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77화

서재의 공기는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먼지와 풀, 그리고 시간이 삭힌 잉크의 비릿한 향이 뒤섞여 있었다.

이지원은 현관에 선 채로 잠시 숨을 골랐다. 낡은 단독주택의 공기는 차고 습했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 열지 않은 골판지 상자 세 개가 쥐어져 있었고,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저렸다.

단독주택 뒤편 조립식 창고에서 찾은 골판지 상자 세 개가 서재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상자마다 마스킹 테이프에 '1997년 업무자료', '1998년 1~6월', '개인기록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펜글씨로 적은 글씨체는 서툴지만 반듯했다. 이지원은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지막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골판지 특유의 퀴퀴한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맨 위에는 공단 표준 서식의 문서철이 놓여 있었다. 푸른색 표지가 바랜 종이 위에 단정하게 얹힌 상태였다. 표지에 '시험 성적서 검토 의견'이라는 제목이 펜글씨로 쓰여 있었다.

글씨체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약간 오른쪽으로 기운 각진 글자였다. 이지원의 손가락이 표지를 넘겼다. 종잇장의 감촉은 얇고 건조해서 작은 소리만 내도 찢어질 듯했다.

첫 페이지부터 아버지의 메모가 빽빽했다. 검은색 펜과 연필 필기, 때로는 빨간색 유성펜까지 동원되어 있었다. 글자 사이로 여러 차례 수정된 흔적이 종이에 배어 있었다.

'B4 계열 제동밸브 — 납품사: 대한정밀(현 대정밀) — 인장강도 기준치 18.5N 대비 실측치 16.4N'

손끝이 멈췄다. 그녀는 그 숫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16.4뉴턴.

현재 문제가 된 부품에서 신우진이 측정한 수치와 정확히 같았다. 차이는 2.1뉴턴. 그녀의 숨이 잠시 멎었다.

이지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떨리는 손으로 가방 안을 더듬었다. 이지원은 가방에서 현재 검수 기록 출력본을 꺼냈다.

표지에 'EVD-CHAIN-076-01'이라고 적힌 파일이었다. 탁자 위에 두 문서를 나란히 펼쳤다. 형광등 아래에서 두 종잇장의 경계가 짙은 그림자로 갈라졌다.

왼쪽은 1997년 12월 4일자 대한정밀 시험 성적서 사본이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오른쪽은 올해 3월 검수에서 적발된 동일 부품의 실측 기록. 아직 새 종이 냄새가 남아 있는 출력물이었다.

부품 번호: B4-BV-2287.

인장강도 결손: 2.1뉴턴.

패킹 재질: HNBR(규격은 EPDM).

이지원은 손가락으로 한 항목씩 짚으며 읽어 내려갔다. 두 문서 사이의 20년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지원의 손이 성적서 하단의 결재란을 짚었다.

검토자: 이철호.

아버지의 이름이 거기 있었다. 잉크는 조금 번져 있었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결재란 옆에 연필로 작게 적힌 메모가 있었다. 연필심이 닳아 얇아진 필체로, '시험 성적서 발행일과 실제 시험일 간 18~22일 차이 발생. 소급 작성 의심.'이라는 문장이 빼곡하게 써 있었다.

현재 검수 기록의 조작 패턴과 동일했다. 시험일보다 3주 늦은 발행일. 인장강도 2.1뉴턴 부족.

동일한 패킹 재질 치환. 이지원은 출력본을 손으로 짚었다. 종이가 바르르 떨렸다.

20년 동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로트번호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지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조금 저렸다. 서재 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공단 정복을 입은 젊은 검수원의 얼굴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20년 전에도 바로 이 결함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이지원의 가슴 어딘가를 천천히 죄어왔다.

손에 든 성적서 원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손을 허벅지 옆으로 붙여 떨림을 눌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성적서를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휴대폰을 꺼내 신우진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한 번 울릴 때마다 서재가 조금씩 더 조용해지는 듯했다.

“신우진입니다.”

이지원은 수화기를 한 번 꽉 쥐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서재에서 20년 전 성적서 원본을 찾았습니다. 부품 번호와 결함 패턴이 현재와 동일합니다. 인장강도 2.1뉴턴 부족, 패킹 재질 HNBR 치환, 시험일 대비 3주 지연 발행까지.”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주 짧았지만 무거운 멈춤이었다.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이지원이 주소를 불렀다. 통화가 끊겼다.

그녀는 성적서 원본을 조심스럽게 파일에 끼웠다. 손가락이 아버지의 연필 메모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스쳤다. 종이 위로 아버지의 손끝이 지나갔을 그 자리를 그녀의 손가락이 더듬었다.

서재 창밖으로 저녁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창틀을 따라 얇은 주황색 선을 그렸다.

다음 날 아침 7시, 신우진은 이지원 아버지의 옛 서재 문 앞에 섰다. 아침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골목길을 지나 온 그의 코트 자락에는 습기가 배어 있었다.

이지원이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눈 밑에는 얕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친 얼굴이었다.

신우진은 서재 안으로 들어서며 벽면을 한 번 훑었다. 공단 정복을 입은 중년 사내의 사진이 정면에 걸려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제습기와 작은 서랍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문서철 한 권과 파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군가 정리해둔 흔적이 역력했다.

이지원이 손가락으로 성적서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문서 위에서 살짝 정지했다.

“이겁니다. 아버지가 개인 보관함에 넣어두셨던 거예요.”

신우진이 상체를 숙여 문서를 들여다봤다. 부품 번호 BPC-2287-20. 시험 항목은 인장강도.

측정치가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기준치보다 2.1뉴턴 아래였다. 그는 손끝으로 그 동그라미를 따라가며 천천히 확인했다.

“패킹 재질.”

이지원이 문서 하단을 짚었다.

“HNBR. 규격은 EPDM인데.”

신우진이 자신의 태블릿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달 4번 선로 정비 교체 목록을 띄웠다. 동일 부품 번호 옆에 '로트번호 KD-2037-114'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화면을 확대하며 손가락으로 표시된 부분을 두드렸다.

“20년 동안 로트번호만 바꿔서 유통된 거다.”

이지원이 태블릿 화면과 아버지의 성적서를 번갈아 바라봤다.

“조작된 시험 성적서로 신규 로트 등록을 반복한 거군요.”

신우진이 태블릿을 조작해 비파괴 검사 코멘트를 띄웠다. '표면 미세 균열 의심, 교체 권고.'

이지원은 그 문구를 한참 들여다봤다. 시선이 한 글자씩을 짚으며 이동했다.

“균열은 인장강도 2.1뉴턴 감소의 결과인데, 기록에는 안 잡혔군요.”

“측정치가 아니라 권고로만 남겼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지만 그 안에 단단한 무언가가 박혀 있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탁자 위의 성적서 원본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아주 오래된 종이 특유의 유광이었다.

“1997년 계약 TH-1987-04 관련 문서들은.”

신우진이 물었다.

이지원은 상자 바닥에 깔린 골판지를 들어 올렸다. 상자의 바닥이 드러나자 오래된 공기의 퀴퀴한 밀도가 더 짙어졌다.

“아직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걸 찾았어요.”

그녀가 들어 올린 것은 얇은 가죽 수첩이었다. 표지는 짙은 갈색,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오래도록 손에 쥐고 다닌 흔적이 표지 곳곳에 스며 있었다.

“성적서 밑에 깔려 있었습니다.”

신우진이 시선을 수첩으로 옮겼다.

이지원이 페이지를 넘겼다. 연필로 빽빽히 적은 검수 현장의 수치와 약어들이 줄지어 있었다. 종잇장 사이사이로 접힌 자국과 낡은 얼룩이 어른거렸다.

뒷부분에서 글씨가 멈췄다. 나머지는 모두 여백이었다. 그 여백 한가운데에 한 줄이 박혀 있었다.

한 줄만 남아 있었다.

'시행령 부칙 제12조 3항 보존 책임 — 모호.'

그 아래 다른 필기구로, 볼펜으로 덧쓴 흔적. 잉크의 색이 약간 더 짙었다.

'누가 보존하는가 vs 누가 책임지는가.'

이지원이 수첩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시험 성적서는 납품사가 보존하는 게 원칙이에요. 하지만 이 조항은 책임 소재를 발주처와 납품사 어느 쪽에 두는지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버님은 20년 전에 그 틈을 발견한 거다.”

“그 모호함이 지금까지 이어졌고요.”

이지원의 목소리가 한 겹 낮아졌다. 손가락이 수첩의 표지를 짧게 눌렀다가 떼어졌다.

“윤태호는 그 위에 20년을 쌓아 올렸다는 뜻이 됩니다.”

신우진은 대답 대신 태블릿 화면을 닫았다. 성적서 원본과 수첩, 그리고 자신의 검수 기록이 탁자 위에 나란히 놓였다. 20년 전의 조작, 현재의 균열, 그 사이를 메운 법적 모호함. 서로 다른 시간이 한 평면 위에 겹쳐졌다.

“증거는 충분하다.”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신우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수첩은 당신이 직접 보관해.”

이지원이 끄덕였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23분.

그녀는 수첩을 집어 들고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모호.'

공적인 책임이 존재하지 않으면 부품은 영원히 결함인 채로 납품된다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20년 전에 마주하고도 넘지 못한 그 칸막이의 정체였다.

이지원이 수첩을 덮었다.

무정차 통과7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