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57화
아침 6시 43분. 차량기지 휴게실.
최명식이 사물함 앞 긴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뒀다. 교대까지 한 시간 남짓. 헬멧을 벗어 옆자리에 두고, 앞머리를 손으로 대충 쓸어 넘겼다.
화면에는 온라인 게임 레이드 화면이 떠 있었다. 헤드셋을 한쪽 귀에만 걸친 채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채팅창에 익숙한 닉네임이 떠올랐다.
'차민수'였다.
최명식이 채팅창을 클릭했다. 차민수는 같은 길드 소속. 평소에는 아이템 거래나 레이드 공략 얘기만 하던 상대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말이 적었다.
차민수: 요즘 야근에 찌들어 살어. 최명식: ㅋㅋ 공장 바쁘냐 차민수: 바쁜 것보다... 찝찝한 게 더 스트레스다 최명식: 무슨 일인데 차민수: 요즘 검사팀이랑 품질팀 사이 분위기 안 좋아. 너네 쪽 감사 건 때문인 거 같긴 한데...
최명식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왼손이 뒷목을 만졌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최명식: 어떤 분위긴데 구체적으로 차민수: 공장에서는 검수용이랑 납품용 시험성적서 따로 발행한다는 소문 돌고 있어 차민수: 진짠지 아닌지는 몰라도. 품질팀이 요즘 야근을 너무 많이 해 차민수: 근데 내가 말한 건 우리끼리만. 나중에 일 커지면 곤란해
최명식이 노트북 옆에 놓인 수첩을 집어 들었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볼펜을 뽑았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수첩을 펼쳐 빠르게 적었다.
'검수용 / 납품용 — 시험성적서 이중 발행. 차민수, 대한정밀 내부 소문.'
게임 채팅창으로 눈을 돌렸다.
최명식: ㄱㅅ. 나중에 보자
차민수가 답을 쓰기 전에 게임을 종료했다. 노트북을 접고 일어났다. 수첩 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헬멧은 그냥 사물함 위에 올려두고 휴게실 문을 나섰다.
아침 7시 12분. 차량기지 정문 통과 직후, 중정에서 정비고 B동으로 이어지는 복도.
신우진이 걸어가고 있었다. 검수복 위에 형광 안전조끼. 왼쪽 가슴 주머니에 유성 매직이 꽂혀 있었다. 어젯밤 사무실에서 이지원과 작성한 시간표 초안을 새벽까지 다듬느라 잠이 부족한 얼굴이었다.
복도 중간쯤에서 발소리가 빨라졌다.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
“선배님!”
최명식이었다. 숨이 약간 가빴다. 손에 수첩을 쥔 채였다.
신우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무슨 일이냐.”
최명식이 수첩을 펼쳐 보이며 말을 쏟아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고 빨랐다.
“방금 게임 길드원한테 들은 건데, 대한정밀 내부 소문이래요. 공장에서 검수용이랑 납품용 시험성적서를 따로 발행한대요. 진짠지 아닌지는 확인 안 됐는데...”
신우진이 수첩을 받아 들었다. 짧게 훑었다. 시선이 '이중 발행'이라는 단어에서 멈췄다.
“누구한테 들었나.”
“차민수라고, 대한정밀 소속이에요. 게임 길드원이에요.”
신우진이 수첩을 접어 돌려주며 물었다.
“검증할 방법은.”
최명식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이지원 선배님한테 확인해 보는 게... 과거 발급 기록 추적이 가능한지.”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냈다. 이지원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최명식을 한 번 더 쳐다봤다.
“차민수한테 더 캐물은 건.”
“따로 발행한다는 것만 말했어요. 구체적인 패턴이나 발행 경위는... 안 물어봤고, 저쪽도 말 안 했어요. 일 커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짧게 울렸다. 수신음이 이어지는 동안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명식이 그의 옆에서 따라 걸으며 말을 보탰다.
“한경숙 위원장님한테 작년에 접수된 익명 제보에도 시험성적서 관련 내용이 있었다면서요. 그거랑 연결될 수도...”
“일단 이지원한테 확인.”
신우진이 짧게 잘랐다. 수화기 너머로 이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우진 주임님.”
“최명식이 정보 하나 가져왔습니다. 대한정밀 내부 소문. 검수용과 납품용 시험성적서 이중 발행 정황.”
이지원의 숨소리가 잠시 멈췄다.
“원출처는.”
“게임 길드원. 대한정밀 소속 차민수. 이름은 확인했습니다.”
“소문 수준인가요.”
신우진이 최명식을 바라봤다. 최명식이 고개를 저었다.
“소문 수준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약간 빨라졌다.
“지금 어디십니까.”
“정비고 복도입니다.”
“사무실로 가겠습니다. 재발급 전말은 감사실 로그로 추적 가능합니다. 오늘 오전 중에 비교 데이터를 뽑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정비고 B동 출입구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최명식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이거... 진짜면 완전히 다른 증거 라인이 생기는 거죠?”
신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조금 늦추며 말했다.
“사무실로 가자.”
차량기지 정비고 임시 사무실. 오전 9시 15분.
신우진이 책상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박중호의 9년 전 보고서 사본이 화면 왼쪽에 떠 있었다. 최명식이 그 옆에 서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길드원한테 다시 확인했는데 시험성적서가 두 개래요. 같은 부품인데 발행일이 다른 게 돌고 있다고.”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발행일 차이는.”
“그걸 정확히는 몰라요. 근데 자기네 검수팀에서 작년에 본 거랑 올해 구매처에서 넘어온 게 날짜가 다르대요.”
신우진이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신호음이 두 번 가고 이지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지원입니다.”
“신우진입니다. 시험성적서 관련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최명식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목소리가 빨라졌다.
“저, 최명식인데요. 길드원 하나가 대한정밀 검수팀인데, B4 계열 부품 시험성적서가 두 가지 버전으로 돈다는 소문을 들었대요. 발행일이 서로 다르다고.”
이지원의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
“두 가지 버전이라면 발행일만 다른 겁니까, 아니면 시험 수치도 다른 겁니까.”
최명식이 잠시 입을 열었다 닫았다. 신우진이 대신 말했다.
“그건 확인 안 됐습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수치가 다르면 위변조의 직접 증거가 됩니다. 발행일만 다르면 재발행 절차 위반 쪽으로 접근해야 하고요.”
신우진이 노트북 화면을 끌어올렸다. 박중호 보고서의 부품 로트번호 표가 펼쳐졌다.
“지금 확보된 교정 소급 이력과 교차 대조하겠습니다. 시험성적서 하단에 주석 번호가 있을 겁니다.”
이지원이 말을 이었다.
“주석 번호는 발행 기관의 내부 관리 번호예요. 재발행될 때마다 바뀝니다. 그 번호가 같으면 같은 문서의 사본, 다르면 별도 발행된 문서라는 뜻이죠.”
“그 번호를 추적하면 발행일 불일치의 성격이 나오는 거네요.”
“정확합니다. 그리고 정보공개청구를 넣어야 합니다. 대한정밀에 성적서 재발급과 관련된 모든 이력을 공식 요청하는 겁니다.”
최명식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근데 그걸 납품사가 순순히 내놓을까요.”
이지원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거부하면 그것 자체가 감사원 제출용 증거가 됩니다. 법적 의무가 있는 정보를 감춘다는 기록이 남으니까요.”
신우진이 유성 매직을 꺼내 책상 위 메모지에 적었다. 주석 번호. 재발행 이력. 정보공개청구.
“그럼 지금부터 할 일은 두 갭니다. 첫째, 길드원에게 주석 번호가 두 버전에서 같은지 확인. 둘째, 대한정밀 대상 정보공개청구서 작성.”
이지원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청구서 초안이 나오면 감사실 접수 채널로 올려주십시오. 제가 공식 접수 번호를 발급받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신우진이 컴퓨터로 정보공개청구 양식을 열었다. 최명식이 옆에서 휴대폰을 들고 길드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석 번호 물어봤어요. 답 오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신우진이 양식의 첫 칸을 채웠다. 청구인. 신우진, 최명식. 소속. 철도공사 검수팀.
오전 10시 05분이 지나고 있었다.
제목을 입력했다. '대영정밀 대상 시험성적서 전체 재발급 이력 및 원본 대조 요청'.
청구 항목에 세 줄을 적었다. 2018년부터 현재까지 B4 계열 제동장치 부품 전 품목 시험성적서 발행 이력. 발행일 및 주석 번호가 다른 동일 부품 시험성적서 존재 여부. 시험성적서 재발행 시 사유 및 승인 내역.
최명식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답 왔어요. 주석 번호 달랐대요. 작년에 받은 건 KTR-2022-8476이었고 올해 구매처에서 온 건 KTR-2023-9102래요.”
신우진이 손을 멈췄다.
“다르군요. 재발행된 겁니다.”
“근데 더 있어요. 작년 서류에는 인장 강도 1.8뉴턴이었다는데 올해 건은 2.8로 올라갔대요.”
신우진이 메모지의 숫자를 바라봤다. 1.8뉴턴. 표준 허용오차를 한참 벗어난 수치였다. 표준 규격은 ±0.3뉴턴. 그걸 2.8로 올려서 재발행했다는 건 위변조로밖에 설명이 안 됐다.
“시험성적서 자체를 다시 쓴 겁니다. 불합격 부품을 합격으로 만드는 데 20일이 걸렸고.”
이지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을 켰다.
“추가 확인됐습니다. 주석 번호가 다릅니다. 시험 수치도 다릅니다. 1.8에서 2.8로 변경됐습니다. 20년 전과 9년 전에 확인된 패턴과 동일합니다.”
이지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20일 패턴. 아버지 보고서에도, 박중호 보고서에도, 지금도 똑같군요.”
“정보공개청구서 작성 중입니다. 제목은 대영정밀 대상 시험성적서 재발급 이력 및 원본 대조 요청입니다.”
“감사실 공식 채널로 접수하겠습니다. 팩스 번호는 이전에 보내드린 그대로입니다.”
신우진이 청구서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찍고 서명했다. 최명식이 받아서 이어서 서명했다. 신우진이 문서를 팩스기에 올렸다. 번호를 누르자 기계가 문서를 빨아들였다.
송신 완료. 시계가 오전 10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10시 42분.
철도공사 본사 감사실 복도 끝 창가. 이지원이 내부 메신저의 긴급 공지 창을 닫고 신우진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 한 번에 연결됐다.
“신우진입니다.”
“윤태호가 오늘 오후 2시에 긴급 기술 협의회를 소집했습니다. 명목은 B4 계열 부품 사양 변경 검토입니다.”
잠시 침묵. 신우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사양 변경이면 시험성적서 기준 자체를 바꾸겠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성적서가 어떻게 다시 발행되었는지 추적하기 전에 문서의 기준점을 옮기려는 거예요. 협의회에서 사양이 변경되면 기존 성적서의 불일치를 주장할 근거가 흔들립니다.”
이지원의 손가락이 창틀을 짚었다.
“감사실장에게 곧바로 보고하겠습니다. 이 협의회가 현재 진행 중인 감사에 대한 절차적 방해임을 공식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신우진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청구서는 방금 접수했습니다. 답변이 오기 전에 저쪽이 기준을 바꾸면 답변 내용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이의 제기하겠습니다. 기술 협의회 안건에서 B4 계열 부품을 제외하거나, 감사 종료 시까지 사양 변경 논의를 보류하도록.”
통화가 끊겼다.
차량기지 정비고 임시 사무실. 신우진이 팩스기에서 출력된 청구서 사본을 손에 쥐었다. 종이에서 아직 기계 열이 남아 있었다. 왼쪽이 약간 휘어져 있었다.
최명식이 물었다.
“어떡하실 거예요.”
신우진이 사본을 접어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정보공개청구 답변 시한은 법적으로 10일입니다. 그 안에 기술 협의회를 무력화해야 합니다.”
노트북 화면에는 여전히 박중호 보고서의 로트번호 표가 떠 있었다. DH-09-2A-773. DH-18-2A-1421.
신우진이 마우스를 잡았다. 20년 전, 9년 전, 현재까지 이어지는 시험성적서 위변조의 시간표가 한 줄로 그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