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79화

오후 4시.

대한정밀 본사 집무실. 윤태호가 탁자 위 공문을 법무팀장에게 밀었다.

“읽어보셨습니까.”

법무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으로 세 번째 문단을 짚었다.

“감사 범위는 2015년부터 현재까지입니다. 명시적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윤태호가 의자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1997년은 제외됐고, 9년 전 자료는 2009년이지만 2015년 이후 부품과 동일한 수치라고 하더군요. 우리 쪽 검토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법무팀장이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는 청문회 대응 전략 초안이 반쯤 짜여 있었다.

“시간적 간극을 공격 포인트로 삼아야 합니다. 1997년 성적서는 아버지가 개인 보관한 문서고, 9년 전 보고서는 이미 은폐 의혹으로 신뢰성에 금이 간 자료입니다. 현재 검수 기록은 원본이 이미 삭제돼 사본만 남은 상태.”

“연속성이 깨졌군요.”

“그렇습니다. 세 문서 사이에 물리적·법적 인과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감사원 청문회에서는 이 점을 집중 파고들 생각입니다.”

윤태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딱, 딱.

“증인 신뢰성은.”

노트북에서 페이지가 넘어갔다. 법무팀장이 요약된 인물 목록을 읽었다.

“신우진 검수주임의 사진 속 작업자 주장은 본인 외 목격자가 없습니다. 이지원의 1997년 문서는 상속된 유품. 박중호의 보고서는 9년간 사장됐다가 사고 직후에야 등장했죠. 세 증인 모두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아닙니다.”

윤태호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올라갔다.

“그 논리, 청문회에서 직접 꺼내실 겁니까.”

“네. ‘이 문서들이 정말로 20년간의 연쇄적 부품 결함을 증명합니까, 아니면 우연히 모인 파편들을 후행적으로 연결한 것입니까’. 청문위원 중 기술 배경이 약한 위원이면 충분히 먹힐 논리입니다.”

법무팀장이 파일 하나를 닫고 새 문서를 열었다.

“추가로 부칙 제12조 3항의 보존 책임 조항이 모호하다는 점도 활용하겠습니다. 이철호 전 검수원의 수첩에 같은 지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상대가 내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집으십시오.”

“이미 초안에 들어 있습니다.”

윤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도심 전경이 유리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한 가지 더. 이지원이 완성한 대조표. 저게 시각적으로는 강력하겠지만, 엑셀 파일은 누구나 만들 수 있습니다. 원본 성적서와 대조표 사이의 검증 단계를 문제 삼으십시오.”

법무팀장이 타이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공증 절차가 없었군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대표님.”

법무팀장이 노트북을 닫으며 일어섰다. 공문 사본과 메모지를 함께 챙겼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최종 전략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청문회 전 리허설도 한 번 잡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윤태호는 잠시 서서 유리창을 바라봤다. 왼손 약지의 금색 인장 반지를 오른손 엄지로 한 번 돌렸다.

다시 책상으로 걸어와 인터폰을 눌렀다.

“비서실장님, 잠시 들어오시죠.”

약 40분 뒤.

비서실장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50대 초반, 얇은 금속테 안경을 쓴 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손에 업무용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윤태호가 소파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자신은 맞은편에 앉았다.

“프로젝트T 장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비서실장이 태블릿을 켰다. 내부 문서 관리 시스템 화면이 떠올랐다.

“물류창고 B동 지하 2층 전산실입니다. 서버실 안쪽 별도 락커에 보관 중.”

“오늘 중으로 옮기십시오.”

윤태호의 손가락이 집무실 벽 쪽 금고를 가리켰다. 회색 철제 문짝이 책장 옆에 붙어 있었다.

“장부 원본은 제 개인 금고로. 디지털 사본은 암호화해서 외부 서버 두 곳에 분산하십시오. 국내 한 곳, 해외 한 곳.”

비서실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호화 키는.”

“단독 생성입니다. 당신만 알고 있으십시오.”

“알겠습니다. 전산실 이관 기록은.”

“남기지 마십시오.”

비서실장의 손가락이 태블릿을 두 번 탭했다. 화면이 꺼졌다.

“이관 완료까지 세 시간 정도 보겠습니다. 완료 후 구두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 외 기록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 더.”

윤태호가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1997년 자료, 문서보관실 3서가. 저건 오늘 밤 중으로 확실히 처리하십시오.”

비서실장이 안경 너머로 윤태호를 바라봤다. 눈 깜빡임 한 번.

“문서 폐기 기록도 없이 말씀이십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감사원이 움직이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비서실장이 태블릿을 가방에 넣으며 일어섰다.

“장부 이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3서가는 그 직후.”

윤태호도 일어나 금고 쪽으로 걸어갔다. 회색 문짝을 열었다.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두 칸으로 나뉜 선반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들어오기 전까지 비워 두겠습니다.”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윤태호는 금고 문을 그대로 열어 둔 채 책상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 감사원 봉투를 집어 들었다. 찢어진 개봉면 사이로 공문의 첫 줄이 보였다.

<감사원 특별감사 착수 통보.>

봉투를 반으로 접어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길어지고 있었다.

오후 햇살이 길어지던 창밖 풍경이 어둑해지고, 차량 실내등이 켜졌다. 윤태호는 금고에 장부를 이관한 뒤 퇴근하는 길이었다.

차가 교차로를 지나 속도를 올렸다. 윤태호가 왼손 약지의 금색 인장 반지를 오른손 엄지로 돌렸다.

“김민혁 씨. 감사원 특별감사가 시작됐습니다. 확보된 문서 일부가 조작됐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 의혹이 정보원 03에게서 나온 것처럼 위장 메시지를 올려주십시오. 정보원 라인 내부에서 03을 향한 의심이 퍼지면 됩니다.”

김민혁의 호흡이 수화기에 닿았다.

“정보원 라인의 메시지 로그는 감사실 서버에 기록됩니다. 발신 계정이 노출됩니다.”

“관리자 계정으로 접근하십시오. 로그 추적에서 제외되도록 설정돼 있습니다.” 윤태호의 목소리는 공손했으나 끝음이 정확히 내려앉았다. “법무팀의 청문회 전략은 문서의 연속성 공격입니다. 20년 전 보고서의 보관 경로를 완벽하게 증명하기 어렵다는 취약점을 공략하죠. 그런데 내부 정보원들 사이에서 ‘일부 조작 의혹’이 불거진다면, 법무팀의 주장은 의혹이 아니라 합리적 의심이 됩니다. 발송 후 24시간 내로 관리자 로그를 삭제하고 계정 이용 기록도 말소합니다. 이지원 감사관은 청문회 준비로 밤을 새우고 있을 테니, 그 사이에 확인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김민혁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메시지 내용을 구체화하겠습니다.”

윤태호가 통화를 종료했다. 손은 무릎 위에 가만히 놓인 채, 차창 밖으로 퇴근 차량들의 미등이 흘러갔다.

밤 9시. 철도공사 감사실. 형광등 두 줄만 켜진 사무실에서 이지원이 노트북 화면 세 개를 띄워놓고 있었다. 20년 전 성적서 원본이 투명 봉인지 안에 놓여 있었고, 커피잔은 이미 식었다. 정보원 라인 채팅창에 새 메시지가 떴다.

정보원 05: 「03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감사원에 제출된 문서 중 일부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을 재구성한 거라고 하더라. 출처는 밝히지 않았어.」

이지원의 손이 멈췄다.

정보원 07: 「03이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대.」 정보원 05: 「직접 확인은 안 했어. 문서 중간에 작성 일자가 맞지 않는 게 있다더라.」

이지원이 의자를 똑바로 세웠다. 03은 묵묵부답이었고 마지막 활동 시각은 3분 전이었다. 이지원이 휴대폰을 들어 신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우진 주임님. 정보원 라인에 문서 조작 의혹 제보가 올라왔습니다. 제보자는 05, 출처는 03이라고 합니다. 05의 메시지에는 ‘사본을 재구성’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일반 현장 관계자가 쓰는 말이 아닙니다.”

“법무팀 용어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배경에서 금속 부품이 철판에 닿는 소리가 울렸다.

“네. 20년 전 성적서의 연속성을 공격하려면 문서 보존 경로가 취약하다는 논리를 써야 합니다. 그걸 청문회 직전에 흘린 겁니다. 오늘 오전 법무팀 전략 회의에서 ‘문서 연속성 부족’이 공격 포인트로 확정됐어요. 실무자 수준의 정보원이 같은 날 저녁에 입수해 유포할 개연성은 낮습니다.”

“문서 보존 경로는 우리가 다 추적했다.” 신우진이 말을 끊었다. “원본은 이지원 씨 아버지 서재에서 봉인 상태로 발견됐고, 9년 전 보고서는 박중호 금고에 있었으며, 현재 검수 기록은 차량기지 서버 로그로 증명된다. 사본을 재구성할 틈이 없다는 뜻이야.”

“열람 접근 기록도 확보했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라 전략이다. 05가 03을 겨냥하게 한 의도로, 정보원 라인 내부에 상호 불신을 주입하려는 거다. 정보원 라인 내부에서 감사실 서버 접근 권한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나.”

“일곱 명입니다. 관리자 계정은 별도 분리돼 있고, 로그 추적 제외 설정은 기본값입니다. 상위 감사 권한으로만 열람 가능한데, 지금 이 계정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 계정으로 지금 이 메시지를 유포했다면, 기록은 남지 않는다는 거다. 03은 함정에 걸려든 거고.”

이지원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채팅창에는 정보원 06이 문서 재검증 필요성을 제기했고, 09가 05에게 확인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혼란이 퍼지는 속도가 빨랐다.

“지금부터 정보원 라인 전원에게 공지를 띄우겠습니다. 신규 제보는 물리적 증거와 교차 검증 후 보고, 출처 불명 정보는 채널 유포 금지, 위반 시 보고 권한 정지.”

“정보원 라인 운영은 이지원 씨 권한이다.”

통화가 종료되자 이지원이 공지 초안을 열었다.

「금일 21시경 채널 내 유포된 문서 조작 의혹 제보는 출처가 교차 검증되지 않은 정보입니다. 신규 제보는 반드시 물리적 증거와 교차 검증 후 보고하십시오. 출처 불명 정보의 채널 유포는 금지되며, 위반 시 보고 권한이 정지됩니다. 향후 유사 사례 발생 시 즉시 채널을 폐쇄하고 별도 보고 체계로 전환합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노트북 중앙 화면 우측 상단에 보안 알림창이 떴다. 붉은 테두리.

「정보원 03 계정 비정상 접근 시도 — 차단됨」 「시각: 21:17:04」 「접근 IP: 192.168.41.※※※」 「시도 경로: 관리자 권한 우회 로그인 → 2차 인증 실패 → 자동 차단」

내부망 주소였다. 사옥 4층 서버실 구역. 누군가가 관리자 권한을 우회해 03 계정을 탈취하려 한 것이다. 가짜 메시지를 직접 발송할 의도였음을 의미했다. 이지원이 공지 초안 맨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추가: 금일 21시 17분 정보원 03 계정에 대한 비정상 접근 시도가 감지되어 시스템에서 차단되었습니다. 현재 정보원 라인 전 계정에 대한 보안 감사를 진행합니다.」

전송.

채팅창이 잠시 멈췄다가 메시지 확인 표시가 하나씩 떴다. 정보원 06이 확인을 알렸고, 07이 내부 소행인지 물었으며, 09가 특정 여부를 물었다. 이지원은 대답하지 않고 상세 로그를 열었다. 4층 서버실 야간 출입 권한 보유자는 세 명. 그중 한 명이 관리자 계정 접근 권한도 갖고 있었다.

오후 9시 19분. 청문회까지 엿새 남았다.

무정차 통과7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