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59화
오전 6시 55분. 차량기지 정비고 사무실.
신우진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는 전날 정리한 교차 대조표와 익명 제보 출력물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지원의 노트북은 덮여 있었고, 충전 케이블만 콘센트에 꽂혀 있었다.
사물함에서 작업복을 꺼내 걸쳤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 유성 매직을 꽂았다.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짧은 사선을 그었다. 확인해야 할 목록을 세는 버릇이었다.
철제 사물함 문을 닫았다. 금속이 부딪히는 짧은 소리가 났다.
복도로 나섰다. 정비고 쪽에서 공기압 공구 돌아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평소보다 인원이 적었다. 야간 근무조가 이미 철수한 시간이었다.
박중호는 이미 정비고 입구에 서 있었다. 형광 안전조끼를 입고, 오른손에는 금고 열쇠 뭉치를 쥐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열쇠를 하나씩 넘기며 신우진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늦었네.”
신우진이 손목시계를 봤다. 6시 58분.
“2분 남았습니다.”
“금고는 이미 점검했다. 아무도 안 건드렸다.”
박중호가 몸을 돌려 걸었다. 신우진이 그의 오른쪽 뒤에서 따라붙었다. 두 사람의 안전화가 콘크리트 바닥을 밟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를 냈다.
금고는 정비고 서쪽 벽면, 공구 보관함 뒤에 있었다. 군용 컨테이너를 개조한 이중 철제 구조물. 외부는 함석판, 내부는 5밀리미터 강판. 다이얼식 자물쇠가 두 개 달려 있었다.
박중호가 허리를 굽혀 첫 번째 다이얼을 돌렸다.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 금속 마찰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다이얼도 같은 방식으로 풀었다.
“열어라.”
신우진이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철제 손잡이가 손바닥에 눌렸다. 힘을 주어 당기자 경첩이 마찰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내부는 의외로 단순했다. 선반 세 개, 서류철 아홉 권, 플라스틱 부품 상자 두 개. 맨 아래 선반에 갈색 봉투 하나가 단독으로 꽂혀 있었다. A4 크기, 두께는 약 2센티미터.
박중호가 봉투를 꺼냈다.
“이거다.”
봉투 겉면에 청색 볼펜으로 적힌 글씨가 번져 있었다. ‘2009.03.14. 부품검수 보고서 — B4 계열 제동밸브 패킹. 결함 확인. 결재 보류.’
신우진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손에 익숙한 무게였다. 개봉하지 않은 상태로 표면을 만져보았다. 봉투 안에서 서류가 밀리는 촉감이 전해졌다.
“열어볼 겁니까.”
“여기서는 아니다. 감사실로 가져가라.”
박중호가 금고 문을 닫았다. 다이얼을 원래 위치로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9년 동안 이거 하나 때문에 금고 위치를 세 번 옮겼다.”
“알고 있습니다.”
“감사실에서 원본 필요하면 내가 직접 출두한다. 증언도 하겠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를 가슴에 안은 채 몸을 돌렸다.
“7시 20분까지 감사실에 전달하겠습니다.”
오전 7시 18분. 본사 감사실.
이지원이 책상 위에 서류철을 펼쳐놓고 있었다. 왼쪽에는 전날 정리한 증거 목록. 오른쪽에는 한경숙의 USB와 출력물 사본. 모니터 화면에는 감사원 특별감사 청구 절차 체크리스트가 띄워져 있었다.
신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갈색 봉투를 이지원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박중호 보고서 원본입니다.”
이지원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겉면의 글씨를 확인한 뒤, 개봉용 칼로 봉합선을 정확히 잘랐다. 손동작이 빨랐다. 봉투 안에서 서류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장은 표지였다. ‘부품검수 특별 보고서 — 문서번호 QC-2009-0031’. 그 아래로 박중호의 수기 서명이 있었다.
두 번째 장부터 부품 사진이 컬러 프린트되어 있었다. 네 장. 제동 패드 마찰재의 확대 촬영본이었다.
“사진이 선명합니다.”
이지원이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 세 번째 사진에서 손이 멈췄다.
“이 부분.”
그녀의 손가락이 사진 하단을 가리켰다. 부품 표면에 찍힌 로트번호 각인. ‘DH-09-2A-773’. 전날 한경숙의 제보 출력물에 기재된 관리번호와 글자 하나까지 동일했다.
신우진이 익명 제보 출력물을 집어 들었다.
“제보 쪽은 KOSHA-2020-0781입니다.”
“연도만 다릅니다.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 20년 전 아버지 보고서도 DH-98-2A-521이었습니다.”
이지원이 증거 목록을 집어 들었다. 네 번째 항목 아래에 볼펜으로 한 줄을 추가했다.
‘항목 4-3: DH-2A 라인 동일성 확인 — 20년 전(1998), 9년 전(2009), 현재(2023) 동일 제조사·금형라인·주조 공정.’
그녀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플라스틱이 책상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반복적 위반 요건 충족입니다. 3중 교차 확인 완료.”
신우진이 봉투 안에 남은 서류를 꺼냈다. 마지막 장은 박중호의 수기 메모였다. ‘본 보고서는 구매처의 반려로 정식 결재되지 않았음. 2009년 3월 14일부로 금고 보관 결정.’
“원본 사본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감사원 제출용으로 3부.”
신우진이 복사기 쪽으로 걸어갔다. 기계가 예열되는 소리가 사무실에 퍼졌다.
오전 10시 30분. 감사실 사무실.
이지원이 증거 목록 최종본을 클립으로 고정하고 있을 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벨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외부 회선 표시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발신 번호는 국회의원실 대표 번호였다.
이지원이 수화기를 들었다.
“감사실입니다.”
“국회의원 조영우 의원실입니다. 비서관입니다.”
상대는 30대 중반쯤으로 들리는 남자 목소리. 차분했지만 끝에 미세한 긴장이 묻어 있었다.
“내일 오후 예산안 심의 협조 차 감사실의 현재 진행 상황을 여쭙고자 합니다. 특히 부품 납품 관련 감사 건에 대해 간단한 질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 질의 내용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
“예산 집행의 효율성 측면에서, 특정 납품사에 대한 감사가 장기화될 경우 예산 심의 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지원의 왼손이 책상 위 증거 목록 가장자리에 닿았다. 손가락이 종이 모서리를 살짝 눌렀다.
“예산 심의 일정과 특정 감사 건을 연결하시는 겁니까.”
“연결이 아니라, 협조를 구하는 자리입니다. 오후 2시까지 관련 자료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실장님께 보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충전 크래들에 안착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이지원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상 서랍에서 감사일지 양식을 꺼냈다.
‘10:30 — 국회의원실 비서관 전화. 예산안 심의 협조 명목으로 현행 부품 감사 건에 대한 사전 질의 예고. 특정 납품사 감사 장기화 시 예산 심의 영향 언급.’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몇 초간 이어졌다.
오전 10시 33분. 감사실장실.
이지원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손에는 감사일지와 증거 목록이 들려 있었다. 감사실장은 책상 앞에서 주간 보고서를 검토 중이었다. 안경 너머로 이지원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방금 국회의원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지원이 감사일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예산안 심의 협조를 명목으로, 현행 부품 납품 감사에 대한 사전 질의를 예고했습니다. 감사 장기화 시 예산 심의 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감사실장이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손수건으로 렌즈를 닦으며 이지원의 얼굴을 응시했다.
“특정 납품사 거론했나.”
“직접 거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감사는 한 건뿐입니다.”
“그렇군.”
감사실장이 감사일지를 집어 들었다. 세 줄짜리 기록을 두 번 읽었다. 안경을 다시 쓰고, 책상 위 결재 도장을 꺼냈다.
“공식 감사일지에 등재하십시오. 이어서 본부장 보고용 메모도 작성하십시오. 제목은 ‘감사 외압 시도에 대한 정식 기록 요청’으로 하십시오.”
“이미 기재했습니다.”
이지원이 감사일지를 넘겼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 메모 초안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감사실장이 읽어 내려갔다.
‘1. 국회의원실 비서관, 예산 심의와 특정 감사를 연계 발언. 2.
이는 사실상의 감사 방해 시도로 판단됨. 3. 본부장 보고 및 감사원 특별감사 청구 시 외압 사례로 공식 첨부할 것을 건의함.’
감사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번호 부여하겠습니다. AUDIT-2024-0103.”
이지원이 메모를 받아 들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증거 목록 파일에 끼웠다.
“감사원 직접 제소 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예정 시기는.”
“내일 오전 접수를 목표로 합니다.”
감사실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본사 정문이 내려다보였다. 오전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하며 책상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윤태호 쪽에서 추가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이 외압이 실패하면 다음 수가 나올 겁니다.”
“예상하고 있습니다.”
오전 11시. 윤태호의 사무실.
윤태호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오른손 약지의 금색 인장 반지가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반사했다.
“국회의원실 전화는 이미 갔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구매처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약간 긴장된 톤이었다.
“감사실 반응은 어땠습니까.”
“형식적인 답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직후에 감사실장실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감사일지에 기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윤태호의 왼손이 책상 위 문서를 한 장 넘겼다. 대한정밀에서 보내온 시험성적서 폐기 예정 목록이었다.
“예산 연계 카드가 안 통할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럼 다음은.”
“문서 정리 일정을 앞당깁니다.”
윤태호가 목록의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폐기 예정: 금주 금요일 오후 5시.’
“오늘 중으로 폐기 결재를 상신하십시오. 물리적 폐기는 내일 오전 중에 완료하도록.”
“하지만 결재 라인에 감사실이—”
“감사실은 아직 폐기 이관 신청의 결재권자가 아닙니다. 결재권자는 구매처장입니다.”
잠시 침묵. 구매처 과장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상신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윤태호가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대한정밀 쪽에도 연락하십시오. 시험성적서 원본과 교정 일지. 오늘 밤 중으로 물리적 파쇄 완료하라고 전달하십시오.”
“문서보존 규정에 위반될—”
“이미 폐기 이관 신청이 접수된 건입니다. 규정 위반 아닙니다. 시기를 앞당기는 것뿐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윤태호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왼쪽 턱선의 얕은 칼자국 흉터가 형광등 아래서 선명하게 보였다.
서른 초쯤 그대로 서 있다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서랍에서 다른 휴대폰을 꺼냈다. 선불폰이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단축번호를 눌렀다.
“대한정밀입니다.”
“문서보관실 금고. 오늘밤 정리하십시오. 대상은 시험성적서 제1철부터 제3철까지입니다.”
“알겠습니다.”
통화가 14초 만에 종료되었다. 윤태호가 선불폰의 전원을 끄고 배터리를 분리했다.
오전 11시 30분. 감사실 사무실.
이지원이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감사원 특별감사 청구서 양식이 워드프로세서에 띄워져 있었다. 첫 줄 제목란에 타이핑이 들어갔다.
「특별감사 청구서 — 철도공사 부품 납품 관련 반복적 위반 및 은폐 행위」
두 번째 줄. ‘청구 근거’.
‘1. 1998년 4월 15일: 이철호 검수원의 제동밸브 B4 계열 시험성적서 조작 보고. 구매처 과장 배상호가 전면 반려 및 보고자 좌천 조치.
2. 2009년 3월 14일: 박중호 검수원의 동일 부품 계열 결함 보고. 구매처 반려로 결재되지 않고 금고 보관.
3. 2023년 11월: 무정차 통과 사고. 조사 과정에서 위 1, 2항과 동일한 제조사·금형라인·변조 패턴 확인.’
이지원이 손가락을 키보드에서 떼었다. 화면을 다시 읽었다.
“신우진 씨.”
신우진이 복사기 앞에서 몸을 돌렸다. 손에는 박중호 보고서 원본 사본이 들려 있었다.
“여기 세 번째 항목에, 사고 조사 과정이 아니라 ‘익명 제보’를 추가하겠습니다.”
“한경숙 씨의 제보 말입니까.”
“아닙니다. 앞선 사건에서 확인한 차민수의 제보. 대한정밀 직원의 검수용/납품용 시험성적서 이중 발행 소문이죠. 소문이 아니라, 정보공개청구로 확인한 사실로 기재합니다.”
신우진이 책상으로 걸어왔다. 손에 든 사본을 이지원의 오른쪽에 정리하며 말했다.
“소문을 증거로 쓸 수 없습니다.”
“정보공개청구 답변서가 오늘 오후 도착 예정입니다. 주석 번호 불일치와 시험 수치 차이가 공식 확인되면 소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이지원이 키보드를 다시 두드렸다. 화면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4. 2023년 4월 7일: 익명 제보자가 제출한 3건의 시험성적서와 박중호 보고서 로트번호 교차 대조. 동일 제조사·금형라인 확인.’
그녀가 타이핑을 멈추고 프린터 버튼을 눌렀다. 레이저 프린터가 가열되는 소리가 사무실에 퍼졌다.
“초안 완성입니다. 내일 오전 감사원에 직접 접수하겠습니다.”
신우진이 사본 3부를 책상 위에 나란히 정리했다. 각 사본의 첫 페이지에 클립을 물렸다.
“원본은 제가 차량기지 금고에 재보관하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접수 후에는 원본도 감사원에 제출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신우진이 작업복 상의를 입었다. 왼쪽 주머니에 유성 매직을 다시 꽂았다. 봉투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지원이 프린터에서 나온 청구서 초안을 집어 들었다. 아직 따뜻한 종이에서 토너 냄새가 올라왔다.
오후 1시 45분. 차량기지 정비고.
신우진이 정비고 입구에 섰다. 오전과 달리 인기척이 없었다. 점심시간, 작업자들이 모두 식당으로 이동한 시간이었다.
박중호가 금고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손은 금고 문 손잡이에, 왼손은 다이얼에 얹은 채 굳어 있었다.
신우진이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박중호가 대답 대신 왼손을 다이얼에서 뗐다. 손가락으로 다이얼 주변의 함석판을 가리켰다.
“이거 봐라.”
신우진이 허리를 굽혔다. 함석판 표면. 다이얼 바로 아래 부분에 미세한 긁힘이 있었다.
폭 2밀리미터, 길이 15밀리미터 남짓. 금속이 날카로운 물체에 눌린 흔적이었다. 긁힌 방향은 다이얼 중심을 향해 있었다.
“아침에는 없었던 겁니까.”
“없었다. 내가 아침 6시 40분에 열었을 때는 이런 거 없었다.”
박중호가 금고 문을 열었다. 내부는 그대로였다. 서류철 아홉 권, 플라스틱 부품 상자 두 개. 그러나 맨 아래 선반의 먼지가 한쪽으로 쓸려 있었다. 갈색 봉투가 놓여 있던 자리의 먼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신우진이 먼지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봉투를 꺼내려고 한 겁니까.”
“아니다. 봉투가 거기 있는지 확인하려고 한 거다.”
박중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누군가 이 금고를 열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