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52화
오전 9시 15분. 감사실 복도 끝, 이지원의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신우진이 노크 없이 들어섰다. 이지원은 이미 모니터 두 대 앞에 앉아 있었다. 왼쪽 화면에는 전자 결재 시스템의 승인 완료 표시. 오른쪽 화면은 IT보안팀에서 방금 열어준 통신 로그 조회 인터페이스였다.
“들어오세요.”
이지원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포니테일이 왼쪽 어깨를 스쳤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신우진이 그 옆에 섰다. 화면에 필터 조건이 떴다. 계정 INF-04, 기간 2023년 11월 1일부터 현재, 유형은 외부 메일 발송·내부 메신저·COOP_04 공용 계정 접속 IP.
“공문이 방금 승인됐습니다. 김재원 감사실장이 직접.”
이지원이 조회 버튼을 클릭했다. 시스템이 3초 동안 로그를 긁어모았다. 진행 표시줄이 차오르고, 결과 창이 열렸다. 외부 메일 발송 기록 47건.
이지원이 수신처 컬럼을 정렬했다. dhparts.com에서 31건. 제목들은 ‘확인 필요. 감사실 신규 보고 건’, ‘금주 정보원 라인 제보 요약’, ‘구매처 요청 건 진행 상황’, ‘비공개 회의 일정 변경’이었다.
“전부 윤태호 비서실로 추정되는 주소입니다.”
신우진이 화면을 응시했다. “주기는.”
이지원이 발송 일자를 월별로 그룹핑했다. 11월 5건, 12월 4건, 1월 3건, 2월 5건, 3월 4건, 4월 6건, 5월 4건. “평균 주 1.2회. 계약 갱신 무렵과 감사 일정 전후에 집중됐습니다.”
내부 메신저 탭을 열었다. INF-04와 auditclerk03 간 메시지 22건.
‘초안 v2.1 접근 가능합니다.’ ‘열람 완료. 파일은?’ ‘COOP_04로 전달했습니다.’
이지원의 왼손이 손목의 메탈 시곗줄을 한 번 톡 쳤다. “초안 전달부터 열람까지 평균 4분. 배상호와 동일한 패턴입니다.”
COOP_04 공용 계정 접속 IP 이력을 불러왔다. T-PROC-12, 구매처 자재관리과 공용 보조 단말기. 지난 6개월간 23회 접속. 시각은 외부 메일 발송 직전 또는 직후였다.
“김민혁은 INF-04 계정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COOP_04로 빼내 자재관리과 단말기에서 유출했습니다. 수신처는 전부 dhparts.com.”
이지원이 프린터를 켰다. 로그 화면 전체를 캡처해 메일 발송 목록, 메신저 대화, IP 접속 이력 세 장을 출력했다. 이어 감사실 전자문서시스템을 열었다. 증거번호 AUDIT-EV-052-01, 제목 ‘정보원 INF-04(김민혁) 외부 유출 통신 로그’. 첨부파일로 캡처 파일을 올렸다.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이지원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김민혁은 제 정보원 라인에서 제일 오래됐습니다. 2년 3개월.”
클릭. “등록됐습니다.”
이지원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가 떨어졌다. 신우진이 출력물을 집어 들었다.
“이걸로 김민혁은 확정입니다. 문제는——”
“왜.”
이지원이 말을 잘랐다. 차분했지만 끝이 살짝 올라갔다.
“왜 그가 윤태호 쪽이었는지. 2년 전 제가 직접 선발했습니다. 현장 경험 많고, 부품 납품 구조에 불만이 많았고, 내부 고발 의지도 있었습니다.”
신우진이 출력물을 내려놓았다. “배경을 확인해야 합니다. 임용 경로, 추천인, 이전 근무지.”
이지원이 인사 시스템에 접속해 김민혁의 기록을 불러왔다. 입사일 2019년 3월 4일, 배치 구매처 자재관리과, 2021년 9월 감사실로 전입. 추천인란에 강필구.
이지원의 손이 멈췄다. “강필구.”
목소리가 한 톤 내려갔다. 신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아는 이름입니까.”
이지원은 대답하지 않고 인사 시스템 구 기록 보관소에서 비공개 전출·징계 기록을 검색했다. 결과 1건. 문서번호 HR-1998-087. 제목: 감사실 직원 이철규 징계 및 전출 건. 기안자: 강필구, 당시 직위 감사실 차장.
이지원의 호흡이 한 번 멈췄다. 오른손이 마우스에서 떨어졌다. 손가락 끝이 살짝 굽었다 펴졌다.
“강필구는 20년 전 아버지를 좌천시킨 기안자입니다.”
신우진이 침묵했다. 이지원이 문서를 끝까지 스크롤했다. 결재선: 기안자 강필구, 검토자 감사실장 김재원, 승인자 구매본부장 박동수.
“같은 결재 라인입니다. 김재원, 박동수. 아버지 보고서를 묵살한 사람들과 동일한.”
이지원이 다시 강필구의 현재 이력을 조회했다. 퇴직일 2003년 6월, 2005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철도산업협회 정책자문위원, 2022년 4월부터 현재 태산경영연구원 수석고문.
“태산경영연구원.” 이지원이 말했다. 신우진이 출력물을 내려다봤다. “박동수가 설립한 곳.”
“맞습니다.”
이지원이 김민혁의 임용 경로를 역추적했다. 2018년 11월 대한정밀 품질관리팀에서 퇴사, 2019년 1월 강필구 명의의 추천서가 인사과에 접수됨. 추천 사유는 ‘현장 품질 분야 전문성 및 공직 적합성’.
“강필구가 김민혁을 심었습니다. 내 정보원 라인에, 2년 전부터.”
이지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왼손이 메탈 시계 밴드를 두 번 톡 쳤다. 평소보다 한 번 더.
통신 로그로 돌아가 INF-04의 외부 메일 수신처 중 dhparts.com 외 주소를 필터링했다. taesan.re.kr에서 2건. 작년 4월 15일과 올해 1월 22일. 제목은 ‘보고 드립니다.’와 ‘연락 요청 건.’ 수신자는 ‘박 고문님’.
이지원이 두 건의 메일을 열었다. 본문은 짧았지만 첨부 파일이 있었다. ‘AU-2024-003초안v1.3.pdf’, ‘정보원라인제보목록2023_12.xlsx’.
“박동수에게도 같은 문서가 갔습니다. 경로는 김민혁에서 강필구, 박동수.”
이지원이 두 건의 메일도 증거로 등록했다. AUDIT-EV-052-02. 프린터가 다시 돌았다. 출력물을 집어 든 이지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로 멈췄다.
“강필구가 지금 윤태호와 같은 곳에 있습니다. 태산경영연구원은 윤태호의 컨설팅 계약처 중 하나입니다.”
신우진이 출력물을 정리하며 말했다. “20년 전과 현재가 같은 라인입니다.”
이지원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아버지가 징계받은 날로부터 23일 뒤, 강필구가 부감사실장으로 승진했습니다.”
화면에는 HR-1998-087의 마지막 페이지가 떠 있었다. 징계 확정일 1998년 5월 1일. 하단 메모: ‘후속 인사 조치 완료 — 강필구 부감사실장 승진 발령’.
이지원이 문서를 닫았다. “20년 동안 조직 안에 박혀 있던 구조입니다. 아버지를 자르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람을 심고,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정보를 빼내고 있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나 두 장의 출력물을 손에 들었다. 한 장은 김민혁의 통신 로그, 다른 한 장은 강필구의 인사 기록.
“이건 감사 보고서에 들어갑니다. 20년 된 연결고리라는 제목으로.”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혁의 신병 확보는.”
“아직 안 됩니다. 통신 기록만으로 체포 영장은 못 받습니다. 하지만 이 공문이 승인되는 대로 김민혁의 모든 통신을 실시간 모니터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다음에 누구에게 연락하는지, 언제 움직이는지 포착할 수 있습니다.”
신우진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시간 문제군요.”
“아닙니다.” 이지원이 출력물을 책상 위에 평평하게 놓았다. 왼손으로 메탈 시계 밴드를 만지려다 멈췄다.
“이제부터는 김민혁이 아니라, 그가 연결된 선 전체가 대상입니다. 강필구, 박동수, 윤태호. 20년 전 아버지 보고서를 묵살한 결재 라인이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신우진이 잠시 멈춰 섰다. “알겠습니다. 감사 보고서는 오늘 중으로 마무리하겠습니까.”
“오후 3시까지 초안을 완성합니다.”
이지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로 돌아왔다. 화면에는 감사 보고서 초안 파일이 열렸다. 커서가 ‘Ⅳ. 내부 정보원 유출 경로 및 배후’ 항목에서 깜빡였다.
소회의실 문이 열렸다.
한경숙이 먼저 들어왔다. 기능성 재킷 주머니에서 A4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는 두께가 있었다. 신우진이 일어섰고, 이지원은 이미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다. 오전 10시 17분이었다.
“위원장이 직접 결재했습니다.”
한경숙이 봉투를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왼쪽 팔뚝의 기름 화상 흉터가 팔을 뻗으며 드러났다.
“노조 중앙회의 감사 자료에서 분리한 정치 후원금 장부 사본입니다. 3년 치. 태흥컨설팅과 미래정책연구소를 경유한 내역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지원이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세 묶음. 각각 상단 오른쪽에 ‘사본 1/3’, ‘사본 2/3’, ‘사본 3/3’이라고 펜으로 적혀 있었다. 한경숙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접힌 노조 로고의 서면 동의서를 꺼내 밀었다.
이지원이 첫 장을 넘겼다. 엑셀 시트 출력물. 날짜 오름차순, 계좌번호 끝 네 자리, 금액, 수취처 약칭이 차례로 찍혀 있었다.
“작년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여섯 달 동안 총 열두 건입니다. 수취처 네 곳 중 세 곳이 지방선거 캠프, 나머지 한 곳은 의원실 후원계좌로 추정됩니다.”
신우진이 서류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표 상단 ‘인출일: 2024년 2월 12일’. 인출 시각은 야간이었다.
“철도공사 구매본부와의 연계 소요라고 적힌 항목이 따로 있습니까.”
이지원이 마지막 장을 집었다. 하단 여백에 작은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있습니다. ‘철도공사 구매본부-지역 정책 연계 소요’로 분류된 항목이 두 건, 합계 1억 2천만 원입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선 사건의 금속 피로도 조작 증거와 경제적 동기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기술적 은폐 배후에 정치 자금 경로가 있다는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경숙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걸로 윤태호가 왜 B4 계열 부품 교체를 막았는지 설명이 됩니다. 납품 계약이 깨지면 선거 캠프 자금 라인이 끊기니까.”
이지원이 장부 사본 세 묶음을 정렬하며 말했다.
“증거번호 AUDIT-2024-0103으로 지금 등록하겠습니다.”
그녀가 노트북을 열고 전자문서시스템 증거 등록 메뉴로 들어갔다. 신우진이 한경숙을 보았다.
“USB 원본은.”
한경숙이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냈다. 암호화 USB였다.
“여기 있습니다. 위원장님 지시로 감사실에만 제공. 외부 유출은 노조 내부의 공식 결의가 필요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지원이 키보드를 쳤다. 분류: 정치 후원금 관련 자료. 출처: 철도노조 중앙회.
제공자: 한경숙 지부장. 화면 오른쪽 하단에 등록 시각이 찍혔다. 오전 10시 24분.
신우진이 자신의 서류 묶음을 펼쳐 두 번째 장을 넘기며 날짜와 금액을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왼손 집게손가락의 유압유 흉터가 종이 위로 지나갔다.
“입금 패턴이 있습니다. 각 지방선거구마다 분기별로 비슷한 금액이 반복됩니다. 태흥컨설팅에서 분배하는 구조로 보입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기술 증거와 연결하겠습니다. 부품 성적서 조작의 경제적 배경으로 이 장부를 위치시킬 겁니다. 앞선 사건의 현미경 분석 보고서와 하나의 체인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한경숙이 테이블 위 USB를 조심스럽게 감사실 증거 보관 봉투 안으로 옮겼다.
“법률 검토가 필요합니다. 공익 제보로 처리하려면 증거의 적법한 획득 경로를 입증할 변호사가 있어야 합니다. 노조 법률팀에 의뢰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신우진은 장부의 입출금 내역과 구매 계약서의 날짜를 대조하기 시작했다. 이지원은 전자문서시스템에서 앞선 사건의 금속 피로도 보고서를 불러왔다. 한경숙은 휴대폰으로 노조 법률팀에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 11시 6분. 신우진이 손을 멈추고 말했다.
“대조 결과입니다. 장부 인출일과 구매처의 비정상적 빠른 결재일이 일치하는 건이 네 건입니다. 모두 B4 계열 부품의 납품 계약 연장 시점과 겹칩니다.”
이지원이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돌려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증거 체인 연결도. 왼쪽부터 금속 피로도 보고서, 김영수 USB의 조작 알고리즘, 통신 로그의 내부 유출 증거, 그리고 방금 등록한 정치 후원금 장부가 화살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가 화면을 넘기자 상단에 ‘감사 대응 전략 초안’이라고 적힌 새 문서가 떴다.
“이 증거 체인을 바탕으로 감사 보고서에 세 갈래로 대응합니다. 첫째, 신우진 님은 기술 증거를 보강합니다. 교체 주기 단축 데이터에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의 독립적인 재료 분석을 추가하겠습니다.”
신우진이 끄덕였다.
“둘째, 저는 내부 감사 절차를 확장합니다. 강필구—윤태호 연결고리에 대한 내사를 공식 개시하고, 김민혁의 신상과 접속 기록을 포렌식으로 보강하겠습니다.”
한경숙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정치 후원금 공익 제보를 준비합니다. 노조 법률팀의 검토 의견이 나오는 대로 국민권익위원회 제보 절차를 밟겠습니다.”
이지원이 전략 문서를 저장했다.
“감사실장에게 오늘 오후 구두 보고하겠습니다. 증거 체인이 방어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한경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률팀에서 답이 왔습니다. 내일 오후 2시까지 검토 의견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그녀가 USB 보관 봉투를 확인하고 소회의실 문으로 향했다. 문이 닫혔다.
신우진이 장부 복사본을 정리하며 물었다.
“강필구 쪽 인사 기록은.”
“별도로 요청했습니다. 기록관리부서가 20년 전 인사 발령 문서의 마이크로필름을 찾는 중입니다. 다음 주 초에 열람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회의실을 나서 복도를 걸어 자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 내부 우편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갈색, 송신자 표시 없음. 수신인란에 ‘감사실 이지원’이라고만 찍혀 있었다.
이지원이 봉투를 찢었다. 안에는 접힌 A4 용지 두 장. 복사본이었다. 첫 장 상단에 손글씨로 ‘1998년 4월 14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필체는 뻣뻣하고 획이 강했다.
둘째 장 마지막 줄을 읽었다.
만약 이 일이 드러나면 모든 책임은 이지원의 아버지에게 덮어씌운다.
이지원의 손이 멈췄다. 종이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봉투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복도 쪽에서 신우진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문을 향해 돌아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