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73화
통화가 끊기자마자 신우진이 안전조끼를 집어 들었다.
“어디 가는 겁니까.”
이지원의 질문에 신우진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답했다.
“기록 보관소. 최명식이 방금 연락했다. 오늘 밤 윤태호 쪽에서 사람 들여보낸대요.”
박중호가 벌떡 일어났다.
“몇 시라고 하든.”
“시간은 특정 안 됐어요. 통화 내용만 들었대요.”
박중호가 금고 열쇠 뭉치를 챙겼다.
“관제실 먼저 찍고 간다.”
신우진이 휴대폰으로 관제실 내선을 눌렀다. 세 번의 신호음 후 연결됐다.
“검수팀 신우진입니다. 정비 기록 보관소 공식 감시 요청합니다.”
“사유는.”
“증거 인멸 시도 제보 접수. 철도안전법 제41조 해당.”
“요청 접수. 감시 카메라는 3번과 7번입니다. 해상도 낮으니까 출입문 쪽은 사람이 붙는 게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통화 종료. 신우진이 박중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복도로 나섰다.
형광등이 절반쯤 소등된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박중호의 안전화가 콘크리트 바닥을 짧게 울렸다. 보관소는 정비고 서쪽 끝이었다. 출입문 앞에 멈춰 서자 박중호가 열쇠를 꽂았다. 문이 열리고 형광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신우진이 보관소 내부를 훑었다. 선반에는 연도별 불출 전표 묶음이 빼곡했다. 2015년 섹션 앞에서 멈춰 섰다. 문서 더미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꺼내 본 흔적이었다.
“아직 안 왔군.”
박중호가 출입문 틀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경첩이 헐거워. 보강판 덧대야겠다.”
신우진이 관제실에서 받은 요청서 사본을 꺼내 보관소 출입문 옆 게시판에 테이프로 붙였다. 문서 번호 AUDIT-2024-0103. 공식 감시 등록 시간은 오후 6시 7분. 박중호가 복도 구석의 두께 3밀리미터 강판을 끌어당겨 전동 드라이버로 경첩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금속 마찰음이 복도에 울렸다.
신우진이 선반마다 불출 전표 상태를 확인했다. 2015년, 2017년, 2019년, 2022년 섹션의 문서 묶음이 다른 연도보다 얇았다. KD-2037 관련 기록이 이미 한 번 누군가에게 정리당한 흔적이었다.
박중호가 전동 드라이버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보강 끝났다. 출입문은 앞으로 관리실 승인 없이 못 연다.”
“관제실 감시 카메라는.”
“3번이 출입구 정면, 7번이 복도 쪽이다. 사각 없어.”
신우진이 확인증을 한 번 더 훑고 밖으로 나왔다. 박중호가 문을 잠그고 열쇠 뭉치를 품에 넣었다.
그때 신우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경숙이었다.
“노조 사무실로 와라. 긴급이야.”
“지금 보관소 보강 막 마쳤다. 무슨 일이야.”
“본사에서 정비팀 전체 대기 발령 예고 메일을 보냈어. 구본근 의원실은 감사원에 특별감사 중단 촉구 2차 공문 발송했다. 지금.”
한경숙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감사원은.”
“아직 공식 반응 없어. 하지만 이대로면 내일 중단 결정 나올 수도 있어. 나는 전 노조원에게 긴급 소집 문자 돌렸다.”
“알았다. 지금 간다.”
통화를 끊었다. 박중호가 신우진을 바라봤다.
“또 무슨 일이냐.”
“인사팀이 정비팀 전체 대기 발령 예고했대요. 감사원엔 중단 촉구 2차 공문.”
박중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매뉴얼대로군. 감사 방해하려면 항상 이 순서다.”
“가봐야겠습니다.”
“그래. 나는 여기서 야간 감시한다. 누구 오든 이 문은 못 열게 한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가로질러 본관 쪽으로 향했다. 보안등만 켜진 야간 차량기지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조 사무실 문을 열자 한경숙이 팔을 걷어붙인 채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왔다.”
사무실 안에는 이미 7명이었다. 김민섭이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고, 검수고 반장급 세 명이 테이블 앞에 모여 있었다. 한경숙이 신우진에게 출력물을 건넸다.
“본사 인사팀 공문. 정비팀 전원 대기 발령 예고. 실행일은 내일 오후 2시. 사유는 감사 협조로 인한 현장 운영 차질.”
신우진이 서류를 훑었다. 결재선 맨 아래에는 구매처장 직인이 찍혀 있었다.
“윤태호가 움직였군.”
“응. 구본근 의원실 2차 공문은 감사원에 오후 5시 55분 접수됐어. 이지원이 방금 확인해줬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열어 이지원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보관소 보강 완료. 노조 사무실 도착. 인사팀 대기 발령 확인. 의원실 공문 내용 공유 바람.’ 전송을 누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한경숙이 화이트보드에 ‘긴급 대의원 회의’라고 적었다.
“지금부터 한 시간 안에 여기서 대의원 회의를 연다. 안건은 두 가지. 하나, 내일 대기 발령에 대한 대응 방안. 둘, 감사 중단 압박에 대한 노조의 공식 입장.”
“대의원 정족수는.”
“지금 여기 7명. 오는 중인 사람이 다섯. 규정상 12명이면 의결 가능해.”
신우진이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증거 인멸 시도는 막았어요. 보관소는 관제실 공식 감시 하에 있고 출입문 보강 완료. 박중호가 야간 직접 감시합니다.”
김민섭이 고개를 들었다.
“물리적 기록은 지켰다 이거죠.”
“네.”
“그럼 이제 우리가 지킬 차례네요. 사람을.”
한경숙이 명단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앞서 서명한 12명의 이름이 줄지어 있었다.
“대기 발령이 실행되면 이 사람들 전부 현장에서 손 떼게 돼. 하지만 바로 그게 윤태호의 목적이야. 감사 증언할 사람들을 현장에서 몰아내는 것.”
“노조 대응은.”
“대의원 회의에서 결정한다. 그런데 한 가지 미리 말해둘 건 있어.”
한경숙이 목소리를 낮췄다.
“윤태호 쪽에서 노조가 집단 행동에 들어가면 안전 업무 방해로 고소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변호사들이 벌써 준비 중이래.”
신우진이 한경숙을 바라봤다.
“확인된 정보입니까.”
“이지원이 법무팀 움직임 추적하다가 포착했어. 아직 공식 통지서는 안 왔어. 하지만 대비해야 해.”
노조 사무실 문이 열리고 3명이 더 들어왔다. 모두 정비복 차림에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일단 회의 시작하자.”
한경숙이 화이트보드 앞으로 섰다. 신우진은 구석에 서서 휴대폰을 열었다. 이지원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의원실 공문 원문 입수. 내용: 감사 범위 축소 논의 중 특별감사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변경됨. 결재일 오늘. 권오중 감사관은 공식 답변 보류 중. 추가로 법무팀이 노조 집단행동 고소장 초안을 오늘 오후 완성했다는 정황 포착.’
신우진이 화면을 응시했다. 두 개의 공격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었다. 감사 중단 압박과 노조 무력화.
노조 사무실에는 어느새 열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한경숙이 명단을 들었다.
“김민섭, 검수고 반장급 세 분, 정비 2팀 두 분은 출석했고. 두 분 더 오면 대의원 회의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들어 이지원에게 짧은 답장을 보냈다.
‘법무팀 고소장 동향 계속 추적 바람. 노조는 대의원 회의 곧 소집. 권오중 감사관 답변 나오는 대로 알려달라.’
전송. 신우진이 휴대폰을 닫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경숙이 매직으로 ‘긴급 대의원 회의 — 오후 7시 20분 개의 예정’이라고 적었다. 정비팀 노조원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고, 사무실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이십 분 뒤, 대의원 회의가 예정된 시각을 넘겼을 무렵, 차량기지 노조 사무실은 인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차량기지 노조 사무실에는 접이식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30여 명이 앉고도 벽 쪽에 선 사람이 열 명 가까이 됐다. 탁자 위에는 인사팀 발송 메일 출력본과 구본근 의원실 2차 공문 사본이 돌려져 있었다.
한경숙이 탁자 앞에 섰다. 오늘은 메모가 필요 없는 회의였다.
“본사 인사팀이 정비팀 전원 대기 발령 예고를 보냈다. 발령 일자는 내일. 그리고 감사원에는 특별감사 범위를 3년으로 축소하라는 2차 공문이 접수됐다.”
의자 삐걱이는 소리 몇 개가 났다.
“발령 사유는 조직 개편에 따른 인력 재배치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대기 발령 대상자 명단을 보면, 감사 증언에 서명한 사람들만 골랐다.”
명단 사본을 들어 올렸다. 노조원들의 시선이 종이를 따라갔다.
“부당한 보복 인사다. 특별감사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다.”
한경숙이 수첩에서 출력물 하나를 꺼내 폈다. 노조 규약 제42조의 사본이었다.
“노조 규약 제42조. 부당한 인사 조치에 대한 집단 대응을 규정하고 있다. 나는 대의원들에게 묻는다. 노조 규약에 따른 집단 행동 결의를 상정한다.”
“잠깐만요.”
셋째 줄 의자에서 손이 올라왔다. 정비3팀의 강민수였다. 평소 발언이 적은 온건파 대의원이었다.
“집단 행동이 어떤 식인지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정비팀 전원이 대기 발령 직전인 상태에서 노조까지 현장을 비우면, 안전 업무에 공백이 생깁니다.”
한경숙이 팔짱을 풀었다.
“계속하게.”
“노동자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안전 업무를 방치하는 꼴이 되면 여론에서 밀릴 겁니다. 윤태호 쪽에서 노리는 게 정확히 그거 아닙니까. 게다가 집단 행동 초반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보복 인사의 1순위가 될 게 뻔합니다. 그 리스크를 조합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주변에서 작게 수군대는 소리가 났다. 동의하는 눈빛 몇 개, 반대하는 눈빛 몇 개가 교차했다.
“리스크는 나도 알고 있다.”
한경숙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내일부로 정비팀은 반으로 쪼개져서 뿔뿔이 흩어진다. 증언 서명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외지 발령일 거다.”
박중호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다크서클이 짙었고 호흡이 약간 짧았다. 지팡이는 구석에 세워둔 채 오른손만으로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민수 말대로 위험은 있다.”
중저음이 낮게 깔렸다.
“그런데 내가 봐온 30년 동안, 정비 기록이 사라진 뒤에 안전이 지켜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회의장 안이 조용해졌다.
“기록이 사라지면 안전도 없다. 그건 오늘 밤에도 똑같이 증명되고 있다.”
박중호는 말을 더 붙이지 않았다. 의자를 당겨 앉았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탁자 밑으로 가렸다.
한경숙이 손을 들었다.
“표결한다. 집단 행동 결의안에 찬성하는 대의원은 거수.”
구석에 서 있던 김민섭이 손을 들었다. 정비고 반장급 세 명이 연이어 손을 들었다. 강민수는 5초쯤 머뭇거리다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올렸다.
한경숙이 머릿수를 세는 동안, 반대 손은 세 개뿐이었다.
“재적 36명, 찬성 24표. 결의안 가결.”
탁자 위 출력물 뭉치에서 한경숙이 행동 지침 초안을 꺼냈다.
“행동 개시는 내일 오전 6시. 장소는 차량기지 정문 앞. 복장은 노조 조끼. 집단 증언 동의서 서명자들은 가급적 전원 참석. 행동의 합법적 테두리는 법무 자문 받은 지침을 따르고, 충돌 상황에서는 즉시 대화 녹음을 시작한다.”
복사기에서 지침 초안이 한 장씩 나왔다. 노조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복사물을 받아 들었다. 강민수는 복사물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입을 열려다 말았다.
회의장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신우진이 복도로 나서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이지원이었다.
“권오중 감사관에게 제출할 공식 의견서 건입니다.”
이지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박자 빨랐다.
“내일 중으로 정리 가능합니다. 항목은 정치적 압력에 의한 감사 중단 시도. 첫째, 구본근 의원실 1차 공문. 둘째, 인사팀 대기 발령의 시간적 일치. 셋째, 오늘 접수된 2차 공문.”
“셋째 항목은 구체적인 접촉 증거가 필요하다.”
신우진이 복도 끝 창문 쪽으로 걸었다.
“통화 기록만으로는 안 돼. 녹취록이 필요하다.”
전화기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났다.
“정보원 라인의 잔여 접속 지점을 추적 중입니다. COOP-04 계정은 차단됐지만, 감사실 내부 네트워크 로그에서 오늘 오후 5시 20분 전후로 구본근 의원실 발신 전화가 윤태호의 직통 회선으로 연결된 기록이 있어요. 그리고 내부 통화 기록 서버에 구간 녹취 파일의 인덱스가 남아 있습니다. 파일 자체는 삭제됐지만 메타데이터는 복구 가능해요.”
“확보 경로는.”
“감사실 서버실의 물리적 접근 권한이 있는 정보원 09번을 경유합니다. 배상호가 차단하기 전에 등록된 마지막 접속 지점이에요.”
신우진이 휴대폰을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몇 시까지 가능하지.”
“내일 오전 9시 전까지. 권 감사관과의 면담은 10시 이후로 잡는 게 좋겠습니다.”
“일정 분담. 녹취록은 이 쪽에서 확보하고, 의견서 초안은 내가 새벽까지 정리한다.”
이지원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한 가지 더. 권 감사관에게 직접 말할 내용은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게 낫습니다. 정치적 부담이 커질수록 감사원 내부에서 동요가 퍼지고 있어요. 누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알겠다.”
신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복도에 최명식만 남아 있었다.
“형, 저… 야간 근무 끝나고 퇴근하려는데, 보관소 쪽에 용역 직원 두 명이 더 왔대요. 아까 말한 것보다 인원이 늘었어요.”
“언제부터.”
“한 30분 전쯤이래요. 내 친구가 경비실에서 봤대요.”
신우진이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밤 10시 17분.
“알았다. 퇴근해.”
최명식이 사물함 문을 닫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신우진은 주머니에서 인사 발령 메일 출력본을 꺼내 접힌 부분을 손끝으로 폈다. 오른손 검지가 서류 왼쪽 모서리에 짧은 가로획을 그었다.
노조 사무실 방향에서 한경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동 지침에 덧붙일 법무 자문 사항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새벽 5시 30분. 노조 사무실의 형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한경숙이 행동 지침 최종본을 복사기에서 한 장 더 뽑아 파일에 끼웠다.
팩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수신함에서 종이가 한 장 밀려 나왔다. 한경숙이 뽑아 들었다. '내용증명'이라는 글자가 헤더에 박혀 있었다. 발신인은 윤태호 측 법률대리인.
‘금일 노조의 집단 행동은 안전 업무 방해 행위로 민·형사상 조치의 대상이 됨을 통지합니다.’
신우진이 복도에서 들어왔다. 팩스지를 받아 읽고 굳은 표정으로 종이를 한 번 접었다.
“우리 예상보다 빠르네요.”
한경숙이 수첩을 집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이쪽도 서둘러야겠습니다.”
신우진이 팩스지를 접어 왼쪽 주머니에 넣고 문 쪽으로 돌아섰다. 오른손 검지가 세 번째 짧은 획을 허공에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