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68화

감사원 특별감사반 임시 사무실은 본관에서 떨어진 별관 3층에 있었다.

이지원이 오전 8시 30분에 문을 열었다.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감사관들은 대영정밀 본사 현장 감사에 나간 상태였다.

그녀가 창가 쪽 임시 책상에 노트북을 올렸다. 전원을 켰다.

문서 목록 복사본을 꺼내 왼쪽에 펼쳤다. ‘계약 TH-1987-04 관련 검토’ 옆의 별표가 형광등 아래 또렷했다.

노트북이 부팅됐다. 이지원이 외장 하드디스크를 연결했다. 암호화된 연락처 파일을 열었다. 비밀번호를 두 번 입력했다.

목록이 떴다. 정보원 코드명 07, 12, 19. 배상호가 모르는 3인이었다. 각각 2000년대 초반 감사실 근무자, 구매처 퇴직자, 현 감사실 문서고 담당자였다.

이지원이 별도 메신저를 실행했다. 종단간 암호화가 적용된 비공식 채널이었다.

메시지를 입력했다.

‘1998년 부품 적합성 검토 보고서 추적. 문서번호 미상. 작성자 이철호. 계약 TH-1987-04 관련. 보관 위치·문서번호·열람 가능 여부 회신 요망.’

발송 버튼을 눌렀다.

수신 확인 표시가 07, 12, 19 순서로 떴다.

이지원이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왼쪽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8시 47분.

회신은 빨라야 점심 무렵이었다.

그녀가 노트북을 덮고 일어났다.

차량기지 정비고 사무실. 오전 9시.

신우진이 작업대 위에 박중호의 9년 전 보고서 사본을 펼쳤다. 문서번호 QC-2009-0031. 오른쪽에는 현재 납품 중인 B4 계열 부품 검수 기록철을 쌓았다.

박중호가 탕비실에서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한 잔을 신우진 앞에 내려놓았다.

“뭐부터 할 거냐.”

“패킹부터.”

신우진이 보고서의 부품 규격 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2009년 제동 패킹, 로트번호 DH-09-2A-773. 인장 강도 기준 14.2뉴턴에서 2.1뉴턴 미달.”

박중호가 검수 기록철을 넘겼다. 2022년 입고분이었다.

“찾았다. DH-22-2A-1421. 인장 강도… 12.1.”

“똑같다. 2.1뉴턴 부족.”

신우진이 노트에 ‘제동 패킹’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로 로트번호와 수치를 나란히 썼다.

박중호가 다른 검수 기록철을 집었다.

“내열 실링. 2009년 건은… 열 저항 230도 기준 18도 미달.”

“2023년 입고분은.”

기록을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박중호의 굵은 손가락이 표의 맨 아래 줄을 짚었다.

“215도. 미달 폭 동일. 18도.”

“로트번호는.”

“DH-23-2A-887.”

신우진이 노트에 두 번째 항목을 적었다.

“캘리퍼 브래킷. 2009년 보고서에는 표면 경도 0.3H 부족으로 기록됐다.”

박중호가 세 번째 기록철을 펼쳤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여기. 2021년 입고분. DH-21-2A-1103. 표면 경도 0.3H 부족.”

“전부 동일 금형라인 2A다. 제조사 코드 DH도 같고.”

신우진이 노트를 박중호 쪽으로 돌렸다. 세 부품군의 로트번호·수치 편차가 정렬돼 있었다.

박중호가 노트를 내려다봤다.

“9년. 부품만 바꿔치기하고 시험 수치는 그대로 베꼈다.”

“패턴이 같다는 건.”

신우진이 필기구를 내려놓았다.

“의사 결정도 같았다는 뜻이다. 누군가 9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방식으로 덮으라고 지시했다.”

박중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턱 근육이 단단히 올라와 있었다.

“윤태호다. 당시 구매처 과장이었어.”

“증거가 쌓이고 있다.”

신우진이 노트를 접어 왼쪽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유성 매직 옆에 노트 모서리가 닿았다.

“이걸로 연결고리 하나. 더 필요하면 캘리퍼 브래킷의 경도 시험 성적서 원본을 요청할 수 있다.”

“감사원 채널로?”

“그렇다. 공식 경로로.”

감사원 특별감사반 임시 사무실. 오전 11시.

노트북 알림이 떴다. 정보원 12번의 회신이었다.

이지원이 메시지를 열었다.

‘문서번호 TH-1997-044. 작성자 이철호, 결재 상신일 1997년 12월 18일. 부품 계열 B4 제동밸브.

최초 납품사 대한정밀. 보관 위치: 물류창고 지하 B동 문서보관실, 1998년 2월 14일 이관 기록 확인. 현장 소재 미확인.’

이지원이 메시지를 정독했다. 두 번 읽었다.

TH-1997-044. 1997년.

윤태호가 대한정밀과 첫 납품 계약을 체결한 해였다.

아버지는 그 첫 계약이 시작된 지 1년도 안 돼 문제를 제기했다. 계약 TH-1987-04에 대한 검토 메모가 1998년 봄이었으니, 선행 보고서는 1997년 겨울에 이미 제출된 셈이었다.

이지원이 노트북 화면을 캡처했다. 프린터로 출력했다.

출력물이 천천히 나왔다. 그녀가 종이를 접어 서류 가방에 넣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신우진의 번호를 눌렀다.

“신 주임님. 문서번호 확인했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TH-1997-044. 1997년 12월 작성. 물류창고 B동 지하 문서보관실로 이관된 기록까지 확인했습니다. 현장 소재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1997년이면.”

“대한정밀 첫 납품 계약과 같은 해입니다. 윤태호 대표가 구매처 과장으로 첫 계약을 승인한 시점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신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비고로 오십시오. 맞춰볼 게 있습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이지원이 통화를 종료했다. 노트북과 서류를 챙겼다.

차량기지 정비고 사무실. 오후 2시.

신우진이 작업대 위에 노트와 보고서 사본을 정렬해 놓았다. 박중호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 부품군의 대조 데이터가 노트 위에 필사돼 있었다.

이지원이 도착했다. 서류 가방에서 출력물을 꺼냈다.

“문서번호 TH-1997-044. 1997년 12월 18일 상신. 부품 계열은 B4 제동밸브입니다.”

신우진이 출력물을 받아 들었다. 박중호에게 건넸다.

박중호가 종이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B4 계열. 1997년이면… 이 부품 라인이 이십 년 전에 이미 문제였다는 말이군.”

이지원이 작업대 앞으로 다가갔다.

“제 아버지가 처음 보고한 부품 계열과 정확히 같습니다. 1998년 봄 검토 메모가 TH-1987-04 계약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직전 보고서가 TH-1997-044였습니다.”

신우진이 노트를 펼쳤다.

“아까 확인한 3개 부품군입니다. 제동 패킹, 내열 실링, 캘리퍼 브래킷. 전부 2009년 보고서와 현재 납품 부품의 수치 편차가 동일합니다.”

“제조사 코드는.”

“DH. 금형라인 2A. 일관됐습니다.”

이지원이 노트를 살폈다. 로트번호 체계와 수치 편차가 깔끔하게 열거돼 있었다.

“1997년 최초 납품부터 2009년 보고서, 그리고 현재까지. 동일 제조사, 동일 계열, 동일 조작 방식입니다.”

“이십 년.” 박중호가 떨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신우진이 노트를 덮었다.

“조직화된 관행입니다. 단발성 비리가 아니라 납품 시스템 자체에 내재된 문제였습니다. 1997년 첫 계약부터.”

이지원이 서류 가방에서 빈 A4 용지를 꺼냈다. 펜을 들었다.

“이 연결고리를 감사원 제출용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세 가지 문서를 한 세트로 구성합니다.”

그녀가 용지 상단에 ‘연결고리 초안’이라고 적었다.

“첫째, TH-1997-044 보고서 추정 위치. 문서번호와 이관 기록은 확보했고, 현장 소재 확인은 후속 절차로 남깁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QC-2009-0031 박 팀장님 보고서 원본. 이것은 이미 감사원에 제출됐습니다.”

박중호가 팔짱을 끼고 들었다.

“셋째, 현행 납품 부품 3개군의 검수 데이터 대조 결과.”

이지원이 세 항목을 차례대로 적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이 세트로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입니다. 1997년부터 20년 이상, 동일한 부품 계열에서 동일한 방식의 시험 성적서 조작과 검수 위장이 반복됐다.”

신우진이 말했다.

“제도화된 부패. 감사원이 이 구조를 인지하면 범위 축소 시도는 성립 근거를 잃습니다.”

이지원이 펜을 멈췄다. 노트북을 열었다.

“물류창고 B동 문서보관실 이관 기록을 전산에 조회해 보겠습니다. 현장에 사람을 보내기 전에 전산 이력이 필요합니다.”

그녀가 내부 전산 시스템에 접속했다. 문서번호 TH-1997-044를 입력했다.

조회 결과가 떴다.

‘문서번호: TH-1997-044 / 상태: 이관 완료 / 이관일: 1998-02-14 / 보관위치: 물류창고 B동 지하 2층 문서보관실 구역 4-B / 담당자: 김재원’

이지원이 화면을 읽어 내려갔다.

“김재원 전 감사실장이 직접 이관했습니다. 개인 금고 보관 관행과 별도로, 공식 보관소에도 사본을 남겨둔 셈입니다.”

순간 화면이 깜빡였다.

조회 결과가 사라졌다.

‘조회하신 문서번호에 해당하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지원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다시 입력했다. 같은 문구가 떴다.

“삭제됐습니다.”

그녀의 손이 정지했다.

“방금 전까지 존재하던 이관 기록이 사라졌습니다. 이 단말기에서 조회한 직후입니다.”

신우진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박중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덮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배상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보원 라인에 연락을 넣은 걸 감지했을 겁니다. 그리고 윤태호에게 전달했고, 지금 이 순간 기록을 지우고 있습니다.”

노트북을 서류 가방에 넣었다.

“하지만 출력물은 남았습니다. 문서번호도 확보했습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물류창고 B동. 내일 오전 첫 업무 시작 전에 확인해야 합니다.”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상호가 이쪽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보고하고 있다는 건 명확해졌습니다. 앞으로 모든 연락은 이 채널에서만 합니다.”

그녀가 암호화 메신저를 가리켰다.

박중호가 벽 쪽 금고를 바라봤다.

“빨리 움직여라. 그쪽도 이제 속도를 올릴 거다.”

무정차 통과6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