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61화

최명식의 모니터에는 길드 채팅창이 떠 있었다. 레이드가 끝나고 멤버들이 흩어지던 참이었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팝탭을 따며 의자에 앉았다.

채팅창에 차민수의 닉네임이 떠올랐다.

[아이언부품] 아까 저녁에 갑자기 불려갔었음

[아이언부품] 사장님이 오늘 밤 안으로 시험성적서 파일 전부 정리하래

최명식의 손이 멈췄다. 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거품이 손등에 흘렀지만 닦지 않았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식이] 무슨 파일?

[아이언부품] 시험성적서

[아이언부품]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 교정 일지랑 협의록도 같이

[아이언부품] 파일 서버에 있던 거 전부 USB로 옮기고 원본은 파쇄기로

최명식이 뒷목을 만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한 번 더 물었다.

[식이] 그게 오늘 밤 꼭 끝나야 하는 거야?

[아이언부품] 사장님이 새벽에 한 번 더 확인 온댔음

[아이언부품] 왜 철도공사 쪽에서 뭐 있었냐?

[식이] 아니 그냥 궁금해서

최명식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모니터 불빛이 얼굴에 푸르게 반사됐다. 캔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 맥주가 미지근했다.

채팅창을 닫고 게임을 종료했다. 헤드셋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렸다. 휴대폰을 집어 들고 수화기 너머 신우진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가기 전에 받았다.

신우진은 거실 탁자 위에 서류 가방을 열어둔 채 보고서 원본과 교차표 사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최명식이 떴다.

“주임님.”

최명식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방금 차민수한테 연락 왔는데. 대한정밀 사장이 오늘 밤 시험성적서 전부 파쇄하라고 지시했답니다.”

신우진이 서류 가방 뚜껑을 덮지도 않은 채 일어섰다.

“언제.”

“아까 저녁에요. 교정 일지랑 협의록도 같이. 새벽에 사장이 직접 확인 온대요.”

“윤태호다.”

“예. 제 생각에도 그래요. 주임님.”

최명식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오늘 오전에 윤태호가 폐기 일정 앞당겼다는 얘기 있지 않았습니까. 그게 이거 같아요. 납품사에 직접 지시 내린 거.”

“차민수한테 파일 원본 위치는.”

“파일 서버에 있다고 했어요. 원본 파쇄 전에 USB로 백업 뜬대요.”

신우진이 오른손 검지로 탁자 위를 짚었다. 서류 가방 안 보고서 원본 봉투 위에 손가락이 닿았다. 흉터가 있는 왼손 집게손가락이 봉투 모서리를 스쳤다.

“주임님, 이거 내일 오전까지 기다리면 늦어요. 오늘 밤 안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신우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안다.”

서류 가방 뚜껑을 닫았다. 잠금 장치를 돌렸다.

“최명식, 차민수랑 연락 유지해. 파쇄 진행되면 바로 알려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명식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아졌다.

“이거 확실히 잡아야 합니다. 놓치면 안 돼요.”

“내가 연락한다. 끊어.”

통화를 종료하고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밤 10시 36분이었다.

이지원의 자택 거실 탁자에는 내일 제출할 특별감사 청구서 최종본과 증거 목록이 펼쳐져 있었다. 프린터기 옆에는 출력된 증거 색인표가 쌓여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신우진이었다. 이 시간에 연락은 처음이었다.

“이지원입니다.”

“윤태호가 납품사에 시험성적서 파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지원이 펜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곧추세웠다.

“출처는.”

“최명식의 길드원. 대한정밀 직원입니다. 오늘 저녁 사장 지시로 파일 서버 전체를 USB로 백업 후 원본 파쇄. 교정 일지, 협의록 포함.”

“시간은.”

“오늘 밤. 새벽에 재확인.”

이지원의 시선이 탁자 위 감사원 제출 예정 서류로 옮겨갔다. 왼손이 청구서 표지를 짚었다.

“내일 오전 9시면 늦습니다. 파쇄된 다음 날 접수해 봐야 증거 능력이 떨어집니다.”

“접수 시점을 앞당겨야 합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열었다. 감사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감사원은 24시간 온라인 접수 시스템이 있습니다. 특별감사 청구는 전자문서로도 접수 가능하고, 접수 시점은 서버 기록으로 확정됩니다.”

“실물은.”

“실물은 내일 오전에 별도 제출해도 접수 시점은 온라인 접수 시각으로 소급됩니다. 시행규칙 제14조 3항입니다.”

거실 탁자에서 서류 가방을 신우진이 들어 올렸다.

“지금 올립니까.”

이지원이 마우스를 클릭하며 화면을 훑었다.

“청구서 최종본은 준비됐습니다. 증거 목록과 색인표도 출력 완료. USB 파일 구성도 끝났어요. 지금 즉시 온라인 접수 가능합니다.”

“진행하십시오.”

이지원이 감사원 전자접수 시스템에 로그인했다. 화면에 청구서 제목이 떠올랐다. ‘철도공사 부품 납품 관련 반복적 위반 및 은폐 행위’.

“접수 번호는 AUDIT-2024-0102입니다. 관련 증거 일체를 전자문서로 첨부합니다.”

키보드 소리가 이어졌다. 교차표 PDF, 9년 전 보고서 사본, 필름 스캔 이미지, 강도영 자필 유출 목록, 20년 전 반려 의견서 사본, 익명 제보 출력물 스캔본이 차례대로 업로드됐다.

“첨부 완료.”

신우진이 서류 가방 손잡이를 쥐었다.

“실물은 언제.”

“감사원 당직실이 24시간 운영됩니다. 지금 출발하면 새벽 1시 전 도착 가능합니다.”

“그럼 지금 갑니다.”

신우진이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신으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온라인 접수만으로도 윤태호의 폐기 시도보다 빠릅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접수 시각은 서버에 기록됩니다. 파쇄 지시가 오늘 밤이라도, 우리 접수 시점이 파쇄 실행보다 앞서면 증거 인멸 시도 자체가 또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실물도 확보하고 갑니다.”

신우진이 가방을 확인했다. 보고서 원본 봉투, USB, 교차표 출력본. 봉투 모서리가 가방 안쪽 칸에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청구서 접수합니다.”

이지원이 최종 제출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전환되고 접수 번호 AUDIT-2024-0102가 떠올랐다. 그 아래로 접수 시각이 자동으로 찍혔다.

“접수 완료됐습니다. 지금부터 이 청구서는 공식 접수 상태입니다.”

“당직실 갈 테니까 증거 목록 원본은 가져오십시오.”

“출력해 두었습니다. 지금 감사원 청사 앞에서 뵙겠습니다.”

이지원이 일어나며 재킷을 집어 들었다. 탁자 위 서류를 서류 봉투에 담았다.

“한 가지 더 확인하겠습니다.”

이지원이 화면을 클릭했다.

“온라인 접수 증명서가 PDF로 발급됐습니다. 이걸로 법적 접수 시점은 확정. 실물 제출 전이라도 증거 인멸 시도가 확인되면 별건 감사 사유가 됩니다.”

신우진이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 공기가 차가웠다.

“30분 안에 도착합니다.”

“조심해서 오십시오.”

통화가 끝났다.

이지원은 증거 목록 원본과 서류 봉투를 메신저백에 넣었다. 노트북을 닫고 충전기를 뽑았다. 온라인 접수 증명서 PDF를 USB에 추가 복사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밤 11시 12분.

감사원 접수 시스템 화면에는 여전히 AUDIT-2024-0102가 떠 있었다. 이지원은 잠시 화면을 응시했다. 20년 전 아버지가 제출했던 보고서의 문서 번호를 떠올렸다.

화면을 닫고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현관 불을 끄고 문을 나섰다.

다음 날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이지원은 서재 책상 앞에 앉아 같은 시스템 화면을 띄워두고 있었다.

신우진은 거실 탁자 위에 서류 가방을 올렸다. USB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빼내 따로 탁자 가장자리에 두었다. 노트북을 열고 감사원 온라인 접수 시스템 URL을 입력했다. 자정 무렵, 창밖은 조용했다.

휴대폰으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이지원이 곧바로 받았다. 배경은 그녀의 자택 서재였다.

“접속했습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면에 감사원 전자민원 접수창이 떠올랐다.

“증거 패키지 최종 점검부터 하겠습니다.”

신우진이 서류 가방을 열었다. 보고서 원본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교차표 출력본은 봉투 옆에 가지런히 정렬했다.

“보고서 원본, 교차표 3부 중 1부 확인.”

USB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폴더가 열렸다. 교차표 파일, 보고서 사본 PDF, 필름 스캔 이미지. 세 파일 모두 열어 첫 페이지를 화면에 띄웠다.

“디지털 파일 정상입니다.”

이지원이 자신의 화면을 공유했다. 특별감사 청구서 초안이 떠 있었다. 제목은 ‘철도공사 부품 납품 관련 반복적 위반 및 은폐 행위’.

“청구서 본문 확인하시겠습니까.”

“주요 항목만.”

이지원이 스크롤하며 읽었다. “감사 청구인: 감사실 주임 이지원. 공동 청구인: 차량기지 검수팀 신우진. 감사 대상: 구매처장 윤태호의 부품 납품 승인 절차, 대한정밀 시험성적서 위변조 의혹, 9년 전 박중호 보고서 은폐 경위, 20년 전 이철호 보고서 반려와 현 사건의 동일 패턴.”

“증거 목록은.”

“첨부파일 탭에 등록했습니다. 박중호 보고서 원본 사본, 교차표, 필름 스캔본, 익명 제보 USB 데이터, 20년 전 반려 의견서 사본. 총 5건.”

신우진이 끄덕였다. “접수 시작하겠습니다.”

이지원이 청구서 하단의 ‘제출’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진행 바가 나타났다. 3초 후 시스템 알림창이 떴다.

‘접수번호: ACRC-2024-0891. 접수일시: 2023-09-06 00:17. 담당 심사관 배정 대기 중.’

“접수 확인증 발급됐습니다.”

이지원이 확인증을 프린터로 출력했다. 종이가 밀려 나오는 소리가 영상통화 너머로 들렸다.

신우진이 USB에서 확인증 사본을 내려받아 별도 폴더에 저장했다. 휴대폰으로 확인증 화면을 캡처했다.

“실물 제출은 감사원 청사 당직실에서 접수합니다. 오전 6시 정문 개방.”

“알고 있습니다.”

신우진이 서류 가방에 보고서 원본과 교차표를 다시 넣었다. 잠금 장치를 두 번 확인했다.

“지금 출발합니다. 청사 앞에서 5시 반까지 합류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별도 차량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이지원이 확인증 출력본을 접어 서류 봉투에 넣었다. 화면 너머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청구서 원본과 비교표도 지참합니다. 실물 접수 시 청구서 원본에 서명이 필요합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집었다. 영상통화는 연결된 채로 두었다.

“차량기지 금고 확인 건은.”

“내일 오전 9시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윤태호가 금고를 열기 전에 우리가 원본을 감사원에 제출한 상태여야 합니다.”

신우진이 현관으로 걸어갔다. 작업복 대신 검은색 점퍼를 걸쳤다. 서류 가방을 왼손에 쥐었다. USB는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는 선선했다. 주차된 차량으로 걸어가며 영상통화를 끊었다.

운전석에 앉았다. 조수석에 서류 가방을 두고 안전벨트를 맸다. 대시보드 시계는 00시 24분을 가리켰다. 시동을 걸었다.

감사원 청사는 서울 도심 외곽에 있었다. 이 시간엔 차가 막히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자 예상 도착 시각이 05시 12분으로 떴다.

신우진이 핸들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대로에 진입했다.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차 내부를 스쳐 지나갔다.

주행 중 세 번, 백미러를 확인했다. 뒤따르는 차량은 없었다. 속도를 유지하며 고속도로에 올랐다.

두 시간 반쯤 지났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지원의 메시지였다. ‘20분 후 도착. 주차장 B구역 이용 예정.’

신우진이 답장을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렸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램프를 따라 빠져나왔다.

05시 22분. 감사원 청사 정문 앞에 도착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청사 건물이 무거운 형태로 서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류 가방을 들었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당직실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정문 옆 안내판에는 ‘방문객 출입: 06:00~22:00’이라고 적혀 있었다.

05시 35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지원이었다. 코트 차림에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왼손에는 텀블러를 쥐고 있었다.

“늦지 않았습니다.”

신우진이 서류 가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확인증 출력본 가져오셨습니까.”

이지원이 서류 봉투에서 확인증을 꺼냈다. 접수번호 ACRC-2024-0891이 상단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신우진이 휴대폰 캡처 화면을 옆에 띄워 대조했다.

“번호 일치. 접수 시각 00시 17분.”

이지원이 확인증을 다시 봉투에 넣으며 청사 정문을 올려다봤다. 당직실 불빛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당직실 실물 접수 절차를 확인하겠습니다. 청구서 원본 서명 후 증거 목록과 대조. 이후 담당 심사관 배정까지 3영업일 소요 예정입니다.”

“윤태호는 아직 모릅니다.”

신우진이 정문 유리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계는 05시 50분을 가리켰다. 서류 가방을 단단히 쥐었다.

“9년 동안 금고에만 있던 이 보고서가 이제 감사원 기록이 됩니다.”

이지원이 휴대폰으로 접수 확인증을 다시 확인하며 답했다.

“정문 열리면 바로 당직실로 갑시다. 실물 제출이 완료되는 순간, 윤태호의 문서 정리는 의미가 없어져요.”

정문 너머 당직실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당직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었다. 06시 개방을 준비하는 움직임이었다.

무정차 통과6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