴턴, 3.6그램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허용 범위 안이다.
현미경 이미지를 컴퓨터 화면으로 전송했다. 캡처 버튼을 눌렀다. 이미지가 저장됐다.
계측 소프트웨어를 실행했다.
스테이지에 샘플을 재고정하고 스캔을 시작했다. 레이저가 표면을 훑었다. 수치가 화면 오른쪽에 실시간으로 떴다.
인장 강도 6.3뉴턴. 중량 4.4그램.
신우진이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다시 스캔을 돌렸다. 두 번째 측정. 6.5뉴턴. 4.5그램.
세 번째. 6.4뉴턴. 4.4그램.
평균값이 왼쪽 하단에 자동 계산됐다. 인장 강도 2.2뉴턴 초과. 중량 0.8그램 초과.
출력본의 수치와는 50퍼센트 이상 차이 났다.
신우진이 스캔 이미지를 출력했다. 균열 지점에 빨간색 마커를 표시했다. 수치 비교표를 엑셀에서 작성했다.
왼쪽 열은 성적서 공식 수치. 오른쪽 열은 실측 평균값. 차이값과 초과율을 세 번째 열에 넣었다.
프린터가 이미지 네 장과 수치표 한 장을 토해냈다.
신우진이 출력물을 책상 위에 나란히 정렬했다. 출력본 원본은 왼쪽 위. 현미경 이미지는 오른쪽 위. 비교표는 아래.
휴대폰을 들어 이지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분석 완료. 인장 강도 2.2뉴턴 초과. 중량 0.8그램 초과. 균열 패턴 피로 파단.”
답장이 10초 만에 왔다. “공식 성적서 수치와 얼마나 다릅니까.”
“50퍼센트 이상.”
“증거 능력 있습니까.”
“원본 출력본 대조. 현미경 이미지 캡처. 실측 수치 비교표. 충분하다.”
“공문 번호 AUDIT-2024-0091에 첨부 증거로 등록합니다. 감사실 도착하면 서명만 하십시오.”
신우진이 검사대를 정리했다. 샘플을 원래 서랍에 넣었다. 출력본과 현미경 이미지, 비교표를 서류 가방에 넣었다.
현미경 전원을 끄기 직전, 스테이지 위에 남은 균열 패턴을 한 번 더 봤다.
금속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2.2뉴턴 초과는 우연이 아니다. 0.8그램 초과도 마찬가지다. 수치는 기록된다. 누군가 지우려 해도 부품 자체가 증거다.
현미경 전원을 껐다.
형광등을 끄고 검사실 문을 닫았다.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서류 가방을 조수석에 올렸다. 시동을 걸었다. 계기판 시계는 오전 10시 8분.
차량이 차량기지 정문을 빠져나갔다. 대로에 진입하기 직전,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지원이었다.
“감사실 복귀 전에 들를 곳이 있습니다.”
“어디.”
“기록관리부서입니다. 폐기 이관 신청 건의 현재 상태를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김민수의 소속이 구매처라면, 이관 요청 자체가 구매처의 지시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겠다.”
전화를 끊고 신우진이 방향 지시등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기록관리부서가 있는 본관 쪽이었다.
기록관리부서 경유 후 본관에서 감사실까지 복귀하는 데 50분이 지났다. 신우진이 복도 끝에서 들은 이지원의 목소리가 화상 테스트를 지시하고 있었다.
감사실 회의실. 오전 10시 58분.
신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왼손에 분석 보고서 파일, 오른손에 노트북 가방.
이지원은 이미 화상 회의 시스템을 켜둔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는 KS R 9211 표준 문서, 현미경 이미지 출력본 7장, 부품별 금속 피로도 수치 비교표가 정렬돼 있었다.
“현미경 분석 결과입니다.”
신우진이 보고서를 건넸다. 이지원이 표지를 넘겼다. 첫 장부터 수치가 빨간색으로 강조돼 있었다.
“TH-1187-04 기준으로 인장 강도 초과분이 2.1뉴턴. 이건 출력본 원본 수치와 일치합니다.”
이지원이 2쪽으로 넘겼다. 디지털 성적서 스크린샷과 실제 측정값이 병렬로 제시돼 있었다.
“디지털은 0.2뉴턴 이내라고 등록돼 있군요.”
“조작입니다. 출력본과 차량기지 샘플 양쪽에서 동일한 편차가 확인됐습니다.”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선 전화를 들었다.
“윤태호 본부장 측 화상 연결 준비됐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짧은 응답이 들렸다.
“지금 연결하겠습니다.”
벽면 모니터가 켜졌다. 검은색 슈트의 40대 남성이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배경은 법무법인 사무실. 윤태호 측 변호사, 구재호.
“감사실 이지원입니다. 금일 현미경 비교 분석 보고서를 감사 증거로 제출하며, 귀 측에 증거 열람 기회를 통보합니다.”
구재호가 화면 밖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었다. 태블릿이었다.
“보고서는 전자문서로 수신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군요.”
“말씀하십시오.”
“인장 강도 2.1뉴턴 초과라고 하셨는데, 구매처 자체 검수 기준으로는 오차 범위 내입니다. 측정 장비 교정 주기에 따른 편차죠.”
이지원이 KS R 9211 표준 문서를 들어 올렸다.
“국제 철도 부품 표준 KS R 9211, 부속서 A. 제동 계통 패킹 부품의 인장 강도 허용오차는 ±0.3뉴턴입니다. 구매처 내부 기준은 이 표준의 하위 규정일 수 없습니다.”
“표준은 표준일 뿐입니다. 실제 운행 환경을 고려한——”
“실제 운행 환경 데이터를 제시하겠습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조작했다. 모니터에 그래프가 떠올랐다. 지난 3년간 B4 계열 제동 패킹 교체 주기 데이터. 정상 마모 곡선이 점선으로, 실제 교체 기록이 실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허용오차 ±0.3뉴턴을 초과한 부품이 장착된 차량은 평균 교체 주기가 23% 단축됐습니다. 지난해 11월 무정차 통과 사고 차량은 교체 후 7개월 시점에서 패킹 마모율이 임계치를 돌파했습니다.”
구재호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한 박자 침묵.
“그래프의 출처는.”
“차량기지 정비 일지와 부품 교체 기록입니다. 전자문서시스템에 등록된 원본이죠.”
“그 기록은——”
“삭제됐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신우진이 말을 끊었다. 구재호의 시선이 카메라 밖으로 옮겨갔다.
“디지털 로그는 서버에서 지워도, 정비 일지는 차량기지마다 현장 보관합니다. 14개 기지 전부에서요.”
신우진이 비교표 한 장을 카메라 앞으로 밀었다.
“TH-1187-04의 인장 강도가 2.1뉴턴 초과한 건 디지털 삭제 이전 출력본, 현장 보관 정비 일지, 그리고 박중호 선임이 금고에 보관한 9년 전 보고서에서 동일하게 확인됩니다. 세 개의 독립된 출처입니다.”
구재호가 잠시 화면 밖을 바라봤다. 누군가와 시선을 교환하는 듯했다.
“추가 검증을 요청하겠습니다. 독립 시험 기관——”
“이미 의뢰했습니다.”
이지원이 봉투를 꺼냈다.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 로고가 찍혀 있었다.
“공인 시험 성적서입니다. 동일 로트 샘플, 동일 측정 조건에서 2.1뉴턴 초과 확인. 발급일은 오늘 아침입니다.”
구재호가 화면을 응시했다. 봉투의 로고를 확인하는 듯 시선이 좁아졌다.
“그렇다면 절차상——”
“절차라면.”
이지원이 봉투를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대한정밀의 자체 시험 성적서는 14년간 동일한 알고리즘으로 조작됐습니다. 인장 강도 2.1뉴턴 감소, 중량 0.6그램 감소, 재질 EPDM을 HNBR로 치환. 이 패턴은 김영수의 USB와 박중호의 9년 전 보고서에서 교차 확인됐습니다.”
구재호의 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프로다.
“표준 해석 차이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군요.”
“조작된 기준값에서 비롯된 허위 주장입니다. 이상으로 감사실의 공식 입장을 마칩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으며 말을 끊었다. 이지원 옆에서 신우진이 천천히 일어났다.
“한 가지만 더.”
구재호의 눈이 신우진 쪽으로 향했다.
“부품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신우진이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 금속 피로도 차이가, 수천 번의 제동에서 쌓인 진실입니다. 변호사님보다 이 부품이 더 정직합니다.”
신우진이 회의실 문을 열었다. 구재호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문이 닫혔다.
복도에 나서자 정적이 찾아왔다. 신우진이 손을 들어 분석 보고서 사본을 확인했다.
회의록은 전자문서시스템에 실시간 등록 중이었다.
증거번호 AUDIT-EV-051-01. 등록 완료.
오후 2시. 감사실 이지원 사무실.
이지원이 감사 보고서 초안 화면을 띄워둔 채 키보드를 멈췄다. 화면에는 현미경 분석 결과가 핵심 증거로 포함돼 있었다.
신우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이지원이 모니터를 돌렸다. 보고서 4장, '내부 정보 유출 정황' 항목이 커서로 강조돼 있었다.
“이 부분입니다.”
스크롤이 내려갔다. 앞선 사건에서 확보한 접속 로그가 표로 정리돼 있었다.
- 2023년 11월 13일 02:14: DELETE 쿼리 실행 - 실행 계정: 감사실 내부 시스템 관리자 권한 - 접속 단말: T-AUD-07 (감사실 2층 사무동) - 당일 비번자: INF-04
“접속 로그와 현미경 분석 결과를 같은 보고서에 넣었습니다.”
이지원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증거 체인 연결도가 팝업됐다. 삭제 명령 — 접속 로그 — 출력본 인쇄 시각 — 금속 피로도 실측값이 화살표로 이어져 있었다.
“내부 정보원이 이 증거 체인의 시작점을 끊으려고 한 겁니다. 삭제 명령 없이는 성적서 조작도 은폐될 수 없었으니까.”
신우진이 화면을 응시했다.
“통신 기록 조회는.”
“공문 작성 중입니다.”
이지원이 다른 창을 열었다. 전자 결재 시스템에 공문 초안이 떠 있었다.
수신: IT보안팀 제목: 감사실 계정 통신 기록 조회 요청 (관련: 감사 건 AU-2024-003) 내용: 2023년 11월 1일부터 현재까지 INF-04 계정의 외부 메일 발송 로그, 내부 메신저 기록, COOP_04 공용 계정 접속 IP 이력
“이제 정보원을 직접 확인할 때입니다.”
신우진이 끄덕였다.
“앞선 사건에서 INF-04가 비번일에 접속한 시각, 그리고 김민혁이 문서를 빼돌린 경로. 두 개가 같은 배후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포니테일이 어깨를 스쳤다.
“아버지 사건에서도 같은——”
말이 끊겼다. 이지원의 오른손이 마우스에서 떨어져 잠시 멈췄다.
“아니, 지금은 통신 기록이 먼저입니다.”
신우진이 묻지 않았다. 이지원이 공문의 마지막 줄을 채웠다.
'상기 계정의 통신 기록을 감사 증거로 보존하고, 조회 결과를 감사실로 송부 요망.'
이지원이 결재 버튼을 클릭했다. 전자 결재 시스템에 공문이 업로드됐다.
문서 번호 AUDIT-2024-0102 자동 발급.
결재선: 감사실장 김재원.
상태: 승인 대기.
“내일이면 우리 안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될 거예요.”
이지원이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화면에는 공문의 결재 상태 표시줄이 깜빡거렸다. 그 아래로 앞선 사건 접속 로그의 IP 주소가 떠올라 보였다. 20년 전 아버지 보고서의 결재 직인보다 하루 앞선 날짜가, 다른 화면 어딘가에서 이 순간을 기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