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78화
신우진이 서재 문을 닫았다.
탁자 위에는 성적서 원본이 펼쳐져 있다. 이지원은 의자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다. 손가락은 트랙패드 위에서 멈춘 채.
“여기.”
이지원이 모니터를 돌렸다. 현재 검수 기록 스프레드시트가 떠 있다. 부품 번호 칸에 커서가 깜빡인다.
신우진은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탁자 앞으로 다가서자 성적서의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20년 묵은 먼지와 잉크의 혼합.
상체를 숙였다.
성적서 상단의 부품 번호: KB-447. 제동밸브. 인장강도 시험 항목. 측정값 16.4뉴턴.
신우진이 태블릿을 꺼내 검수 기록을 열었다. 같은 부품 번호가 검색창에 입력되어 있었다. 현재 규격 기준값 18.5뉴턴. 실제 측정값 16.4뉴턴.
차이는 2.1.
신우진이 손가락으로 성적서의 수치를 짚었다.
“20년 전에도 2.1이었다.”
이지원이 성적서 하단을 가리켰다. 패킹 재질 란. HNBR이라고 찍혀 있다.
“EPDM이어야 합니다. 설계 기준이 그렇고요.”
“지금 것도 HNBR이다.”
이지원이 노트북에서 다른 파일을 열었다. 9년 전 박중호의 보고서 스캔본.
세 번째 문서에서도 같은 재질과 동일한 수치가 반복된다.
신우진은 가방에서 보고서 사본을 꺼냈다. 출력한 지 하루가 지나 종이 모서리가 약간 말려 있었다.
성적서. 보고서. 검수 기록.
탁자 위에 가로로 나란히 펼쳤다.
1997년 12월. 대한정밀 시험 성적서. 인장강도 16.4N. 패킹 HNBR.
2015년 3월. 박중호 품질 의혹 보고서. 동일 부품 계열. 동일 패킹 치환 의심. 인장강도 2.1N 부족.
2024년 10월. 신우진 검수 기록. KB-447 제동밸브. 측정값 16.4N. HNBR 확인.
이지원이 일어섰다. 디지털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사진을 찍었다. 세 문서가 한 프레임 안에 잡혔다.
신우진은 문서 사이의 빈 공간을 응시했다. 20년의 간극이 80센티미터 탁자 위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같은 부품 번호. 같은 결함. 같은 수치.
이지원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노트북으로 돌아가 엑셀 파일을 열었다. 행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 연도 | 문서 | 부품 번호 | 인장강도 | 패킹 | 차이 | |------|------|-----------|----------|------|------| | 1997 | 성적서 | KB-447 | 16.4N | HNBR | -2.1N | | 2015 | 보고서 | KB-447 계열 | 16.4N | HNBR | -2.1N | | 2024 | 검수기록 | KB-447 | 16.4N | HNBR | -2.1N |
탁자 위의 커피가 식어 있었다. 이지원이 마지막 행을 입력하고 엔터를 쳤다.
“감사원 제출용 대조표입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미소였다.
“20년 동안 같은 부품이 같은 방식으로 납품됐다. 증명할 수 있다.”
이지원이 저장 버튼을 눌렀다. 파일명: DOCCHAIN1997_2024.xlsx.
밤 10시 12분.
신우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최명식이라 떴다.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저예요.”
최명식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배경에서는 차량기지 실내의 낮은 기계음이 들렸다.
“말해.”
“그 게임 길드원 있잖아요.”
신우진은 듣기만 했다. 탁자 건너편에서 이지원이 노트북을 조용히 접었다.
“대한정밀 본사 지하에 문서고가 있대요. B동 지하 2층. 2018년부터 지금까지 시험 성적서 원본이 거기 다 보관돼 있다고.”
최명식이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보관함 번호는 B-12. 제가 확인했어요. 걔가 작년에 서류 정리하다가 직접 봤대요.”
“길드원은 누구냐.”
잠시 침묵.
“……납품사 직원이에요. 작년부터 제가 정보 받고 있었습니다.”
최명식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변명을 하듯 말이 빨라졌다.
“처음엔 별 얘기 아니었는데 지난봄부터 B4 부품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선배님께——”
“안다.”
신우진이 말을 끊었다. 창밖은 어두웠다. 서재 밖 골목길에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잘했다.”
최명식이 말을 잇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침묵.
신우진이 말을 이었다.
“그 직원은 지금 안전하냐.”
“아직은요. 근데 감사원이 들이닥치면——”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라. 길드원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네.”
“정보는 쓴다.”
신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열어 방금 들은 내용을 메모했다.
“대한정밀 지하 문서고 B-12.”
“감사원에 전달한다.”
이지원이 시계를 봤다. 밤 10시 16분.
“내일이면 청문회까지 정확히 5일입니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 세 문서를 정리했다. 성적서 원본을 가장 위에 올렸다.
“지금은 여기까지다. 이 문서들은 이 방에 둔다.”
이지원이 끄덕였다.
다음 날. 오전 8시 10분.
윤태호의 집무실.
법무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감사원 발송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미 개봉된 상태였다.
“감사원 특별감사 착수 통보입니다.”
윤태호가 손을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 내용물을 꺼냈다. 공식 공문. 수신인은 기관장 앞으로 되어 있었다.
공문 하단을 곧바로 확인했다.
감사 범위: 2015년~현재 부품 납품 계약 전반 및 시험 성적서의 진위 여부.
윤태호의 시선이 몇 초 동안 그 줄에 머물렀다.
“속도가 빠르군요.”
“예상보다 나흘 빠릅니다. 감사원 내부에서 패스트트랙으로——”
“법적 방어 논리.”
윤태호가 공문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왼쪽 턱선을 짧게 스쳤다.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법무팀장이 태블릿을 열었다.
“문서의 시간적 연속성이 가장 큰 공격 포인트입니다. 1997년 보고서는 이관 기록이 소실됐고, 2015년 보고서는——”
“문서 체인의 신뢰성을 흔들라는 겁니다.”
윤태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20년 전 문서가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존됐다는 증거는 누가 제시하겠습니까. 이관 과정의 공백. 담당자의 퇴직. 보존 연한. 물리적으로 문서의 동일성을 입증하는 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법무팀장이 빠르게 메모했다.
“감사원장님. 문서고 쪽은——”
“지금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윤태호가 돌아섰다.
“감사원이 이미 현장 봉인 절차를 준비 중일 겁니다. 우리가 서류를 옮기다 적발되면 그 자체가 증거입니다.”
“그럼 법적 대응만으로——”
“지금부터 청문회까지입니다.”
윤태호가 책상으로 돌아왔다. 공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가락으로 감사 범위 조항을 따라 읽었다. 2015년부터다.
20년 전은 제외됐다.
“적어도 1997년은 그들이 스스로 범위에서 뺐습니다. 그걸로 시작하죠.”
법무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청문회 전략 회의를 오전 10시로 잡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법무팀장이 퇴실했다.
윤태호는 잠시 서 있었다. 왼손 약지의 금색 인장 반지를 오른손 엄지로 돌렸다. 느리게, 한 번.
그는 공문을 서랍에 넣었다. 책상 위에는 감사원 봉투만 남았다. 찢어진 개봉면이 위를 향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9시.
차량기지 정문 앞.
흰색 감사원 차량 한 대가 정문을 통과했다. 뒷좌석에서 김정환 감사관이 내렸다. 50대 중반. 옅은 회색 양복에 검은 안경을 썼다.
뒤따르던 감사관 2명이 노트북 가방을 짊어지고 차에서 내렸다. 현장 검증팀이었다.
신우진과 이지원이 정문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정환이 다가왔다. 신우진이 서류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문서 대조표입니다.”
김정환이 봉투를 열었다. A4 용지 세 장. 엑셀로 정리한 표였다. 세 줄이 강조되어 있었다.
1997. 2015. 2024.
같은 부품. 같은 수치. 같은 결함.
김정환의 시선이 표의 마지막 열에 머물렀다. 인장강도 차이: -2.1N.
표정이 굳어졌다.
“2015년이 아닙니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낮았다.
“20년 전부터의 기록입니다, 감사관님.”
김정환이 뒤를 돌아봤다. 검증팀 두 명이 이미 노트북을 열었다.
“현장 검증 모드입니다, 팀장님.”
김정환이 봉투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감사원 차량에서 또 한 명이 내렸다. 촬영 장비를 든 기록관이었다.
이지원이 서류 가방을 들어 올렸다. 안에는 20년 전 성적서 원본이 봉인된 상태로 들어 있었다.
김정환이 입을 열었다.
“본부장실부터 시작합시다.”
신우진이 앞장섰다. 행정동 방향으로 걸었다. 김정환의 구두 소리가 뒤를 따랐다.
기록관의 카메라가 작동을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