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76화
야간 당직자와 통화를 마친 이지원이 휴대폰을 내렸다.
“오전 9시부터 접근 가능합니다. 폐기 신청은 아직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신우진이 대기실 의자에서 일어났다. 등받이에 걸쳐둔 작업복을 집어 들었다.
“다행이군요.”
“관리실에 증거 보전 요청 공문을 팩스로 넣었습니다. 감사실 직인 날인까지 마쳤고요.”
한경숙이 복도 쪽에서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서보관실 쪽은 정리된 거야.”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전 9시에 열립니다.”
“그럼 지금은 여기서 할 일을 하자.”
한경숙이 중환자실 쪽을 바라봤다. 유리 너머로 박중호의 침상 옆 모니터가 일정한 간격으로 파형을 그리고 있었다.
신우진이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지원이 그 앞에 앉았다. 메모지에는 푸른 볼펜으로 두 줄이 적혀 있었다.
‘계약 TH-1987-04. 문서보관실 이관 전 개인 보관함 3번.’
이지원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 글씨예요.”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지원이 메모지를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고 출력물을 집었다. 문서보관실 이관 기록이었다.
“TH-1987-04는 1997년 12월 18일자 계약 번호입니다. 아버지 보고서가 상신된 날짜와 일치해요.”
“개인 보관함은.”
이지원이 잠시 생각했다.
“아버지 퇴직 후에도 집에 개인 서류함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후에 정리하면서 창고로 옮겼고요. 보관함 번호까지 확인한 적은 없습니다만.”
“위치는.”
“옛 거주지 창고입니다. 제 명의로 되어 있어서 접근에는 문제없습니다.”
신우진이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오전 9시 12분.
“문서보관실 열리는 9시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먼저 확인하십시오.”
이지원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기다리겠습니다.”
이지원이 대기실을 나섰다. 복도에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한경숙이 신우진 옆에 섰다.
“문서보관실 쪽은 내가 사람 붙여놨어. 9시 전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
“잘하셨습니다.”
신우진이 중환자실 유리 너머를 바라봤다. 간호사 한 명이 박중호의 링거를 교체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21분. 이지원은 아버지의 옛 거주지 창고 앞에 서 있었다.
단독주택 뒤편에 붙은 조립식 창고였다. 슬라이딩 도어의 자물쇠는 오래된 번호식이었다. 이지원이 네 자리 숫자를 돌렸다. 어머니 생일이었다. 자물쇠가 열렸다.
문을 밀자 먼지 냄새가 났다. 안쪽 벽면을 따라 플라스틱 선반이 세워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골판지 상자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상자마다 마스킹 테이프로 분류명이 붙어 있었다.
‘1996-1998 검수 기록.’ ‘철도안전법 시행령 개정 자료.’ ‘TH-1987-04 관련.’
이지원이 세 번째 상자를 선반에서 내렸다. 바닥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걸림식 서류철 세 권과 비닐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서류철 등뼈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지원이 가장 아래쪽 서류철을 꺼냈다.
표지 안쪽에 손글씨가 있었다.
‘계약 TH-1987-04 검토. 1997.12.18. 부품검수과장 배상호 반려. 원본 별도 보관 — 개인 보관함 3번.’
서류철을 넘기자 걸려 있던 서류 한 장이 튀어나왔다. 이지원이 집어 들었다.
1997년 12월 18일자 ‘부품 적합성 검토 보고서’ 원본이었다. 하단에는 붉은 글씨로 ‘반려’라고 찍혀 있었고, 그 옆에 배상호의 서명이 있었다.
보고서 내용은 명확했다.
‘B4 계열 제동밸브 인장강도 측정 결과, 기준치 대비 2.1N 저하됨.’ ‘중량 0.6g 차이 확인됨 — 패킹 재질 EPDM이 아닌 HNBR로 추정됨.’ ‘계약 TH-1987-04에 따라 납품된 1차 물량 전수조사 필요.’
이지원이 손을 멈췄다.
전수조사 필요. 1997년 12월 18일. 아버지는 그날 이 보고서를 상신했고, 배상호는 반려했다. 아버지는 8일 뒤 전보됐다.
현재 문제가 된 부품의 불량 수치와 정확히 같은 2.1뉴턴이었다.
비닐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내부 메모지 7장이 접힌 채 들어 있었다. 윤태호의 구매처 과장 시절 직통 회선 번호, 시험 성적서 재발급 요청 건, 계약 TH-1987-04의 수의계약 전환 사유서 사본.
각각의 메모지 좌측 하단에는 이철호의 사인이 있었다.
이지원이 상자 뚜껑을 덮고 일어났다. 서류철과 비닐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가방 지퍼를 닫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창고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휴대폰을 꺼내 신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울리자 받았다.
“확인하셨습니까.”
“찾았습니다. 1997년 아버지 보고서 원본입니다. 2.1뉴턴. 패킹 재질 치환까지 동일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우진이 말했다.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이지원이 창고 앞에 주차해둔 차량의 문을 열었다. 가방을 조수석에 올려놓고 시동을 걸었다. 계기판 시계가 10시 48분을 가리켰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에 올랐다. 백미러에 창고가 작아졌다. 이지원은 핸들을 꺾으며 앞만 바라봤다. 가방 속 서류철의 무게가 오른쪽으로 쏠려 있었다.
차량기지 검수실. 오전 11시 12분.
최명식이 모니터 앞에서 게임 클라이언트를 종료했다. 화면이 꺼지자 검은 반사면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길드원 '칼날여우'와의 대화 로그를 USB에 옮겨 담고, 본체 옆면에 붙여둔 메모지를 떼어냈다.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빨랐다.
한국철도병원 대기실. 신우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최명식'이라고 떴다.
“어.”
“형, 나 지금 검수실인데… 게임 길드원한테 어젯밤에 들은 얘기가 있어요.”
최명식의 숨소리가 가빴다. 신우진은 벽 쪽으로 두 걸음 옮겼다.
“정치 자금 쪽인가.”
“어, 어떻게… 아, 됐고. 대한정밀 내부 서버에 암호화된 회계 장부가 있어요. 칼날여우 말로는 지난 지방선거 때 후원한 캠프 자금 흐름이 전부 기록돼 있대요. 파일 위치랑 암호화 방식까지 알고 있대요.”
“네 길드원이 그걸 왜 알고 있지.”
“원래 대한정밀 경리팀이었대요. 작년에 짤렸대요. 보복성 해고라고 노동위에 제소해놓은 상태고.”
신우진은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박중호의 금고에서 찾은 20년 전 이철호의 메모 바로 옆에 볼펜을 댔다.
“서버 위치.”
“물류창고 B동 지하 2층 전산실. 회계팀 서버 따로 있고, 거기 '프로젝트T' 폴더 안에 암호화 파일이에요. 확장자는 .enc, 비밀번호는 유동식 OTP인데… 칼날여우가 예전에 백업하던 습관이 있어서 복호화 키파일을 개인 클라우드에 숨겨뒀대요.”
신우진이 메모지에 적었다. 볼펜이 서른세 번째 줄을 그었다.
“대가.”
“예?”
“네 길드원이 이 정보를 주는 대가.”
수화기 너머로 최명식이 숨을 한 번 들이켰다. 키보드 소리가 났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손놀림이었다.
“…노동위 제소 건에 감사실 내부 자료를 하나 인용하고 싶대요. 자기 해고가 부당하다는 증거로.”
“감사실 자료?”
“네. 대한정밀 납품 비리 감사 과정에서 확보한 구매처 압력 증거요. 그게 자기가 짤린 이유랑 연결된다고.”
신우진은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지원 감사관에게 확인하겠다. 가능한 범위만.”
“형.”
최명식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칼날여우는 발각되면 진짜 위험해져요. 작년에 해고된 뒤에도 협박 편지 받았대요.”
“알고 있다.”
신우진은 전화를 끊고 바로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오후 1시 47분. 이지원이 감사원 특별감사반 임시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
네 개의 파일을 나란히 펼쳤다. 왼쪽부터 9년 전 박중호 보고서 사본. 20년 전 이철호 보고서 원본. 10년간 KD-2037 계열 검수 기록 대조표. 그리고 신우진이 오전에 전화로 전달한 회계 장부 위치 정보 요약본.
권오중 감사관이 맞은편에서 파일들을 훑으며 손가락으로 연결선을 그렸다.
“1997년 12월 윤태호 구매처 과장의 최초 계약 승인. 1998년 2월 이철호 보고서 반려. 2009년 박중호 보고서 반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동일한 인장강도 2.1뉴턴 감소 반복.”
권오중이 마지막 파일을 집어 들었다.
“회계 장부는 납품사 서버에 있다?”
“네. 물류창고 B동 지하 2층 전산실입니다. 제보자가 복호화 키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보자 신원은.”
“대한정밀 전 경리팀 직원. 노동위원회 부당해고 구제 신청 중입니다. 감사실 자료 일부를 증거로 인용하는 조건으로 협력했습니다.”
권오중이 이지원을 바라봤다. 시선이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올라갔다.
“감사실 자료 제공은 내 승인이 필요합니다.”
“검토해주십시오.”
권오중은 대답 대신 서류 묶음의 맨 아래쪽을 집었다. 철도안전법 시행령 부칙 사본이었다.
“여기 보존 책임 조항 보셨습니까.”
“검토했습니다만.”
“‘사업주는 부품 시험 성적서를 해당 부품의 교체 주기 종료 시까지 보존한다’. 이 ‘종료 시까지’가 애매합니다. 폐기된 부품은 주기가 종료된 건지, 아니면 같은 계열 후속 부품까지 이어지는 건지.”
“그게 쟁점이 될까요.”
“청문회에서 윤태호 측 법률대리인은 반드시 이 모호함을 파고들 겁니다. 20년 전 보고서의 증거 능력 자체를 흔들겠죠.”
이지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정부청사 별관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보존 의무의 해석에 관한 감사실의 입장을 정리하겠습니다. 청문회 전까지.”
권오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청문회 일정은 다음 주 수요일로 확정됐습니다. 이 증거 체인을 오늘 중으로 최종 등록하세요.”
“지금 병원으로 가서 최종 등록본을 전달하겠습니다.”
이지원이 파일들을 정리하며 챙겼다. 표지에 증거 체인 번호를 적었다. 'EVD-CHAIN-076-01'. 네 줄의 증거가 하나의 번호로 묶였다.
한국철도병원 중환자실. 오후 5시 23분.
신우진이 병실 앞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박중호의 사고 현장 수습 기록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수습 기록은 사고 당일 차량기지에 출동한 안전관리팀이 작성한 1차 보고서였다. 선로 번호, 온도, 케이블 상태가 표로 정리돼 있었다.
신우진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현장 사진 네 장. 그중 세 번째 사진—검수 피트 입구를 촬영한 이미지—구석에 작업화 한 켤레가 찍혀 있었다.
신발 주인은 프레임 밖이었다. 보고서 본문에는 작업자 1명만 현장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박중호.
신우진은 기록의 '현장 출입자' 항목을 다시 확인했다.
박중호 외, 추가 서명 없음.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나왔다.
“의식 찾으셨어요. 아직 말은 못 하시고요. 안정이 먼저니까 오래 계시면 안 됩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박중호의 얼굴에 반창고가 여러 겹 붙어 있었다. 눈이 반쯤 열렸다. 동공이 천천히 신우진을 따라 움직였다.
“다음 주 청문회다.”
박중호의 오른손 검지가 침대 시트 위에서 살짝 올라갔다 떨어졌다. 대답을 대신하는 손짓이었다.
신우진은 병실 탁자 위에 증거 체인 요약본 사본을 올려두었다. 박중호의 눈이 그쪽으로 천천히 향했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지원이었다. 손에 든 파일 표지에 'EVD-CHAIN-076-01'이라고 적혀 있었다.
“증거 체인 최종 등록했습니다. 청문회는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신우진이 사진을 가리켰다.
“사고 현장에 박중호 혼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지원이 사진을 들여다봤다. 구석의 작업화.
“보고서에는 1명이라고 돼 있습니다.”
“작업화가 한 켤레 더 있다.”
이지원이 사진을 파일 위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군가 현장에 있었고, 사고 직후 사라졌다면….”
“의도적 방치일 가능성이 있다.”
신우진이 사고 기록을 접었다. 병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박중호의 눈이 다시 감겼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입은 아직 닫혀 있었다.
신우진이 이지원에게 물었다.
“윤태호의 왼쪽 턱 흉터에 대해 아는 게 있나.”
“7년 전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관리직이 윤태호였습니다. 그 이후로 흉터가 생겼고요.”
“공식 기록은.”
“없습니다. 사고 조사 보고서에 흉터 관련 기술은 전무합니다.”
신우진은 탁자 위의 증거 체인 파일을 집어 들었다. 네 줄 증거가 한 권으로 묶인 무게감이 손에 전해졌다.
“다음 주 청문회에서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한다.”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병실 안에는 인공호흡기의 규칙적인 신호음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