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67화

오후 2시, 감사원 특별감사반 임시 사무실.

이지원이 탁자 위에 서류철 세 권을 펼쳤다. 권오중 감사관은 첫 번째 철을 이미 훑은 상태였다.

“대한정밀 물류창고 화재 건은 들었습니다. 부품 샘플 확보가 늦어질 수 있다고.”

“샘플은 소실됐습니다. 대신 검수 기록으로 대체합니다.”

이지원이 두 번째 서류철을 폈다. 신우진이 정리한 교차 대조표. DH-09-2A-773과 DH-18-2A-1421. 같은 제조사 코드, 같은 금형라인, 9년의 간격.

권오중의 시선이 표에 고정됐다.

“동일 금형에서 생산된 부품이 다른 로트번호로 등록됐군요.”

“네 차례입니다. 2015년, 2017년, 2019년, 2022년. 모두 '신규 입고'로 검수됐습니다.”

권오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일 부품을 재고로 돌려 쓰면서 검수 기록만 새로 만든 거군요.”

“해당 부품은 B4 계열 제동밸브의 패킹입니다.”

이지원이 세 번째 철을 집었다. 시험 성적서 사본. 주석 번호 KTR-2014-0217.

“2014년 최초 발행된 시험 성적서입니다. 이후 계약 갱신 시점마다 동일한 시험 데이터로 재발행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017년, 2020년, 2023년 버전의 주석 번호가 모두 다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내용은 동일하고 발행일만 소급됐을 겁니다.”

권오중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시험 성적서 조작은 단순 납품 비리를 넘어섭니다.”

“안전 규격을 회피한 부품이 열차에 장착됐습니다. 지난해 11월 무정차 통과 사고 차량의 경우, 교체 후 7개월 시점에서 패킹 마모율이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표준 허용오차는 ±0.3뉴턴인데, 해당 부품은 인장 강도가 2.1뉴턴 감소했습니다. 패킹 재질도 EPDM이 아닌 HNBR로 치환됐고, 중량도 0.6그램 적었습니다.”

권오중이 서류철을 덮었다.

“14년 전에도 같은 수법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이지원이 잠시 멈췄다. 왼손이 메탈 시계 밴드를 톡 쳤다.

“2009년 3월, 박중호 정비사가 동일한 패턴을 보고했습니다. 결재되지 않았습니다. 구매처에서 반려됐고, 보고서는 금고에 들어갔습니다.”

“그 보고서를 지금까지.”

“박중호 정비사가 보관했습니다. 9년 동안.”

권오중이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서류철 표지를 두 번 두드렸다.

“이 자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감사 범위 확대를 정당화하려면 14년간 반복된 걸 입증해야 합니다.”

“현재 차량기지에서 10년치 검수 기록을 대조 중입니다. 2009년부터 2022년까지. 동일 금형라인 2A에서 생산된 부품이 최소 네 차례 다른 로트번호로 등록된 패턴을 확인했습니다.”

권오중이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다른 부품군에서도 동일 패턴이 나옵니까.”

“제동 패킹 외에 내열 실링과 캘리퍼 브래킷에서도 유사한 허용오차 초과가 의심됩니다.”

권오중이 돌아섰다.

“세 부품군 모두 대조 결과를 정리해 주십시오. 14년치 전체를 타임라인으로 구성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아울러 2009년 이전 사례. 비슷한 수법이 더 오래전부터 있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998년에도 동일한 부품 계통에 대한 제보가 있었습니다. 현재 관련 기록을 추적 중입니다.”

권오중이 탁자로 돌아와 앉았다.

“14년간 반복된 시험 성적서 조작과 검수 기록 위장이 입증되면, 감사 범위는 자연히 확대됩니다. 국회의원실의 요청보다 이 패턴이 우선합니다.”

“패턴이 먼저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차적으로도 그렇고.”

권오중이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과거 유사 사례가 확인되는 대로 공유해 주십시오. 1998년 건도 포함해서.”

이지원이 서류철을 가방에 넣다가 멈췄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대한정밀 물류창고 화재 직전, 회사 내부에서 파일 서버 백업과 원본 파쇄 지시가 있었습니다. 교정 일지와 협의록이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화재와 파쇄 지시가 같은 날?”

“같은 날 저녁입니다. 파쇄 후 화재. 보험 가입 내역은 현재 조회 요청한 상태입니다.”

권오중이 수첩을 덮었다. 표정이 굳어졌다.

“증거 인멸 시도와 방화 가능성. 감사팀이 공식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입니다.”

“보험 내역이 확보되는 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이지원이 가방을 닫고 일어섰다. 권오중도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을 건넸다.

“자료는 이메일로 보내도 좋습니다. 긴급한 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이지원이 명함을 받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옷감이 접히는 소리 없이.

오후 4시. 철도공사 감사실.

권오중이 보낸 협력 의사 공식 메일을 확인한 직후, 이지원은 별도로 보관 중이던 인사 기록 박스를 열었다. 감사실 서고에서 대여한 아버지 이철호의 1998년 인사 파일이었다.

뚜껑을 들어내자 20년 된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맨 위에는 인사 발령 통지서 사본. 1998년 4월 23일자. '부품검수과장에서 교육훈련부로 전보'가 적혀 있었다. 보고서 제출 8일 후였다.

이지원은 통지서를 제쳐두고 두 번째 철을 꺼냈다. '이철호 면담 기록, 1998.03.12'라고 적힌 서류 더미. 그리고 그 아래에 들어 있던 게 '부품 적합성 검토 회의록'이었다.

회의록 상단에는 1998년 3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찍혀 있었다. 참석자는 부품검수과장 이철호, 구매처장 박동수, 품질관리팀장. 안건은 B4 계열 제동밸브의 허용오차 초과 건.

이지원의 왼손이 메탈 시계 밴드를 한 번 쳤다.

회의록 본문을 두 장 넘겼다. 세 번째 페이지 하단. '첨부 문서'라는 제목 아래 번호가 매겨진 목록.

1. B4 계열 제동밸브 시험 성적서 (KTR-1998-0014) 2. 동 부품 불출 전표 사본 3. 국내 납품사 현장 실사 보고서 (PC-1998-042)

네 번째 줄이 비어 있었다. 번호 4만 적혀 있고 제목은 누락돼 있었다.

이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3번 항목 옆 여백에 연필로 작은 메모가 있었다. 아버지의 필체였다.

'계약 제TH-1987-04 관련 검토. 1998.03.20 작성.'

숨을 멈췄다.

아버지가 남긴 메모는 이것뿐이었다. 계약 번호. 작성 날짜.

1987년 계약의 검토 보고서. 20년 전 보고서의 문서 번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존재를 추적할 수 있는 최초의 근거였다.

이지원이 회의록을 복사기로 옮겼다. 유리판에 페이지를 엎고 덮개를 닫았다. 복사 버튼을 누르자 녹색 빛이 종이를 훑었다.

사본이 나왔다. 원본은 인사 파일에 그대로 넣었다.

그녀는 복사본을 책상 LED 스탠드 아래로 가져갔다. 돋보기를 꺼내 메모 부분을 확대했다.

연필 자국이었다. 20년 동안 지워지지 않은 2B 연필.

'계약 제TH-1987-04'라는 건 TH-1187의 상위 계약일 가능성이 높았다. 계약 관리 체계에서 1987년은 전산화 이전이다. 이 계약의 문서는 종이 보관소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지원이 복사본을 파일에 끼웠다. 표지에 '이철호 보고서 추적 - 관련 문서'라고 썼다.

좌측 하단을 받쳐 든 채 서가로 걸어갔다. 영구 보존 문서 요청서 양식을 한 장 뽑았다.

첫 줄에 '계약서 TH-1987-04 및 관련 검토 보고서'라고 적었다. 신청 사유란에는 '감사 업무 참고'라고만 기입했다. 관리 번호나 보관 위치는 공란으로 남겼다.

양식을 팩스함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문서보관소로 발송되는 건 내일 오전 9시다.

이지원이 책상 앞에 다시 섰다. 인사 파일 박스를 닫기 전, 마지막으로 회의록 복사본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빈 네 번째 줄. 그리고 아버지의 연필 메모.

보고서 제목은 사라졌지만, 계약 번호는 남았다. 20년 전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남긴 흔적이었다.

오후 다섯 시, 철도공사 감사실. 팩스 송신음이 가늘게 사라진 기계 앞에 서서 인사 파일 박스를 닫았다. 손끝에 아직 아버지의 연필 자국이 닿은 듯 따끔했다.

차량기지 검수 기록 보관소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신우진이 2016년 불출 전표 묶음에서 손을 떼고 진동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 이지원의 이름이 떠 있었다. 박중호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신우진이 일어나 보관소 바깥 복도로 나왔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우진입니다.”

“문서 목록에서 이상한 항목을 찾았습니다.”

이지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계약 TH-1987-04 관련 검토. 이 메모만 있고 보고서 본문은 목록에 없습니다. 번호 체계가 현재 것과 다릅니다. 1987년 계약 건입니다.”

신우진이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TH-1187과 같은 계열인가.”

“TH-1187의 전신입니다. 20년 전 계약 번호예요. 이 메모를 남긴 사람은 제 아버지였고.”

잠시 정적. 형광등의 미세한 윙윙거림만 복도에 남았다.

“아버지가 20년 전 같은 부품 계열의 문제를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9년 전 보고서, 그리고 지금 KD-2037까지. 전부 같은 뿌리입니다.”

신우진이 왼손 검지로 허공에 짧은 획을 그었다.

“계약 번호가 같다는 건 동일한 부품 계열이란 뜻이다. 제조사 코드도 같을 가능성이 높다.”

“맞습니다. 그래서 원본 보고서의 행방을 추적하려고 합니다. 20년 전 물리적 문서 보관 정책을 확인해야 합니다.”

“내 쪽에서 할 일은.”

“9년 전 보고서의 계약 번호와 TH-1987-04가 연결되는지 교차 확인해 주십시오. 박중호 선임이 당시 계약 체계를 기억할 겁니다. 두 보고서가 동일한 부품 계열을 다루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을 왼손으로 바꿔 쥐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로트번호 체계를 역추적해서 연결 고리를 만든다.”

“원본 보고서는 제가 찾습니다. 문서 목록에 기록된 보관 위치는 폐기됐지만, 당시 감사실의 별도 보관 절차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걸 확인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신우진이 잠시 멈췄다.

“대한정밀 물류창고 화재 건. 보험 가입 내역 조회는.”

“이미 요청했습니다. 결과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복도 끝에서 박중호가 나왔다. 보온병을 들고 휴게실 쪽으로 걸어가다 신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일단 9년 전 보고서와 TH-1987-04의 계약 번호 관계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박중호 선임에게 물어볼 게 있습니다.”

“그쪽이 끝나면 연락 주십시오. 저는 오늘 밤 안으로 20년 전 감사실 문서 보관 규정을 찾아볼 겁니다.”

“알겠다.”

통화가 끝났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내렸다.

박중호가 보온병을 들고 다가왔다.

“이 과장인가.”

“20년 전 같은 부품 계열. 계약 번호가 나왔다.”

신우진이 보관소 문을 열며 덧붙였다.

“TH-1987-04. TH-1187의 전신 계약입니다.”

박중호의 걸음이 멈췄다. 보온병을 든 손이 허리께에서 정지했다.

“그 계약 번호면.”

“압니까.”

“TH 계열은 전부 동일한 제동밸브 설계도에서 나온 거야. 87년에 최초 납품한 부품이 TH-1187로 개량됐고, 그게 다시 KD-2037로 명칭만 바뀐 거다. 설계도는 하나, 이름만 세 번 바뀐 셈이지.”

신우진이 보관소 안으로 들어섰다. 작업대 위에 9년 전 보고서 사본을 펼쳤다. 부록 첫 장의 계약 번호 필드.

“QC-2009-0031의 원 계약 번호가 뭡니까.”

박중호가 작업대로 걸어와 보고서 사본을 내려다봤다.

“TH-1187-04다. 같은 TH 계열이야.”

신우진이 화이트보드로 돌아서서 로트번호 타임라인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TH-1987-04 → TH-1187-04 → KD-2037.

“설계도 하나, 계약 세 개, 조작 스무 해.”

박중호가 보온병 뚜껑을 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걸 이제야 묶는군.”

신우진이 화이트보드 앞에서 마커를 내렸다.

“계약별 불출 전표를 뽑아야 합니다. TH-1187-04와 KD-2037의 교차 지점을 시간순으로 정렬합니다. 설계도 변경 이력도 확인하고.”

박중호가 보온병을 내려놓았다.

“TH-1187 건은 내가 맡지. 2009년 보고서에 첨부된 부품 사양서 원본이 내 개인 기록에 있다. 그걸 KD-2037 사양서와 대조하는 게 빠르겠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지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계약 계보 확인 완료. TH-1987-04 → TH-1187-04 → KD-2037. 동일 설계도, 동일 부품 계열. 조작 20년.’

발송 후 휴대폰을 작업대 위에 엎어 놓았다.

“원본 보고서 추적은 이 과장이. 나머지는 우리가.”

박중호가 2009년 보고서 사본의 부록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

“사양서 대조는 한 시간 안에 끝낸다.”

두 사람은 각자 방향으로 흩어졌다. 형광등 아래 종이 넘기는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철도공사 감사실. 해가 지고 사무실 창문이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

이지원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신우진의 메시지가 휴대폰 화면에 떠 있었다.

TH-1987-04 → TH-1187-04 → KD-2037.

스무 해. 아버지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 해와 같은 숫자였다.

이지원이 문서 목록 복사본을 다시 펼쳤다. ‘계약 TH-1987-04 관련 검토’라는 필기 옆에 작은 별표가 있었다. 아버지의 글씨였다.

당시 감사실장이었던 김재원은 주요 제보 기록을 개인 금고에 보관하는 관행이 있었다. 2001년 퇴직.

이지원이 메모지에 ‘김재원 전 감사실장’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 ‘퇴직 2001년, 연락처 확인 필요’.

노트북을 덮으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인사과 퇴직자 명부 열람 신청. 내일 오전 첫 업무로 접수할 예정이었다.

계약 TH-1987-04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이제 막 첫 실마리를 쥐었다.

무정차 통과6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