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66화
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졌다. 신우진은 이지원의 메신저 창에 공문 파일을 첨부하고 메시지를 입력한 지 30초 만에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박중호가 2020년 기록 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뭐라던.”
“공문 확인했다고. 감사관에게 먼저 연락하겠답니다.”
“그쪽도 시간 버는 거냐.”
“아닙니다.” 신우진이 2018년 기록을 펼쳤다. “이쪽은 증거 체인을 조이겠다는 거죠.”
박중호가 코웃음 쳤다. 오른손 검지로 검수 기록의 날짜를 한 칸씩 짚어 내려갔다. 손톱 밑에 오래된 윤활유 자국이 검게 남아 있었다.
“저 공문 언제 도착한 거냐.”
“오늘 오후. 감사원 정식 접수 전에 빼낸 겁니다.”
“누구야, 보낸 놈이.”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2017년 기록과 9년 전의 그 보고서 사본을 나란히 펼쳤다. 왼손 검지가 두 문서의 부품 코드 항목을 번갈아 짚었다.
DH-09-2A-773. DH-17-2A-1124. DH-18-2A-1421.
동일한 DH 코드. 동일한 2A 금형라인. 연도만 다를 뿐이었다.
“제조사 코드 같고, 금형라인 같고.” 신우진이 2019년 기록을 추가로 펼쳤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납품된 B4 계열 전부 같은 라인이에요.”
“당연하지.” 박중호가 고개를 들었다. “금형 바꾸면 돈이 드니까.”
“결함이 보고된 뒤에도 바꾸지 않은 거죠.”
“알면서도 안 바꾼 거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지원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감사관에게 전달했습니다. 공문의 예산 심의 문구는 전형적인 우회 압박입니다. 감사원 내부에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가 이어졌다.
'다만 시간이 문제입니다. 3년 제한 논리가 힘을 받기 전에 이쪽 패턴을 먼저 완성해야 합니다.'
신우진이 짧게 답장을 쳤다.
'알겠습니다. 10년치 교차 대조를 오늘 밤 안에 끝내겠습니다.'
박중호가 2021년 기록을 들어 올렸다. 손목이 약간 떨렸다.
“사흘 일을 하룻밤에.”
“할 수 있습니다.” 신우진이 2016년 기록을 펼치며 답했다. “팀장님 아까 그랬죠.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
박중호가 2021년 기록의 로트번호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신우진은 2016년 기록의 같은 항목에 검지선을 그었다. 두 사람의 손이 기록 위에서 교차하며 쌓이는 숫자들.
사무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창밖으로 견인차가 마지막 객차를 유치선으로 밀고 있었다. 기지 내 스피커에서 퇴근 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렀다.
신우진이 2017년 기록에서 눈을 들었다.
“2015년 3분기 납품분부터 인장 강도 허용오차 초과가 보입니다. 9년 전 보고서와 같은 수치예요.”
“2.1뉴턴 감소.”
“예.”
박중호가 자신의 기록을 신우진 쪽으로 밀어 놓았다. 2022년 1분기 항목이었다.
“여기도다. 이건 2022년.”
신우진이 두 기록을 가로로 붙였다. 2015년, 2017년, 2019년, 2022년. 같은 패턴이 7년 동안 네 번 반복됐다.
“3년 제한 걸면 2021년 이후만 남습니다. 네 번 중 한 번만 감사 대상이 되는 거예요.”
“알고 만든 공문이네.”
신우진이 휴대폰을 열고 이지원에게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동일 금형라인·동일 인장 강도 감소 패턴 4회 확인. 3년 제한 시 1회만 인정됩니다. 전체 연쇄 증명을 위한 교차 대조 계속 진행합니다.'
전송 후 휴대폰을 엎어 놓고 2014년 이전 기록을 집어 들었다. 왼손 흉터가 기록지 가장자리를 스쳤다.
박중호가 물컵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물은 마시지 않았다.
“저 공문.” 그가 2020년 기록을 다시 넘기며 말했다. “감사원 예산 심의가 카드면, 우리 카드는.”
“기록입니다.” 신우진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만드는 이 패턴 자체가 반격입니다.”
다음 날 오후, 이지원에게 공문 사본을 보낸 지 약 20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신우진의 휴대폰이 책상 위에서 길게 울렸다. 액정에 이지원의 이름이 떠올랐다. 박중호가 2020년 기록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신우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형광등이 깜박였다. 안정기를 손봐야 할 타이밍이었다.
신우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검수 기록 철을 끌어당겼다. 이지원과의 통화는 3분으로 끝났다. 공문 사본은 전송했고, 감사원 감사관과의 면담은 이지원이 진행하기로 했다.
“3년 제한이라.”
박중호가 맞은편에서 코웃음 쳤다. 오른손으로 2020년 기록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B4 계열 납품 시작이 언제더라.”
“2018년 3월 첫 계약. 지금까지 다섯 번 갱신.”
“3년으로 자르면 첫 두 건은 감사 범위 밖이군.”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으로 2018년 기록의 로트 번호를 짚었다. DH-18-2A-1123.
2023년 납품 부품은 DH-23-2A-2105.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 동일했다.
“의원실 공문이 3년을 콕 집은 건 우연이 아닙니다.”
“당연하지.” 박중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윤태호가 불리한 계약 번호를 알려줬겠지.”
사무실 구석 금고 앞으로 걸어갔다. 다이얼을 돌리는 소리가 형광등 윙윙거림을 덮었다. 금고 문이 열렸다. 박중호가 갈색 봉투를 꺼내 들었다. 봉투 귀퉁이가 닳아 있었다.
“9년 전 사본. 원본은 감사원에 있다.”
책상으로 돌아와 봉투를 열었다. A4 용지 여섯 장. 첫 장 상단에 ‘부품검수 특별 보고서, 문서번호 QC-2009-0031’이라고 찍혀 있었다. 박중호의 수기 서명. 컬러 사진 네 장이 클립으로 묶여 있었다.
신우진이 2018년 기록을 옆으로 밀고 보고서 사본을 펼쳤다. 두 문서를 나란히 놓았다.
“로트 번호.”
박중호가 보고서 두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DH-09-2A-773.”
신우진이 2023년 검수 기록을 펼쳤다.
“DH-23-2A-2105.”
“제조사 코드 동일.”
“DH.”
“금형라인.”
“2A.”
신우진이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짧은 사선을 그었다. 셋. 확인할 축이 세 개였다.
“연도 코드만 바뀌었습니다. 제조사, 금형라인, 검사 기준은 그대로.”
박중호가 2020년 기록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으로 로트 번호를 따라 내려갔다. DH-20-2A-1802.
DH-20-2A-1803. DH-20-2A-1804. 세 개 연속, 동일한 접두사.
“전부 2A 금형이야.”
“2018년 첫 납품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없습니다.”
박중호가 2019년 기록을 펼쳤다. DH-19-2A-1501부터 DH-19-2A-1520까지. 20개 로트 전부 동일 제조사 코드, 동일 금형라인.
“14년이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신우진이 9년 전 보고서의 사진을 집었다. 패킹 마모 단면을 찍은 접사였다. 찢어진 고무 표면에 금속 분말이 박혀 있었다. 2023년 검수 기록에 첨부된 사진과 같은 패턴이었다.
“부품 결함의 역사를 3년으로 자르면.”
“이 연결고리가 사라진다.”
박중호가 책상 위에 10년치 기록을 연도별로 늘어놓았다.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열 개의 기록 철이 형광등 아래 펼쳐졌다.
“프레임워크를 짜자. 연도, 로트 번호, 제조사 코드, 금형라인, 검수 결과. 다섯 열.”
신우진이 노트북을 열었다. 빈 스프레드시트를 띄웠다. 첫 행에 열 제목을 입력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입니다. 9년 전 보고서가 시작점.”
“14년치를 표 하나로.”
“감사원이 3년 제한을 검토할 때 이 표를 보여줘야 합니다. 동일 제조사, 동일 금형라인, 동일 결함 패턴이 14년간 반복됐다는 걸.”
박중호가 보고서 사본을 첫 번째 열 옆에 놓았다.
“시작한다. 2009년, DH-09-2A-773.”
신우진이 스프레드시트에 첫 행을 입력했다. 키보드 소리가 사무실에 가볍게 울렸다. 박중호가 2014년 기록 철을 집어 들었다.
“2014년 1분기. 로트 번호 불러.”
밖에서는 마지막 화물열차가 기지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사무실 시계는 오후 9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종이를 넘기며 번호를 불렀다. 14년치 부품 로트가 한 줄씩 스프레드시트에 쌓였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차량기지 검수 기록 보관소.
박중호가 먼저 철제 문을 열었다. 공기엔 마른 종이 냄새가 배어 있었다. 벽면 서가엔 연도별 검수 기록이 빽빽했다. 박중호는 2017년부터 2023년까지 일곱 개 철을 꺼내 탁자에 쌓았다.
“불출 전표도 필요하다.”
신우진이 탁자 위에 9년 전 보고서 사본을 펼쳤다. 박중호가 작업복 주머니에서 개인 금고 열쇠를 빼더니 보관소 구석의 작은 내화 금고를 열었다. 갈색 봉투 하나를 꺼내 내용물을 탁자 위에 쏟았다. 10년 치 불출 전표 묶음이었다.
“다 모아뒀나.”
“버릴 수가 없더군.”
신우진이 2017년 검수 일지를 집었다. 로트번호 열이 빼곡했다. DH-09-2A-773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어 9년 전 보고서 사본의 같은 번호를 확인했다.
“2017년 3월 입고분. 로트번호 DH-09-2A-773.”
박중호가 2020년 불출 전표를 넘겼다. 손가락이 굵어 종이 넘기는 속도는 느렸지만 눈은 빨랐다.
“여기 있다. 2020년 6월. DH-14-2A-1128.”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로 갔다. 로트번호 체계를 적었다. 제조사 코드 두 글자, 연도 두 자리, 금형라인, 일련번호.
“패턴을 보자고.”
박중호가 2019년 전표를 집었다. 손끝으로 줄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DH-11-2A-887. 2019년 8월 불출.”
“연도만 다를 뿐이다.”
신우진이 화이트보드에 네 개의 로트번호를 나란히 썼다. DH-09-2A-773. DH-11-2A-887. DH-14-2A-1128. DH-18-2A-1421.
박중호가 네 개의 전표를 탁자 위에 일렬로 늘어놓으며 말했다.
“제조사, 금형라인까지 똑같다. 9년 동안 같은 배치를 네 번에 걸쳐 신규 납품으로 등록한 거다.”
신우진이 2022년 검수 일지를 펼쳤다. 같은 로트번호가 ‘신규 입고’로 다시 등록돼 있었다. 검수원 서명도, 합격 스탬프도 달랐다. 다른 검수원이 다른 날짜에 같은 부품을 신규 검수한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신규 검수로 위장했다. 서류상으론 전혀 다른 배치다.”
박중호가 혀를 찼다.
“재고를 돌려 쓴 거야. 검수 기록만 새로 만들고.”
신우진이 휴대폰을 들어 이지원의 번호를 찾았다. 메신저 창을 열었다.
‘대한정밀 물류창고 화재. 보험 가입 내역 조회 요청. 감사실 정보원 라인 가동 바람.’
전송. 휴대폰을 내려놓고 화이트보드로 돌아갔다.
“이제 확인된 건 네 개 배치. 부품은 하나다.”
박중호가 불출 전표 묶음을 탁자 위에 도로 쌓으며 말했다. 손동작이 전보다 빨랐다.
“시험 성적서도 같은 수법일 거다. 부품 하나로 네 번 시험한 것처럼.”
“그렇다면 계약 갱신 때마다 동일한 시험 성적서를 재발행한 거다. 주석 번호만 바꿔서.”
신우진이 9년 전 보고서 사본의 마지막 장을 짚었다. 부록에 첨부된 시험 성적서 사본이었다. 주석 번호 KTR-2014-0217.
“이 번호가 첫 번째 버전이다. 이후 계약 갱신 때마다 소급 발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중호가 코웃음 쳤다.
“14년 동안 같은 종이를 돌려 쓴 셈이군.”
신우진이 화이트보드에 마지막 한 줄을 덧붙였다. 2014년 최초 시험 성적서 → 2017·2020·2023년 재발행 추정.
“문서 증거 연쇄가 시작됐다. 내일 감사원에 이 패턴을 제출한다.”
박중호가 불출 전표 묶음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 반도 못 봤다.”
“사흘이 줄어들었다. 지금 속도면 내일 오전까지 끝낸다.”
신우진이 2018년 검수 일지를 집어 들었다. 박중호는 2021년 전표 묶음을 풀었다. 형광등 아래 종이 넘기는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