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55화
차량기지 사무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알림이 떴다. 전자결재 시스템의 새 공문 도착 표시였다.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부품 긴급 수급 안정화 TF 발족 및 업무 협조 요청(긴급)」
발신은 본사 구매처. 수신은 전 부서 및 현업 기관.
신우진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마우스를 쥐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클릭 한 번에 공문 본문이 열렸다.
스크롤을 내렸다. 한 줄씩 눈이 따라갔다.
‘B4 계열 제동장치 부품의 수급 불안정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안정적 부품 확보 및 운영 연속성 유지를 위해 구매처 주관 TF를 발족함.’
‘TF는 감사 대상으로 지정된 부품을 포함한 B4 계열 전 품목에 대한 긴급 수급 품목 재분류 권한을 가짐.’
신우진의 시선이 멈췄다. 세 번째 조항이었다.
‘TF 활동 기간 중 해당 품목에 대한 외부 감사 절차는 TF의 기술 검토 완료 시까지 유예될 수 있음.’
마우스 휠이 멈췄다.
신우진이 공문을 닫았다. 창을 닫지 않고 최소화만 했다. 오른손이 휴대폰을 집었다. 한경숙의 번호를 누르지 않고 메시지를 입력했다.
‘지금 뵙겠습니다. 긴급입니다. TF 발족. 30분 후 노조 사무실.’
전송.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코트를 걸쳤다.
사무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발걸음이 빨랐다.
노조 사무실. 오후 2시 40분.
문을 열자 한경숙이 앉아 있었다. 모니터를 보는 중이었다. 같은 공문이 화면에 떠 있었다.
한경숙이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이 풀렸다.
“이미 봤다.”
신우진이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겼다. 앉으면서 말했다.
“품목 재분류 권한. 감사 유예. 핵심입니다.”
“노조 쪽에도 연락이 왔어.”
한경숙이 인쇄물 한 장을 밀었다. TF 사무국에서 노조로 보낸 협조 공문이었다.
신우진이 읽었다.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집단검수거부 관련 현장 기록의 열람 및 복사 권한 제한 검토 중.’
“기록을 막겠다는 거다.”
“TF가 끝날 때까지.”
한경숙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분노를 누르는 톤이었다.
“검수거부 기록에는 어떤 게 있습니까.”
“현장 검수 일지 전부. 교체 부품 로트 기록. 이상 마모 보고서. 그리고 작년에 접수한 익명 제보 원본.”
신우진의 오른손이 허공에 짧은 선을 그었다.
“그 기록들, TF 접근 전에 보존해야 합니다.”
“어디에.”
“노조 금고. 감사실에도 사본을 제출하고.”
한경숙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팔짱이 다시 접혔다.
“노조 규약상, 공식 보존 요청은 외부 기관이 할 수 있어. 감사실 명의로 공문을 넣어.”
“지금 작성하겠습니다.”
신우진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전원을 켜는 동안 한경숙이 말을 이었다.
“보존 대상 목록은 네가 정해. 박중호 보고서 관련 부품이 최우선이야. 거기에 어떤 기록이 연결되는지 내가 안다.”
“작년 제보 원본. 그걸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
신우진이 노트북 화면을 열며 대답했다.
“강도영 목록에서 확인했습니다. 윤태호가 인지하지 못한 제보가 유일하게 그겁니다. 폐기 지시 목록에도 없었어요.”
한경숙의 눈매가 좁아졌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녀가 일어났다.
“따라와.”
노조 문서 보관 창고. 오후 3시 15분.
복도 끝 철문이었다. 한경숙이 열쇠 두 개를 차례로 꽂았다. 첫 번째는 도어락, 두 번째는 손잡이 아래 자물쇠였다.
문이 열렸다. 형광등이 깜빡이다 켜졌다.
선반이 양쪽 벽을 가득 메웠다. 박스마다 연도와 분류 번호가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한경숙이 구석으로 걸어갔다. 선반 아래쪽, 회색 사물함이었다. 작은 열쇠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작년 4월 7일 접수. 익명 제보.”
사물함 안에는 A4 봉투 하나와 USB 메모리 한 개가 있었다. 봉투 겉면에 ‘내부고발-부품 시험성적서 조작’이라고 적혀 있었다.
신우진이 가방에서 박중호 보고서 사본을 꺼냈다. 책상이 없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펼쳤다.
봉투를 열었다. 출력물 세 장이 나왔다.
첫 장 상단. 시험성적서 사본이었다. 관리 번호가 찍혀 있었다.
DH-09-2A-824.
신우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보고서 사본의 해당 페이지를 넘겼다. 박중호가 기록한 로트번호 목록. 같은 페이지에 DH-09-2A-773이 있었다.
“DH. 같은 제조사.”
한경숙이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09는.”
“2009년. 2A는 금형라인.”
신우진이 두 문서를 나란히 놓았다. 왼쪽은 박중호의 보고서. 오른쪽은 익명 제보.
손가락이 번호를 하나씩 짚었다. DH-09-2A-773. DH-09-2A-824. 일련번호만 다르다. 나머지는 완전히 같았다.
“동일 제조사, 동일 연도, 동일 금형라인.”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냈다. 두 문서가 겹쳐진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세 장. 각도별로.
한경숙이 USB를 들었다.
“이건.”
“확인은 사무실에서.”
신우진이 봉투와 USB를 챙겼다. 보고서 사본도 조심히 접어 가방에 넣었다. 바닥에서 일어나며 무릎의 먼지를 털었다.
“연결됩니다. 9년 전과 현재. 같은 부품 계열에서 같은 조작이 반복됐습니다.”
한경숙이 사물함 문을 닫았다.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렸다.
노조 사무실. 오후 4시 10분.
신우진이 노트북에 목록을 작성했다. 한경숙은 맞은편에서 USB를 자신의 노트북에 꽂았다. 파일 목록이 화면에 떴다.
‘2009입고검사원본.pdf’ ‘2013시험성적서비교.xlsx’ ‘2015개정안문제점.hwp’ ‘202311최종_증거.hwp’
한경숙이 마지막 파일을 클릭했다. 문서가 열렸다.
“이거.”
내용은 2023년 무정차 통과 사고 차량의 부품 검수 데이터였다. 인장 강도 측정값이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규격 기준과 실제 측정값의 차이가 빨간 글씨로 강조되어 있었다.
신우진이 일어나 한경숙의 화면을 보러 갔다.
“2.1뉴턴 초과.”
“박중호 보고서랑 똑같은 패턴이네.”
신우진이 자기 노트북으로 돌아갔다. 목록 작성을 계속했다. 키보드 소리가 이어졌다.
항목 1: 현장 검수 일지 (B4 계열, 2018~2023) 항목 2: 이상 마모 보고서 (B4 계열, 2020~2023) 항목 3: 익명 제보 원본 (2023.4.7 접수, USB 및 출력물) 항목 4: 박중호 보고서 관련 부품 검수 기록 (DH-09-2A 계열, 2009~2014)
한경숙이 프린터를 켰다. 목록이 두 장 출력됐다. 그녀가 원본에 서명했다. 신우진에게 펜을 건넸다. 신우진도 서명했다.
“원본은 노조 금고. 사본은 네가 감사실로.”
한경숙이 말하며 금고 문을 열었다. 서류를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금속성 잠금 소리가 났다.
신우진이 목록 사본을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노트북을 가방에 담았다. 가방 지퍼를 잠그던 손이 멈췄다.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책상 위에서 길게 이어졌다.
전자결재 알림이었다. 발신은 본사 구매처 TF 사무국. 수신은 한경숙. 참조에 신우진의 이름도 있었다.
한경숙이 먼저 화면을 열었다. 표정이 굳어졌다.
“읽어봐.”
신우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공문 본문을 스크롤했다.
‘부품 긴급 수급 안정화 TF는 노동조합이 보유한 검수 관련 모든 기록을 TF 활동 종료 시까지 열람 및 복사할 권한을 가진다.’
‘상기 권한은 단체협약 제34조 2항 및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8조에 근거한다.’
‘기록 인도 협조를 11월 13일 오후 5시까지 요청함.’
한경숙이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이거, 우리가 목록을 감사실에 넘기기 전에 TF가 먼저 기록을 가져가겠다는 뜻입니다.”
신우진이 시계를 봤다. 오후 4시 13분. 감사실 마감까지 47분.
안주머니의 목록을 다시 꺼냈다. 반으로 접힌 종이가 펴졌다. 손가락으로 한 번 더 접어 가로세로 작게 만들었다. 코트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 단추를 잠갔다.
“금고 기록은 못 건드립니다. 열람 권한은 있어도 압수 권한은 없어요.”
“사무실 기록은.”
한경숙이 주변 서류 캐비닛을 훑었다. 세 개의 철제 캐비닛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옮겨야 해. 지금.”
신우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이지원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말했다.
“감사실 도착 예정 시간을 앞당기겠습니다. 기록 보존 목록을 먼저 접수시키고, TF 공문에 대한 이의 제기를 같이 준비합니다.”
“가. 여긴 내가 정리해.”
한경숙이 이미 캐비닛 첫 번째 서랍을 열고 있었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신우진이 사무실 문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운동화 바닥이 바닥을 차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차가웠다. 숨이 하얗게 퍼졌다.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우려는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지원이었다.
신우진이 전화를 받으며 길가로 나섰다.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이지원입니다. TF 공문 확인했습니다. 지금 감사실로 가는 중입니까.”
“예. 20분 안에 도착합니다.”
택시 뒷좌석에 올랐다. 문이 닫혔다. 손에 든 목록 사본이 약간 구겨졌다. 펴서 무릎 위에 올렸다.
“감사실 도착하면 바로 기록 보존 목록 접수하겠습니다. TF 열람 권한보다 우리 접수가 빠르면, 보존 중인 기록은 이관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제가 먼저 접수 번호 받아놓겠습니다. 오시는 대로 서명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죠.”
통화가 끝났다. 신우진이 차창 밖을 봤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계기판 시계가 4시 18분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