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72화
오후 3시. 감사원 특별감사반 임시 사무실.
탁자 위에는 박중호의 9년 전 보고서 사본과 2013년부터 2023년까지의 검수 기록 파일이 연도별로 펼쳐져 있었다. 신우진이 노트북 화면의 교차 대조표를 인쇄한 출력물을 한 장씩 넘겼다. 박중호는 2018년 검수 기록 뭉치를 집어 들었다.
“2018년 9월 입고분. KD-2037-89. 인장 강도 마이너스 2.1뉴턴.”
박중호가 손가락으로 보고서 문구를 짚었다. 9년 전 보고서 사본의 해당 줄 옆에 2018년 기록지를 나란히 붙였다.
“같은 수치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2019년, 2020년, 2022년 기록도 차례로 집었다. 손가락이 수치 위를 지날 때마다 박중호가 숫자를 읽었다.
“2.1. 전부 2.1이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아홉 번 납품 건 중 일곱 번이 동일 결함.”
신우진이 출력물 한 장을 더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시험 성적서 발행일과 실제 검수일을 병기한 대조표였다.
“발행일이 검수일보다 빠른 건 정상입니다. 그런데 여기.”
2016년 3월 입고분부터 2022년 11월 입고분까지 여섯 건의 시험 성적서 발행일이 검수일보다 3일에서 5일 늦었다.
박중호가 숨을 들이켰다. 턱 근육이 움찔했다.
“성적서가 나중에 발행됐다? 부품 먼저 납품하고 서류는 나중에 맞췄다는 뜻이다.”
“2015년부터 시작된 패턴입니다.”
신우진이 노트북을 돌려 박중호에게 보여줬다. 화면에는 2015년 7월 윤태호의 첫 납품 계약 승인 문서와 2015년 9월 검수 기록이 나란히 떠 있었다.
“2015년 9월 4일 검수 완료. 시험 성적서 발행일은 9월 7일. 3일 역전.”
박중호가 책상을 짚었다. 의자가 삐걱 소리를 냈다.
“내 보고서에서 지적한 게 이거였다. KD-2037 패킹 표면 균열 빈도. 검수 때마다 터지는데 성적서는 통과. 그게 9년 전이었다. 그런데 2015년에 똑같은 부품으로 계약을 다시 시작했고, 똑같은 수법으로 서류를 조작했다.”
“패턴이 14년입니다. 9년 전 보고서부터 역산하면 2007년 사고 부품까지.”
신우진이 2007년 사고 보고서 사본을 꺼내 대조표 옆에 놓았다. TH1187-04. 인장 강도 -2.1뉴턴. 패킹 재질 HNBR.
“같은 금형. 같은 수치.”
박중호가 세 장을 나란히 바라봤다. 2007년. 2009년.
2015년. 2018년. 2022년.
“20년이다. 이철호가 1997년에 보고했을 때부터.”
신우진의 손이 멈췄다. 박중호가 처음으로 이철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 보고서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겠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신우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보고서 원본은 물류창고 B동 지하 2층입니다. 오늘 오후에 확인할 예정이었지만, 이지원 감사관님 면담 후로 미뤄졌습니다.”
박중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감사원 청사 바깥은 흐렸다.
“20년 전에 막았어야 할 숫자였다.”
오후 3시 40분. 이지원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른손에 노트북 가방, 왼손에는 면담 기록지가 들려 있었다. 시선이 탁자 위의 출력물 더미를 훑었다.
“권 감사관님 면담 마쳤습니다. 구본근 의원실의 2차 공문이 오늘 오전 접수됐다고 합니다. 감사 범위 3년 축소를 다시 요구했어요.”
“근거는.”
신우진이 물었다.
“정치적 중립성 훼손 주장입니다. 특정 정파의 의원이 감사 결과를 선거에 이용할 수 있다는 논리예요.”
박중호가 창가에서 돌아섰다.
“20년치 증거가 있는데 3년만 보겠다고?”
“그래서 이 문서 체인이 중요합니다.”
이지원이 탁자로 다가갔다. 신우진이 작성한 요약본을 집어 들었다. 첫 장부터 천천히 넘겼다.
1997년 이철호 보고서. 2007년 사고 부품. 2009년 박중호 보고서. 2015년 첫 납품 계약. 2018년부터 2023년까지의 검수 기록 47건.
눈이 2015년 줄에서 멈췄다.
“2015년 7월 22일. 윤태호가 구매처 과장으로 대한정밀과 첫 계약을 체결한 날짜입니다.”
이지원이 가방에서 아버지의 반려 의견서 사본을 꺼냈다. 오른쪽 광대 아래 작은 점이 실내등에 드러났다.
“아버지의 1997년 보고서. 문제 삼은 부품 규격이 세 가지입니다. 인장 강도 표준치 미달. 패킹 재질 EPDM→HNBR 무단 치환. 중량 -0.6그램.”
이지원이 2015년 계약서 사본을 요약본 옆에 펼쳤다. 두 문서의 부품 사양서 부분을 나란히 정렬했다. 손가락이 왼쪽 하단을 받쳤다.
“2015년 계약서의 부품 사양서. 인장 강도 기준 동일. 패킹 재질 HNBR로 지정. 중량 기준 동일.”
손가락이 1997년 보고서의 해당 줄을 짚었다가 2015년 계약서로 이동했다.
“20년 전 아버지가 문제 삼았던 그 규격이 2015년 계약에서 그대로 부활했습니다. 불량 기준이 아니라 납품 기준으로.”
박중호가 탁자 옆으로 다가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세 문서 위에 모였다.
신우진이 볼펜을 집어 요약본 빈칸에 선을 그었다. 가로선 하나. 세로선 둘.
“시험 성적서 조작.”
선 하나.
“납품.”
선 둘.
“검수 기록 조작.”
선 셋.
“계약 갱신.”
네모를 그려 폐쇄 루프를 완성했다.
“이 루프가 20년 동안 닫힌 적이 없습니다.”
이지원이 요약본에 추가 메모를 적어 내려갔다.
“‘1997년 이철호 보고서 지적 사항과 2015년 계약서 부품 사양의 동일성 — 20년 만에 불량 규격이 납품 기준으로 전환됨.’ 이 내용을 문서 체인 요약본에 부기하겠습니다.”
박중호가 요약본 마지막 장을 집었다. 자신의 9년 전 보고서 문구가 2022년 검수 기록과 나란히 인용된 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감사관이 이걸 봤나.”
“오후 다섯 시 정식 면담 때 제출할 예정입니다.”
신우진이 요약본과 대조표, 계약서 사본을 하나의 파일로 정리했다. 이지원이 추가 메모를 마지막 장에 끼워 넣었다.
“문서 체인은 완성됐습니다. 1997년부터 2023년까지 동일 부품 계통에서 동일 결함 수치가 반복된 증거.”
박중호가 자신의 금고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쥐었다. 열쇠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가 금고를 연다. 그 안에 원본이 있다.”
오후 네 시. 창밖으로 감사원 청사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탁자 위의 문서들은 더 이상 흩어진 기록이 아니었다.
문서 체인의 완결성을 확인한 지 30분 뒤, 오후 네 시 반. 4층 면담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신우진이 정리된 파일을 자신의 서류 가방에 넣었다. 박중호는 손에 쥔 금고 열쇠를 다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으며 복도 끝 면담실 문을 바라보았다.
오후 4시 30분. 감사원 특별감사반 임시 사무실 면담실.
신우진이 긴 테이블 위에 문서 체인 요약본을 펼쳤다. 박중호는 그의 오른쪽에 앉아 9년 전 보고서 사본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지원은 노트북을 열어 교차 대조 파일을 띄웠다.
권오중 감사관이 자리에 앉으며 서류철 표지를 두 번 두드렸다.
“자료는 받았습니다. 요약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신우진이 요약본 첫 장을 가리켰다.
“9년 전 보고서에서 경고한 패킹 균열이 2015년 납품분부터 현재까지 검수 기록에서 47건 확인됩니다.”
이지원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시험 성적서는 매년 사후 발행되었습니다. 발행일과 검수일의 간격이 18일에서 22일로 일정합니다.”
“20년 전 이철호 검수원이 보고한 패턴과 동일합니다.”
권오중이 고개를 들었다. 이지원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이철호 검수원이 1997년 제출한 보고서 말입니까.”
“맞습니다. 문서번호 TH-1997-044.”
권오중이 요약본의 연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1997년, 2009년, 그리고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세 개의 시점에서 동일한 부품 계통, 동일한 조작 패턴이 발견된 겁니까.”
박중호가 끼어들었다.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도 같다. 부품 이름만 바뀌었을 뿐 실제 규격은 20년 전 그대로다.”
“시험 성적서의 주석 번호는 어떻습니까.”
이지원이 파일을 넘겼다.
“KTR-2014-0217이 2015년, 2017년, 2019년, 2022년 납품분에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재발행 시 변경되어야 할 관리 번호가 4회에 걸쳐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권오중이 필기했다. “인장 강도 수치는.”
신우진이 답했다.
“표준 허용오차 ±0.3뉴턴 대비 2.1뉴턴 부족. 9년 전 보고서와 올해 검수 기록이 동일한 편차를 보입니다.”
“패킹 재질은.”
“EPDM에서 HNBR로 치환. 내열 성능이 18퍼센트 저하됩니다. 중량은 0.6그램 감소.”
권오중이 펜을 내려놓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봤다.
“9년간 47건의 검수 기록. 20년 전 보고서. 그리고 올해 적발된 동일 패턴.”
서류철을 덮었다.
“이 자료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조작의 증거입니다.”
이지원이 아버지의 반려 의견서 사본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1997년 12월 18일. 당시 부품검수과장 배상호가 7건의 불일치를 모두 근거 부족으로 반려했습니다.”
“동일 인물이 현재 감사실 소속으로 B4 계열 검수 기록을 삭제했습니까.”
“맞습니다.”
권오중이 잠시 침묵했다. 서류철 표지를 다시 두드렸다. 이번에는 세 번이었다.
“9년간의 지속적 조작을 입증하는 이 자료는 특별감사 중간보고서의 핵심 증거로 채택합니다.”
박중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신우진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구본근 의원실의 감사 범위 축소 요청은.”
권오중이 고개를 저었다.
“이 증거 체인 앞에서는 3년 제한을 주장할 논리적 근거가 없습니다. 1997년부터 현재까지가 하나의 연속된 사안입니다.”
“증거 목록을 공식 접수해 주십시오.”
“접수증을 발급하겠습니다.”
권오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담실 문을 열기 전에 잠시 멈춰 섰다.
“이 자료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정치적 압박의 강도가 높아질 겁니다.”
--- 오후 5시 50분. 감사원 특별감사반 임시 사무실.
신우진이 접수증을 왼쪽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박중호는 창가에 서서 본사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지원은 정보원 라인 접속 단말기를 열었다.
한경숙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조원 12명. 증언 동의서 서명 완료.”
명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신우진이 훑어보았다. 김민섭, 고영호의 후임 정비원 둘, 검수고 반장급 세 명. 모두 현장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이름들이었다.
“일정은.”
“내일 오후 2시. 감사원에서 직접 녹취하겠다는 연락 왔어.”
이지원이 단말기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정보원 03번 메시지. 윤태호 본부장이 오후 5시 20분 구본근 의원실로부터 면담 결과를 전달받았습니다. 5시 35분 긴급 대응 회의 소집.”
“내용은.”
“구체적 안건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참석자가 법무팀장, 구매처장, 배상호 감사역입니다.”
신우진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봤다. 5시 52분.
“회의는 지금 진행 중이군.”
박중호가 창가에서 돌아섰다.
“배상호가 들어갔으면 문서 삭제만으로는 안 끝난다는 뜻이다.”
“이제 증거가 감사원 공식 기록으로 편입됐다. 개별 압박으로는 안 되니까.”
“조직적 은폐로 온다.”
한경숙이 명단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래서 증언 서명을 서둘렀어. 사람들의 입을 막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덮으며 말했다.
“윤태호의 이동 경로와 연락 패턴을 추적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방어였지만, 이제 먼저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최명식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중요한 소식 있음. 통화 가능하면 연락 바람.’
신우진이 휴대폰을 귀에 댔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최명식이 받았다.
“형, 방금 길드원한테 연락 왔는데.”
최명식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윤태호 쪽에서 오늘 밤 차량기지 정비 기록 보관소에 사람 들여보낸대요. 뭔가 없애려는 거 같아요.”
신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왼손 집게손가락의 흉터가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드러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