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74화

오전 9시 20분. 차량기지 노조 사무실 앞 복도. 집단 행동 첫 조가 정문으로 나간 지 한 시간이 조금 안 됐다. 신우진이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한경숙은 책상 위에 팩스지를 펼쳐 놓고 있었다.

노란색 팩스 용지 두 장. 첫 장 상단에 '내용증명'이라고 찍혀 있었다.

“한 시간 만에 왔네.”

신우진이 종이를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윤태호 측 법률대리인 법무법인 태산. 수신인은 노조 지부장 한경숙 외 간부 2명.

고소 혐의는 안전 업무 방해. 적용 조항은 철도안전법 제80조와 업무방해죄.

“고소인 명단에 이름이 셋이다.”

“나랑, 부지부장, 사무국장.”

한경숙이 수첩을 꺼내 팩스 도착 시각을 적었다. 오전 9시 12분.

신우진은 두 번째 장을 읽었다. 민사 손해배상 청구 예고. 집단 행동으로 인한 검수 지연이 부품 수급에 차질을 초래했으며, 이에 따른 손해액을 별도 청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속도가 다르네.”

팩스 기계가 다시 돌아갔다. 같은 발신인. 수신인란에 '차량기지 관제실'이라고 찍혀 있었다.

한경숙이 뽑아 들었다.

“관제실에도 보냈어. 집단 행동을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공익신고로 이첩하겠대.”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노조 간부 세 명이 들어왔다. 뒤이어 두 명이 더 왔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지부장님, 팩스 왔다는 게 이겁니까.”

“고소장이 아니라 내용증명이야. 하지만 고소 예고로는 충분하다.”

부지부장이 신우진 쪽을 봤다.

“형사 고소에 민사까지면, 이거 현장 조합원들한테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설명은 한다. 지금부터 간부 회의 소집할 거야.”

한경숙이 탁자 위의 집단 증언 명단을 옆으로 밀고, 내용증명 사본을 가운데에 놓았다.

“열 시 정각까지 전원 집결. 늦으면 브리핑 못 들은 걸로 간주한다.”

오전 10시 15분. 접이식 의자 열다섯 개가 책상 주변을 둘러쌌다. 간부 전원 열네 명이 앉았다. 입구 쪽에 선 사람도 셋 있었다.

한경숙이 내용증명 사본을 한 장씩 돌렸다.

“윤태호 측에서 노조 간부 셋을 고소했다. 혐의는 안전 업무 방해. 민사 손배도 붙어 있다. 그리고 관제실에도 압박 공문을 보냈다.”

돌려보던 종이가 멈춘 자리마다 숨소리가 가늘어졌다.

강경파 측 간부가 먼저 일어났다. 정비1팀 소속 남자였다.

“이럴수록 물러서면 안 됩니다. 고소가 두려워서 행동 접으면, 앞으로 뭘 해도 고소 카드 꺼낼 겁니다.”

“누가 물러서잰 겁니까. 방법을 다시 보잔 거지.”

온건파 간부가 종이를 접으며 말했다. 검수팀 쪽 여자였다.

“손배 청구까지 들어왔어요. 조합원 중에 애 둘 딸린 사람도 있고, 집에 어머니 모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행동은 좋은데, 생계 위협받을 때 누가 책임질 겁니까.”

“생계는 조합 규약대로 조합이 책임진다.”

“규약만으론 안 됩니다. 작년에 법률 검토했던 사례 기억하세요. 업무방해로 유죄 나오면 법률 이지원도 한계 있어요.”

강경파 간부가 다시 일어서려는 걸 한경숙이 손바닥으로 제지했다.

“차례대로 말해.”

“지부장님, 이미 결의한 사항입니다. 대의원 24명이 찬성했어요. 여기서 흔들리면 현장 조합원들은 누굴 믿습니까.”

온건파 간부가 고개를 저었다.

“결의는 현장 상황을 전제로 한 거예요. 내용증명 들어온 다음엔 전제가 바뀐 겁니다.”

두 쪽에서 동시에 말이 터져 나왔다. 의자 밀리는 소리가 겹쳤다. 한경숙이 탁자를 한 번 쳤다.

“그만.”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신우진이 팩스지 사본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른손 검지가 서류 가장자리에서 짧은 횡선 하나를 그었다.

“한 가지만 확인하자. 집단 행동의 합법적 테두리.”

모두 시선이 신우진 쪽으로 몰렸다.

“노조 규약 제42조 적용 대상은 부당 인사 조치에 대한 집단 대응이다. 오늘 아침 고소 건은 안전 업무 방해 혐의. 42조만으로 방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니까 행동을 바꾸잔 겁니까?”

강경파 간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바꾸잔 게 아니라 근거를 보강하잔 거다. 공식 입장을 정리하고 법률 검토 의견서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관제실 대응도 가능하다.”

온건파 간부가 끼어들었다.

“법률 검토 나올 때까지 행동 중단은?”

“말 안 했다. 중단 아닌 재정비다.”

신우진의 시선이 한경숙에게 갔다.

한경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첩을 접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집단 행동은 예정대로 지속한다. 강경파 의견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다.”

온건파 쪽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단, 공동 법률 대응팀을 오늘 중으로 꾸린다. 노조 규약에 따라 긴급 예산 집행도 승인한다. 변호사 자문은 지금부터 수배하고, 법률 검토 의견서는 내일 아침까지 받아 본다. 이걸로 생계 문제 대응할 실무 라인은 확보다.”

“신 주임 의견은 어쩌고요.”

“기록에 남긴다.”

한경숙이 신우진을 한 번 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재정비 안은 유효해. 다만 지금 당장 행동을 멈출 순 없다. 관제실에 우리가 고소장 한 장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해.”

부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건파 간부 둘은 입을 다물었다. 한 명은 팩스지를 다시 손에 들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어선 건 온건파 측 다른 간부였다. 물류팀 쪽 사내였다.

“법률 대응팀 꾸리는 것 자체가 이미 시간 싸움에서 졌다는 뜻 아닙니까. 저는 오늘 오후 현장 복귀하겠습니다.”

한경숙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개인 결정은 막지 않는다. 다만 지금 나가면 앞으로 조합 보호는 받기 어려워.”

“알고 있습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 발소리가 멀어졌다.

신우진이 시계를 봤다. 오전 10시 38분. 사무실에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팩스 기계만 대기 상태의 초록불을 깜빡이고 있었다.

간부 회의가 끝나고 복도가 비워졌다. 신우진은 사무실 문 옆에 서서 한경숙을 기다렸다. 한경숙이 마지막으로 나오며 문을 닫았다.

“인사 발령, 오늘 오후 중으로 공지된대.”

신우진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이지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한경숙의 시선이 화면을 스쳤다.

“확실한가.”

“이지원 감사관이 확인했어. 본사 인사팀 서버에 기안 올라갔대.”

한경숙이 팔짱을 풀었다. 복도 끝 창문으로 낮은 햇빛이 바닥에 닿았다.

“명분은 더 확실해졌군. 법적 대응팀 구성을 앞당기겠네.”

“노무법인 연결해둔 데 있나.”

“두 곳. 하나는 이미 관련 판례 검토 끝냈어.”

한경숙이 수첩을 꺼내 뒷면에 메모지를 찢었다. 변호사 이름과 연락처 두 줄을 적어 신우진에게 건넸다.

“법무팀 고소 예고에 대한 대응도 이쪽으로 통합한다. 오늘 오후 첫 회의 열겠네.”

신우진이 메모를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인사 발령 공지 뜨면 즉시 노조원 전체에 공유해야 한다. 명단은 확보했나.”

“회의록 부록으로 첨부돼 있어. 보여줄까.”

“아니다. 필요할 때 열람하겠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다시 꺼내 이지원에게 짧은 답장을 보냈다. ‘법적 대응팀 구성 시작. 인사 발령 공지 시점 알려주면 노조 전체 전파 예정.’

전송음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닫았다.

한경숙이 사무실 쪽을 돌아봤다. 유리 너머로 복사기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행동 지침 최종 인쇄 중이야. 30분 뒤면 전체 배포 가능해.”

“알겠다.”

신우진이 복도를 따라 정비팀 사무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비팀 사무실 문이 반쯤 열린 채였다. 신우진이 들어서자 박중호가 책상 위에 펼쳐진 검수 일지 위에 굵은 글씨로 무언가 적는 중이었다. 오른손에는 만년필, 왼손은 서류를 누른 채였다.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왔나.”

“인사 발령 오늘 오후 공지다.”

“들었어.”

박중호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것보다 급한 일 있다. 차량기지 3번 선로.”

신우진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뭔데.”

“집단 행동으로 검수 지연된 열차가 한 대 있어. 오후 2시 운행 재개 예정인데, 아직 점검 못 끝냈다.”

박중호가 검수 일지를 돌려 신우진 쪽으로 밀었다. 제동 장치 항목에 빈칸이 있었다.

“무정차 통과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태야.”

“누가 현장에 있나.”

“김민섭 반장이 오전까지 붙어 있었는데, 노조 회의 때문에 떠났고. 지금은 정비 2팀 두 명만 남아 있다. 인원 부족해.”

신우진이 검수 일지를 집어 들었다. 제동압력 점검 란은 공란이었다.

“내가 같이 가겠다.”

“안 된다.”

박중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작업 점퍼 주머니에서 토크 렌치를 꺼내 손에 쥐었다.

“내 사람들 내가 책임진다. 자넨 여기서 연락 체계 잡아.”

“혼자 가면 위험하다.”

“검수 피트 들어가는 건 한 명이면 충분해. 문제 생기면 그때 부르겠다.”

박중호가 벽에 걸린 무전기를 집어 채널을 확인했다. 채널 4로 맞추고 볼륨을 올렸다.

“무전 채널 맞춰 놔. 5분마다 교신 확인 들어간다.”

신우진이 자신의 무전기를 허리에서 뽑아 같은 채널로 돌렸다.

“내가 먼저 확인 신호 보내겠다. 5분 뒤.”

“그래.”

박중호가 사무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작업화 소리가 복도 끝까지 이어졌다. 신우진은 책상 앞에 앉아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인사 발령 공지 시점, 가능하면 미리 알려줘. 현장에 혼자 들어간 사람이 있어. 연락 두절되기 전에 대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인사팀 서버 감시 중이니 공지 업로드 즉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수화기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통화가 끝났다.

신우진이 무전기 버튼을 눌렀다.

“박중호 검수팀장, 들리나.”

잡음이 끼었다가 박중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린다. 지금 도착했다.”

오후 1시 30분, 차량기지 3번 선로. 열차 한 대가 검수 피트 위에 정차해 있었다.

박중호가 선로 옆으로 걸어가자 정비 2팀 소속 젊은 정비원 둘이 공구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명이 박중호를 보고 몸을 돌렸다.

“팀장님, 들으셨어요? 인사 발령 명단.”

“들었다.”

“명단에 제 이름 있어요. 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박중호가 공구함 뚜껑을 닫았다.

“명단은 명단일 뿐이다. 발효되기 전까지는 여기가 현장이다.”

다른 정비원이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본사 인사팀 공지가 떠 있었다. 발령 시각은 오후 2시. 대상자는 정비팀 전원.

“2시부터 대기 발령이래요. 그러면 점검 못 하죠.”

박중호가 무전기를 입가로 올렸다.

“열차 제동 장치 점검 남은 시간은 30분이다. 2시 전에 끝내면 된다.”

두 정비원이 서로를 쳐다봤다. 한 명이 공구함을 닫고 일어섰다.

“명단에 없는 사람도 대기 걸렸다는 소문이 있어요. 저희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

박중호가 검수 피트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젊은 정비원이 공구함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가 멈칫했다.

“팀장님은 안 오십니까.”

“점검 끝나면 간다.”

정비원 둘이 선로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3번 선로 주변은 조용해졌다.

박중호가 피트 상판의 임시 덮개를 발로 밀어 옆으로 옮겼다. 철제 덮개가 콘크리트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사다리를 딛고 피트 아래로 한 발씩 내려갔다.

피트 바닥은 좁고 어두웠다. 제동 장치 연결부가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박중호가 주머니에서 펜라이트를 꺼내 입으로 물고 토크 렌치를 연결부 볼트에 갖다 댔다.

무전기가 울렸다. 신우진이었다.

“박중호 검수팀장, 인사 발령 공문 떴습니다. 현장 인원 지금 바로 복귀시키세요.”

박중호가 무전기 버튼을 누르려고 허리로 손을 내렸다.

그때 상부에서 철제 덮개가 기울었다. 젊은 정비원이 떠나기 전 덮개를 제대로 고정하지 않은 채 떠났다.

경첩이 빠지며 덮개가 피트 안으로 미끄러졌다. 박중호가 고개를 들었다. 무전기가 손에서 빠져나가 피트 바닥에 떨어졌다.

굉음이 울렸다.

무전기 너머로 신우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박중호 검수팀장, 들리나. 박중호.”

응답은 없었다. 철제 덮개가 피트 바닥에 비스듬히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펜라이트 빛이 콘크리트 벽을 한 번 비추고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무전기에서 신우진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채널 4로 채널을 바꾸며 호출을 반복했다. 응답은 없었다.

무정차 통과7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