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69화
아침 7시 40분. 차량기지 휴게실.
형광등 불빛 아래 컴퓨터 한 대가 켜져 있었다. 최명식은 의자에 앉아 마우스를 쥔 채 화면을 응시했다. 오른손이 뒷목을 한 번 만졌다.
게임 클라이언트가 로딩을 마쳤다. 길드 채팅창에 접속 중 메시지가 떴다.
'칼날여우'의 닉네임이 초록불로 바뀐 지 3분째.
최명식이 채팅창을 열었다.
「최명식이: 접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칼날여우: 아 그 화재 건 때문에?」
「최명식이: 네. 전에 말씀하신 거, 혹시 더 아시는 내용 있나 해서」
「칼날여우: 확실한 건 아니고… 우리 쪽에서 도는 소문인데」
최명식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칼날여우: 그거 보험금 때문에 질렀다는 얘기가 파다해요」
「최명식이: 질렀다고요?」
「칼날여우: ㅇㅇ 샘플이랑 시험성적서 보관하던 구역만 집중적으로 탔대요. 보험사에서도 수상하게 보는 눈친데 아직 공식 조사는 안 나왔고요」
「최명식이: 그 얘기 어디서 나온 겁니까」
「칼날여우: 대한정밀 내부에요. 품질팀 아니고 물류팀 쪽에서 새나왔다던데. 대놓고 말하는 분위기는 아니고요. 저도 이건 제발 조용히…」
최명식이 화면을 스크롤해 대화 전체를 올렸다.
「최명식이: 알겠습니다. 이거 캡처해도 되겠습니까」
「칼날여우: 얼굴이랑 닉네임은 꼭 가려주시고요」
최명식이 화면 캡처 버튼을 눌렀다. 파일명 '캡처1114화재소문.png'로 저장했다. 대화 로그도 텍스트로 복사해 메모장에 붙였다.
길드원이 채팅창에서 나갔다. 최명식이 USB 메모리를 꽂아 파일 두 개를 옮겨 담았다.
휴게실 벽시계가 7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8시 15분. 차량기지 제2검수실.
신우진이 검수복 상의만 입은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어젯밤 정리한 부품군 대조표가 떠 있었다. 왼손 집게손가락의 오래된 유압유 흉터가 키보드 조명 아래서 짙게 보였다.
문이 열렸다. 안전화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선배님.”
최명식이었다. 이마에 얕은 땀이 배어 있었다. 숨이 가빴다.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대한정밀 화재 건… 방화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최명식이 USB를 꺼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까 길드원한테 확인했어요. 보험금 때문에 질렀다는 얘기가 내부에서 새나왔다고 합니다.”
신우진의 시선이 USB에 닿았다.
“물류팀 쪽이야, 품질팀이야.”
“물류팀이요. 시험성적서랑 샘플 보관하던 구역만 골라서 탔다고… 보험사도 수상하게 보는데 공식 조사는 아직 없대요.”
신우진이 노트북 덮개를 닫았다.
“그 길드원, 어제 입수 경로는.”
“저번에 말했던 대한정밀 품질관리팀 그 사람 맞아요. 어젯밤에 연락 기다리라고 해놨다가 오늘 아침에 확인한 거예요. 칼날여우라는 닉넨데… 진짜 조심해 달라고 했어요. 대놓고 말하는 분위기가 아니래요.”
신우진이 USB를 받아 노트북에 꽂았다. 파일이 열렸다. 캡처 이미지와 텍스트 파일 두 개.
대화 로그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시험성적서 보관 구역 집중 화재. 보험사 의혹. 물류팀 내부 발언.
“이거만 있나.”
“네. 근데 전에 말했던 '대한정밀 교정 소급 소문'이랑 연결되는 느낌이… 그쪽도 시험성적서 조작 얘기였잖아요.”
신우진이 USB를 뽑았다.
“캡처는 나한테만 보냈어.”
“네. 길드원 얼굴이랑 닉네임은 안 보이게 편집했어요.”
최명식이 뒷목을 만졌다.
“선배님… 이거 소방서 화재조사 보고서랑 교차 확인하면 방화 여부가 나올 거예요. 보험금 노렸다는 정황이 입증되면 시험성적서 폐기 의도도 증명되는 거고… 그럼 부품 검수 조작이랑 연결…”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신우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보고서 열람하려면 정식 절차가 필요하다.”
“정보공개청구 하면 돼요. 10일 안에 답변 의무고…”
“10일은 길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성 매직을 왼쪽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소방서 화재조사 보고서. 공식 경로로 요청한다. 감사원 특별감사 근거자료로 청구하면 기간이 단축될 가능성이 있어.”
“제가 서류 준비할까요.”
“아니. 이건 내가 한다.”
신우진이 USB를 서랍에 넣고 잠갔다.
“넌 길드원한테 한 가지 더 확인해. 대한정밀 물류팀 내부에서 나온 얘기가 언제부터였는지.”
최명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접속하면 물어볼게요.”
“캡처는 지금 내 메일로도 보내.”
“네.”
최명식이 휴대폰을 꺼내 파일을 전송했다. 전송 완료 알림이 신우진의 노트북 화면 하단에 떴다.
신우진이 화면을 확인하고 노트북을 서류 가방에 넣었다.
“이 정보, 이지원 쪽에도 공유한다. 감사실에서 소방서 협조 요청을 병행할 거야.”
최명식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이게… 진짜 결정적인 거죠?”
“확인 전에는 아무것도 결정적이지 않다.”
신우진이 검수실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가기 전 잠시 멈췄다.
“일단 출근 준비해. 오늘도 평소처럼.”
“네.”
문이 닫혔다. 최명식은 제2검수실 책상 앞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메신저를 열었다.
길드원에게 메시지를 썼다.
「최명식이: 오늘 밤에 잠깐 또 봐도 될까요. 한 가지만 더 여쭤볼 게 있어서요」
제2검수실. 오전 9시 7분.
신우진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바탕화면에서 최명식의 캡처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게임 로그 화면. 방폭·화재라는 단어가 대화창에 여러 번 등장했다. 덧붙은 날짜는 3일 전. 물류창고 화재 발생일과 일치했다.
신우진이 휴대폰으로 관할 소방서 번호를 검색했다. 북부소방서 화재조사과.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네 번 울렸다.
“북부소방서 화재조사과입니다.”
“철도공사 검수팀 신우진입니다. 지난주 대영산업 물류창고 화재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화재 원인 조사 결과를 열람하고 싶습니다. 납품 부품과 관련된 사안입니다.”
잠시 침묵.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우진 님, 말씀하신 건은 현재 조사가 종료되었고 보고서도 완료된 상태입니다. 다만 공식 절차에 따라 정보공개 청구를 하셔야 합니다.”
“구두로는 안 됩니까.”
“공공기관 정보공개법에 따라 서면 청구가 필요합니다. 담당자가 아니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청구서는 어디서 받습니까.”
“소방서 홈페이지나 정보공개포털에서 양식을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작성하셔서 팩스나 이메일로 접수하시면 됩니다.”
“처리 기간은요.”
“법정 처리 기한은 10일입니다. 긴급 사유를 기재하시면 검토 후 단축 가능성은 있습니다.”
신우진이 왼손으로 유성 매직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두 번 돌렸다.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지금 양식을 받겠습니다.”
“화재조사과 공용 메일입니다. 불러드리겠습니다.”
담당자가 천천히 이메일 주소를 불러주었다. 신우진이 수첩에 받아 적었다.
“접수 확인은 얼마나 걸립니까.”
“오늘 중으로 접수증을 회신해드립니다. 청구서 하단에 긴급 사유를 명시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컴퓨터로 소방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정보공개 청구서 양식을 내려받아 프린터로 출력했다.
종이 세 장이 트레이에 쌓였다. 청구서 상단에 '공공기관 정보공개법 제10조에 의거'라는 문구. 하단의 긴급 사유란에 펜을 댔다.
'납품 부품 결함 관련 감사 진행 중. 화재가 증거인멸 목적일 가능성 있음.'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최명식의 캡처 파일을 첨부하지는 않았다. 출처 보호가 먼저였다. 정보공개포털 접속 주소를 메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실. 오전 10시 22분.
이지원이 책상 위에 노트북과 출력물 여러 장을 펼쳐놓고 있었다. 화면 왼쪽에는 문서번호 TH-1997-044의 이관 기록 복사본. 오른쪽에는 인사 파일에서 발췌한 이철호의 1998년 전보 명령서 사본.
신우진이 문을 두드렸다.
“잠깐 됩니까.”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피로가 쌓여 있었지만 시선은 또렷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신우진이 정보공개 청구서 사본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대영산업 물류창고 화재. 방화 가능성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이지원의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출처는요.”
“확인된 경로입니다. 신빙성은 제가 판단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화재 발생 전 내부에서 증거 인멸을 논의했다는 취지의 대화입니다. 창고에 보관된 시험성적서와 문서가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지원이 청구서 사본을 집어 들었다. 긴급 사유란을 읽고 시선을 신우진에게 고정했다.
“증거인멸 목적의 화재라면 단순한 행정 위반이 아닙니다. 현행범 수준의 범죄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경로가 필요합니다.”
“어떤 경로입니까.”
“하나는 소방서 정보공개 청구. 10일 소요됩니다. 다른 하나는 감사원의 긴급 자료 요청입니다. 감사원 권한이면 신속히 확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지원이 청구서 사본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서류 왼쪽 하단을 받쳤다.
“권오중 감사관님께 직접 연락하겠습니다. 지금 감사원에 상주 중이십니다.”
“가능합니까.”
“이미 특별감사가 진행 중인 사안입니다. 그 감사와 직접 연관된 자료라면 감사원이 피감기관에 직접 자료 제출을 요구할 권한이 있습니다. 소방서의 화재조사 보고서도 공공기관 간 정보 공유 협조 요청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신우진이 청구서를 접어 왼쪽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소방서 경로는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감사원 경로는 언제쯤 결과를 알 수 있습니까.”
“오늘 오후 권 감사관님 면담 일정이 있습니다. 그때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긴급 사유를 명시한 공문을 작성하면 당일 협조 요청도 가능합니다.”
“현장 사진이라도 먼저 확보할 수 있습니까. 보고서 전문이 아니라 화재 현장 기록 사진만으로도 방화 여부를 판단할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았다. 20년 된 문서 목록 복사본을 서류철에 끼우며 일어섰다.
“권 감사관님께 그 부분을 먼저 요청하겠습니다. 화재 현장 사진은 소방서가 디지털로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간이 중요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배상호가 어제 전산 기록을 삭제한 속도를 생각하면, 물리적 증거를 향한 움직임도 빠를 겁니다.”
신우진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복도로 나서기 전 멈춰 섰다.
“권 감사관님 연락 닿는 대로 현장 사진이라도 먼저 확보해줘.”
이지원이 이미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왼손으로 문서철을 밀며 오른손이 권오중의 직통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번호 버튼이 짧게 네 번 울렸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신우진이 복도로 나갔다. 뒤에서 이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 감사관님, 감사실 이지원입니다. 긴급히 말씀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