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62화
06시 정각. 당직자가 정문 잠금을 풀었다.
신우진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서류 케이스를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한 걸음 뒤, 이지원의 구두 굽 소리가 로비 바닥에 짧게 울렸다.
당직실 앞에 서자 유리 너머로 당직자가 고개를 들었다.
“실물 접수입니다. 온라인 접수 완료 건.”
이지원이 확인증을 내밀었다. 접수번호 ACRC-2024-0891. 당직자가 확인증을 스캔하고 모니터를 한 번 살폈다.
“접수번호 확인됐습니다. 청구서 원본에 서명하신 후 증거 목록과 대조하겠습니다. 3층 접수과는 9시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여기서 접수 보관 절차만 진행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가방을 연 신우진이 청구서 원본과 증거 목록을 꺼냈다. 이지원이 청구서 하단에 서명했다. 공동 청구인 란에는 신우진이 이름을 적었다.
당직자가 증거 목록을 한 장씩 넘겼다.
“첨부1 박중호 보고서 원본 사본. 첨부2 로트번호 교차표. 첨부3 필름 스캔본. 첨부4 익명 제보 USB 데이터. 첨부5 이철호 반려 의견서 사본.”
읽는 속도가 느렸다. 신우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이지원이 오른손으로 서류 봉투 가장자리를 접었다 폈다 했다.
“이상 없습니다. 접수 보관증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당직자가 도장을 찍고 보관증을 건넸다. 이지원이 받았다.
“3층 접수과 개시 시간 9시에 이 서류들이 정식 접수 창구로 이관됩니다. 온라인 접수 시점이 법적 접수 시점이므로 실물 이관 전이라도 효력에는 영향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신우진이 가방을 닫았다. 시계는 06시 22분.
로비 의자에 앉았다. 이지원이 텀블러를 열자 커피 냄새가 옅게 퍼졌다.
“두 시간 반 남았습니다.”
“기다리죠.”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내 최명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실물 보관 접수 완료. 9시 정식 접수 예정.’ 답장이 바로 왔다. ‘알겠습니다. 차민수 쪽은 아직 아무 말 없습니다.’
08시 45분. 3층 접수과 창구 앞.
직원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접수 창구 번호판이 켜졌다. 1번 창구 담당관 명패에는 ‘김영수’라고 적혀 있었다. 40대 중반의 남자다.
김영수가 컴퓨터를 켜고 접수 시스템에 로그인했다. 신우진과 이지원이 창구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잠시만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걸어왔다. 오른손에 가죽 서류 케이스. 명함을 김영수에게 건넸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차민수 변호사입니다. 윤태호 본부장님을 대리해 왔습니다.”
신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민수. 게임 길드원으로 최명식에게 정보를 흘렸던 그 변호사다.
“이 건 특별감사 청구에 대해 의뢰인 측에서 이의가 있습니다. 증거가 불충분하고 감사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접수 전 검토를 요청합니다.”
김영수가 명함을 내려놓았다.
“접수 전 검토 요청 사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차민수가 케이스에서 문서를 꺼냈다.
“첫째, 제출된 증거 중 박중호의 보고서는 정식 결재를 거치지 않은 초안입니다. 공식 문서가 아닌 개인 메모에 불과합니다. 둘째, 20년 전 이철호의 제보는 당시 감사에서 이미 기각된 사안으로, 현재 사건과의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셋째, 청구인들은 내부 징계 절차가 진행 중인 당사자들로, 감사 청구의 공익성이 의심됩니다.”
이지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변호사님.”
차민수가 고개를 돌렸다.
“박중호의 보고서가 정식 결재를 거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본안에서 다룰 사항입니다.”
“아닙니다. 구매처가 보고 전 반려 도장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반려 사유는 기재되지 않았습니다. 보고서는 묵살되었고, 박중호 팀장은 2년 후 좌천됐습니다.”
이지원이 서류 봉투에서 문서를 꺼냈다. 반복적 위반 비교표.
“이것을 보시죠.”
김영수 앞에 표를 펼쳤다. A3 용지 한 장. 세로로 세 개의 열이 정렬돼 있다.
“왼쪽 열은 1998년 4월, 선친 이철호가 제출한 시험성적서 조작 보고입니다. 대상 부품은 제동밸브 B4 계열. 로트번호 DH-98-2A-521. 제조사는 대한부품산업. 보고에 대한 조치는 ‘허위 보고’로 규정되어 선친은 8일 후 좌천됐습니다.”
이지원의 손가락이 가운데 열로 옮겨갔다.
“가운데 열은 팀장 박중호의 보고서입니다. 시기는 9년 전. 대상 부품은 동일한 B4 계열. 로트번호 DH-09-2A-773. 제조사도 동일한 대한부품산업. 결과는 보고 전 반려. 묵살.”
손가락이 오른쪽 열로 갔다.
“오른쪽 열은 현재 납품 중인 부품입니다. 로트번호 DH-18-2A-1421.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 모든 부품이 동일 금형라인에서 생산됐습니다.”
김영수가 표를 가까이 당겼다.
차민수가 끼어들었다.
“제조사와 금형라인이 같다는 것만으로 은폐를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조작 방식도 같습니다.”
이지원이 비교표 하단을 짚었다.
“인장 강도 2.1뉴턴 감소, 중량 0.6그램 감소, 패킹 재질 EPDM을 HNBR로 치환. 1998년 선친이 보고한 조작 수치, 박중호 팀장이 당시 보고한 조작 수치, 그리고 현재 납품 부품의 편차 값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건 우연의 일치일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지원이 다른 문서를 꺼냈다.
“1998년 선친의 보고를 반려한 담당자는 당시 구매처 부품검수과장 배상호였습니다. 박중호 팀장 보고를 반려한 결재 라인에도 배상호의 서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배상호는 감사실 소속으로, B4 계열 검수 기록을 임의로 삭제한 장본인입니다.”
김영수가 고개를 들었다.
“배상호라는 인물이 세 시점 모두에 관여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20년 전에는 반려자로, 박중호 건에서는 결재선으로, 현재는 증거 인멸자로.”
차민수의 입술이 얇아졌다.
“김영수 담당관님. 이건 접수 단계입니다. 본안 판단은 감사 개시 후에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증거의 실체적 진실을 가리는 것은 절차에 맞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김영수가 말했다.
“그래서 제가 확인하는 것은 증거의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감사 청구 요건의 충족 여부입니다.”
김영수가 이지원에게서 추가 자료를 받아 살폈다. 강도영의 유출 목록. 강도영이 윤태호에게 전달한 내부 정보 17건 중 4건이 박중호 보고서와 동일한 부품 계통을 언급하고 있었다.
“공익감사 청구 요건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감사 대상 기관의 위법·부당한 업무 처리가 있을 것. 둘째, 그로 인한 공익 침해가 현저할 것. 셋째, 청구 내용이 구체적일 것.”
김영수가 비교표를 한 번 더 들여다봤다.
“동일 제조사, 동일 금형라인, 동일 조작 수치, 동일 결재 라인의 반복적 관여. 20년에 걸친 동일 패턴의 보고 묵살. 여기에 증거 인멸 정황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차민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인멸 정황은 아직 수사 중인 사안입니다.”
“감사원 특별감사 청구 단계에서는 정황 증거만으로도 요건 충족이 가능합니다. 본안 판단은 감사 개시 후에 이루어집니다.”
김영수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공익감사 청구 요건은 충족됐습니다. 접수를 진행하겠습니다.”
차민수의 표정이 굳었다.
“본부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차민수가 휴대폰을 꺼내며 창구에서 물러났다.
김영수가 접수 시스템에 증거 목록을 입력했다. 키보드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특별감사 청구서, 접수번호 ACRC-2024-0891. 감사 대상은 윤태호의 부품 납품 승인 절차, 대한정밀 시험성적서 위변조 의혹, 박중호 보고서 은폐 경위, 이철호 보고서 반려와 현 사건의 동일 패턴.”
프린터에서 접수증이 출력됐다. 김영수가 도장을 찍고 이지원에게 건넸다.
“접수 완료되었습니다. 감사관이 지정되면 3영업일 내에 통보드리겠습니다.”
이지원이 접수증을 받았다.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확인했습니다.”
09시 35분. 감사원 1층 로비.
신우진이 가방을 열었다. 박중호가 남긴 9년 전 보고서 원본이 안에 그대로 있었다. 접수 창구에 제출한 것은 사본. 원본은 감사관 지정 후 실물 대조 시 직접 제출하기로 한 증거였다.
“원본은 그대로군요.”
이지원이 말했다.
“감사관이 지정되면 직접 제출합니다. 그때까지는 내가 보관합니다.”
신우진이 가방을 닫았다.
“이제 이 문서들은 감사원 기록입니다. 우리 손을 떠났지만,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갔습니다.”
이지원이 접수증을 가방에 넣었다.
“차량기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최명식에게 현장 대응 준비 지시하겠습니다. 감사관들이 납품사에 도착하기 전에 정비고 검수 기록을 모두 정리해 둬야 합니다.”
“본사 감사실로 갑니다. 특별감사 발동 사실을 공식 보고해야 합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으로 최명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수 완료. 감사 개시. 이제 현장 준비다. 정비고 기록 전부 정리해 둬.”
수화기 너머로 최명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이지원이 로비 유리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감사관들이 윤태호의 사무실 문을 열 겁니다.”
“그때 우리는 9년 전 그가 받았던 침묵을 다시는 겪지 않을 겁니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이지원이 접수증이 든 가방을 한 번 두드렸다.
“기록이 말하게 하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기록들이 제대로 읽히도록 옆에 서 있는 것뿐입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감사원 정문을 나섰다. 바깥 공기가 차가웠다. 신우진은 주차장으로, 이지원은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