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58화
노조 사무실 문서 보관 창고. 형광등이 깜빡였다. 길게 늘어진 전선 끝에서 플리커 현상이 반복될 때마다 선반 그림자가 벽면에서 일렁였다.
한기가 바닥 타일을 타고 발목까지 스며들었다. 습기와 먼지가 오래도록 눌어붙은 공기. 빛이 돌아올 때마다 창고 안쪽으로 쌓여 있는 골판지 상자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한경숙이 철제 선반 앞에 섰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쇠와 종이가 함께 삭아가는 냄새였다.
그녀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밀려든 낡은 공기가 낯설지 않았다. 십 년 넘게 드나든 창고였다.
선반 세 번째 칸. ‘2023년 4월~6월’이라고 적힌 골판지 상자였다. 매직 글씨는 조금 번져 있었고, 상자 모서리는 습기에 불어 있었다.
뚜껑을 열었다.
서류 봉투들이 연도별로 묶여 있었다. 고무줄이 삭아서 표면에 들러붙은 봉투도 있었고,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것도 있었다. 한경숙의 손가락이 봉투 가장자리를 하나씩 짚었다.
손끝에 걸리는 종이의 촉감이 제각각이었다. 매끄러운 크라프트지, 약간 까슬한 재생용지. 네 번째 봉투에서 손이 멈췄다.
봉투 겉면. ‘내부고발-부품 시험성적서 조작’이라고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글씨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 획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했다. 접수 날짜 도장. 작년 4월 7일.
붉은 인주가 조금 번져 있었다. 한경숙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이 봉투를 마지막으로 만진 게 1년 전이었다.
그때는 증거 불충분으로 보류 처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서류를 반환하지 않고 이렇게 남겨둔 건 자신의 판단이었다. 혹시 모른다는 직감. 그 직감이 마침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한경숙이 봉투를 꺼냈다. 무게가 있었다. 종이 몇 장과 작은 기억장치 하나가 주는 무게라기엔 묵직했다.
봉투를 열자 A4 출력물 세 장과 USB 메모리 하나가 나왔다. USB 표면에 하얀 스티커. ‘BJ-09-03’이라고 적혀 있었다.
스티커 귀퉁이가 살짝 들떠 있었지만, 잉크는 선명했다. 한경숙은 USB를 손바닥 위에 올려 잠시 바라보았다. 작은 플라스틱 조각 안에 증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늘 이상하게 느껴졌다.
출력물 첫 장을 펼쳤다.
시험성적서 관리 번호 여섯 개가 수기로 기재되어 있었다. KOSHA-2020-0781, KOSHA-2021-0133, KOSHA-2022-0047을 포함한 목록이었다. 숫자와 하이픈의 배열이 정확했다.
각 번호 옆에 ‘인장 강도 허용오차 초과 의심’이라는 메모가 빨간 펜으로 적혀 있었다. 펜 자국이 필압에 따라 굵기가 달라졌다. ‘의심’이라는 단어에 특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경숙은 그 빨간 글씨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보았다. 1년 전 처음 이 서류를 검토할 때와 똑같은 문장.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박중호의 보고서가 나타난 지금, 이 익명의 메모는 더 이상 막연한 '의심'이 아니었다.
“그대로 있네.”
목소리는 낮았지만 창고 안에서 작게 울렸다. 한경숙이 봉투를 접어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두툼한 방탄 조끼 안쪽으로 종이가 접히는 감촉이 느껴졌다.
USB를 바지 주머니에 따로 넣었다. 플라스틱 모서리가 허벅지에 닿았다. 선반 상자를 닫았다.
골판지가 마찰음을 냈다. 자물쇠를 채웠다.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 화면이 형광등 아래서 차갑게 빛났다. 신우진의 번호를 눌렀다.
이름을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통화 연결음이 한 번 가기 전에 수화기 너머로 숨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한경숙이야. 작년 제보 원본 찾았어. 지금 그쪽으로 간다.”
통화가 끊겼다. 신우진은 대답 대신 짧게 숨을 내쉬는 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한경숙이 창고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창고보다 더 추웠다. 발걸음이 빨랐다. 운동화 바닥이 리놀륨 바닥을 밟을 때마다 가벼운 마찰음이 났다.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차량기지 정비고 사무실. 오후 3시 30분.
석양이 창문을 통해 길게 늘어져 들어왔다. 정비고 특유의 기계유 냄새가 환풍기를 타고 희미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신우진이 책상 위에 박중호의 보고서 사본을 펼쳐놓고 있었다.
로트번호 교차표 옆에 말이다. A4 용지들이 책상 절반을 덮고 있었다. 최명식이 구석에서 노트북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안경에 스프레드시트의 푸른 빛이 반사되어 일렁였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문이 열렸다. 경첩 소리가 삐걱였다. 한경숙이 들어왔다.
바깥 공기가 그녀의 옷자락을 따라 사무실 안으로 밀려들었다.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종이가 나무 책상 표면에 닿으며 가볍게 미끄러졌다.
“여기. 작년 4월 7일 접수된 익명 제보야.”
신우진이 봉투를 열었다. 종이를 찢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접착 부분을 떼어냈다. 출력물 세 장을 차례로 펼쳤다.
손끝이 용지 모서리를 한 장 한 장 짚으며 책상 위에 가지런히 배열했다. USB를 옆에 놓았다. 검은 플라스틱이 형광등 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시선이 관리 번호 목록에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번호와 날짜, 메모를 훑는 동안 입술이 살짝 긴장했다.
“이 번호들.”
“제보자가 직접 적어온 거야. 당시에는 증거가 부족해서 보류했어.”
이지원이 일어나 신우진 옆으로 왔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짧은 마찰음을 냈다. 그녀의 스커트 자락이 책상 모서리에 살짝 스쳤다.
“제보자는 누구입니까.”
한경숙이 고개를 저었다. 목 근육이 잠시 긴장했다.
“익명이었어. 그런데 관리 번호 체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어. 일련번호 규칙, 제조사 코드, 금형라인 표기 방식까지.”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왼쪽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외부인이 알 수 없는 정보입니다.”
“맞아. 납품사 내부 직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어. 특히 품질관리팀이나 검수팀 쪽.”
이지원이 출력물을 집었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이 번호 하나하나를 짚었다. 손톱이 종이 위를 타고 내려가며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었다.
“이 여섯 건 모두 동일 제조사 코드인가요.”
신우진이 박중호 보고서의 로트번호 표를 가리켰다. 왼손 검지 손가락이 표의 열과 행을 교차하며 짚었다.
“대조해봅시다.”
오후 4시.
책상 위에 출력물 세 장과 보고서 사본이 나란히 놓였다. 신우진이 로트번호 교차표를 가운데 두었다. 세 문서가 마치 삼각형을 이루듯 배치되었다.
왼손 집게손가락의 흉터가 형광등 아래에서 반사됐다. 오래된 흉터였다. 피부가 당겨져 윤기가 흘렀다. 누구도 그 흉터의 유래를 묻지 않았지만, 이지원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첫 번째 번호. KOSHA-2020-0781.”
이지원이 박중호 보고서의 해당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인덱스 손가락이 로트번호 목록을 따라 내려갔다.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이 빼곡히 인쇄된 리스트 위에서 그녀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DH-20-2A-0781. 있습니다. 제조사 코드 DH 동일. 금형라인 2A 동일.”
신우진이 교차표에 체크 표시를 했다. 볼펜 끝이 종이에 닿으며 작은 점이 찍히고, 이내 V자 모양으로 길어졌다. 검은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는 손끝이 정교했다.
“두 번째. KOSHA-2021-0133.”
“DH-21-2A-0133. 일치합니다.”
이지원의 목소리에 약간의 긴장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세 번째. KOSHA-2022-0047.”
이지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손톱이 숫자 ‘0047’ 바로 아래를 짚은 상태로 멈춰 있었다.
“DH-22-2A-0047. 제조사 코드, 금형라인, 주조 일자까지 모두 일치합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최명식이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도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한경숙이 팔짱을 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조끼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세 건. 확실하네.”
신우진이 USB를 집었다. 두 손가락으로 작은 기억장치를 집어 올리는 동작이 유난히 신중해 보였다. 창문 밖에서 기관차가 서행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디지털 파일도 확인해야 합니다.”
이지원이 보안 노트북을 열었다. 운영체제가 부팅되는 동안 화면이 어둡게 깜빡였다. USB를 꽂았다.
포트에 삽입되는 순간 플라스틱이 마찰하는 가벼운 저항감이 느껴졌다. 파일 탐색기가 열렸다. 폴더 아이콘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시험성적서비교2023.xlsx’ 파일이 보였다. 아이콘은 평범한 엑셀 문서였다.
클릭.
마우스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딸깍 울렸다. 엑셀 시트가 열렸다. 셀의 격자무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A열에 관리 번호. B열에 측정값. C열에 허용오차 초과 여부.
세 줄이 빨간색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KOSHA-2020-0781, KOSHA-2021-0133, KOSHA-2022-0047. 셀 서식이 숫자를 붉게 물들인 채로 깜빡이고 있었다.
“출력물과 내용이 동일합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신우진이 화면을 확인했다. 눈동자가 스크롤바를 따라 아래로 이동했다. 잠시 침묵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최명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책상 위로 겹쳐졌다.
“이제 이 제보는 단순 의혹이 아닙니다.”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주십시오.”
“박중호의 9년 전 보고서와 동일한 부품 계통의 문제가 작년까지 지속되었다는 걸 증명합니다. 독립된 제보자가 별도로 같은 지적을 한 겁니다.”
신우진의 말은 천천히, 또렷하게 이어졌다. 각 음절이 사무실의 정적을 헤집고 나아갔다. 최명식이 책상 모서리에 손을 짚었다. 그의 손바닥이 나무 표면에 땀자국을 남겼다.
한경숙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엄지손가락이 액정 가장자리를 따라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증거 능력이 있어?”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이 천천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같은 제조사, 같은 금형라인, 같은 주조 일자. 3건의 일치는 우연이 아닙니다. ‘반복적 위반’을 입증할 수 있는 독립적 증거입니다.”
오후 5시.
해가 기울어 사무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낮아졌다. 책상 위로 먼지가 춤추듯 떠다녔다. 이지원이 감사원 제출용 증거 목록 파일을 열었다.
노트북 화면에 항목들이 리스트로 정렬되어 있었다. 폴더 아이콘이 계층 구조로 펼쳐져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키캡이 연속적으로 눌리며 경쾌한 타자음을 냈다.
‘한경숙 제공 익명 제보 원본(출력물·USB) 및 박중호 9년 전 보고서와의 교차 대조표’
탭 키. 엔터.
화면에 새로운 행이 추가되며 커서가 깜빡였다. 이지원은 타이핑한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오탈자가 없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등재 완료했습니다.”
한경숙이 책상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조끼가 살짝 움직이며 바스락거렸다.
“조건이 있어.”
이지원이 시선을 올렸다. 모니터 위쪽으로 한경숙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이 그녀의 반대편에서 빛나고 있어 얼굴의 절반이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제보자의 신원은 보호해야 합니다. USB와 출력물을 증거로 제출해도, 제보자가 누군지는 밝히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고 싶습니다.”
한경숙의 목소리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이지원이 잠시 생각했다. 눈을 아래로 깔고 2초 정도 침묵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드렸다. 딱, 딱, 딱. 세 번.
“감사원 제출 증거 목록에는 제보자를 특정할 정보를 기재하지 않겠습니다. ‘노동조합 보관 익명 제보’로 표기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한경숙이 USB를 이지원 쪽으로 밀었다. 플라스틱이 책상을 미끄러지며 작고 단단한 소리를 냈다.
신우진이 출력물 사본을 파일에 끼워 책상 위에 정리했다. 박중호 보고서와 교차표를 같은 파일에 함께 넣었다. 페이지를 정렬하고, 클립으로 고정했다. 그의 손이 능숙하게 움직였다.
“증거 체계가 완성됐습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덮었다. 화면이 꺼지며 액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손바닥이 덮개 위에 잠시 머물렀다.
“이제 감사원에 ‘반복적 위반’을 입증할 수 있는 독립적인 제2의 증거가 생겼습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박중호의 번호를 찾았다. 주소록을 스크롤하는 엄지손가락이 화면을 빠르게 훑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신우진은 창가 쪽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박중호 대리님.”
수화기 너머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배경에는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특유의 저음역 소음이 깔려 있었다.
“왜.”
“내일 아침, 금고에 보관된 보고서 원본을 감사원 제출용으로 공식 인출하겠습니다.”
잠시 침묵. 박중호의 숨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깊은 호흡. 이어서 누군가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는 듯한 작은 소리.
“알았다. 아침 일곱 시. 내가 금고 열어놓겠다.”
전화가 끊겼다. 단말기에서 통화 종료음을 알리는 짧은 신호음이 울렸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액정이 책상에 닿으며 작게 진동했다. 책상 위에는 교차 대조표와 제보 원본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지원이 증거 목록을 클립으로 고정했다. 금속 클립이 종이를 물며 찰칵 소리를 냈다.
한경숙이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기 직전, 그녀는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그림자가 복도 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안주머니 속 봉투의 모서리가 조끼를 살짝 밀어 올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나도 같이 가겠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