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80화
이지원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왼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화면에는 세 개의 창이 떠 있었다. 1997년 이철호의 시험 성적서 사본. 2009년 박중호의 QC-2009-0031. 그리고 올해 3월에 적발된 B4-BV-2287의 납품 성적서. 세 문서를 병치한 것이다.
마우스를 세 번 클릭했다.
인장강도 수치에 붉은 박스가 겹쳐졌다. 16.4뉴턴. 셋 다 동일했다. 기준치 18.5뉴턴에서 2.1뉴턴 부족. 패킹 재질도 EPDM이 아닌 HNBR로 셋 다 일치했다.
시험일 대비 발행일 차이를 계산했다. 18일, 21일, 22일. 소급 작성 패턴이 20년 동안 3일 차이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지원이 새 문서를 열었다. 제목: 「시험 성적서 조작 계보 — B4 계열 제동밸브」
문서 하단에 부품 번호·로트번호·제조사 코드(DH)·금형라인(2A)을 시간순으로 배치했다. 1997, 2009, 2015, 2017, 2019, 2022, 2023. 일곱 개의 시점이 한 줄로 정렬됐다.
각 항목 옆에 증거 번호를 적었다.
TH-1997-044 옆에 '이철호 원본, 수첩 메모 교차 확인'. QC-2009-0031 옆에 '박중호 금고 보관본, 결재 반려 기록'. 2023년 성적서 옆에 '감사원 특별감사 제출 자료, 현장 검수 대조표 일치'.
문서를 닫기 전에 인쇄 버튼을 눌렀다. 프린터가 서너 장을 뱉어냈다.
시계는 오전 9시 47분이었다.
감사실 문이 열렸다. 신우진이 들어왔다. 형광 안전조끼 대신 짙은 남색 기능복 상의를 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 유성 매직이 꽂혀 있었다.
이지원이 인쇄물을 책상 위에 밀어 놓았다.
“「시험 성적서 조작 계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신우진이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오른손 검지가 각 연도를 짚으며 내려갔다.
“세 줄로 끝나는군요.”
“2.1뉴턴, HNBR, 시험일 역산. 세 가지가 20년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우진이 마지막 장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윤태호 사장님 측 법무팀이 집중 공격할 지점은 시간 간극입니다. 1997년에서 2009년까지 12년. 2009년에서 2015년까지 6년의 공백이지요.”
“문서 이관 기록 소실과 보존 연한을 근거로 들고 나올 겁니다.”
“박중호의 보고서가 묵살된 결재 라인을 넣자고요.”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까지?”
“본부장 김기환, 팀장 배상호. 두 이름으로 충분합니다.”
이지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계보 문서 하단에 결재 라인 항목이 추가됐다. 2009년 3월, 박중호가 상신한 QC-2009-0031이 본부장 김기환의 '품질 기준 재검토 필요' 사유로 반려된 기록. 그리고 팀장 배상호가 반려 의견에 서명한 날짜.
“추가했습니다.”
“그러면 2009년 보고서가 소멸된 이유가 단순한 보존 연한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 묵살이었다는 점이 문서상으로 입증되지요.”
“시간 연속성 공격에 대한 방어 논리로 쓸 수 있겠군요.”
신우진이 인쇄물을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이걸로 윤태호 사장님 측 첫 번째 방어선은 무력화됩니다.”
오전 10시 12분이었다.
노조 사무실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한경숙이 탁자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상대는 마흔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얇은 뿔테 안경을 썼고,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있었다. 검수원 출신이었다.
탁자 위에는 작년 가을에 한경숙이 접수했던 내부 제보서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B4 계열 부품의 교체 주기 조작과 시험 성적서 소급 발행에 대한 제보였다. 당시에는 물증 부족으로 노조 내부 보고에 그쳤다.
한경숙이 서류 봉투에서 인쇄물 세 장을 꺼냈다. 이지원이 작성한 조작 계보 요약본이었다.
“지금은 다릅니다.”
뿔테 안경의 남자가 인쇄물을 집어 들었다. 1997년 성적서와 2023년 성적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더니,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이게 진짜로 20년 동안 같은 부품이었단 말입니까.”
“수치로 증명됐습니다. 당신이 작년에 제보한 그 KD2037이 1997년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조작됐어요.”
“당시에는 증거가 없어서… .”
“이제는 있습니다. 문서 3대가 연결됐고, 감사원 특별감사도 착수됐지요.”
남자가 안경을 벗어 닦았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내가 증언하면, 회사에서 알게 됩니까.”
한경숙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증인 보호 절차를 감사실에 요청할 겁니다. 실명 공개 없이 증언하는 방식도 청문회 규정상 가능해요.”
“보복 인사는 ?”
“노조가 끝까지 책임집니다. 당신 혼자 나서는 게 아니에요. 이미 검수원 열두 명이 증언 참여에 서명했어요.”
남자가 인쇄물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으로 2009년 항목을 짚었다.
“이건 박중호 선배가 쓴 겁니까.”
“맞습니다. 지금은 병원에 계십니다.”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이름은 가명으로 해도, 내용은 내가 직접 본 것만 말하겠습니다.”
한경숙이 수첩에서 동의서 양식을 한 장 뜯어내 탁자 건너편으로 밀었다.
“여기에 서명해 주십시오.”
펜이 종이 위에서 짧게 갈리는 소리가 났다.
차량기지 정비고 사무실. 오후 2시 7분.
최명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숨을 약간 몰아쉬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였다.
신우진이 부품 검수 파일을 정리하다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
“게임 길드원한테 연락 왔어요. 대한정밀 내부 직원 있잖아요, 그쪽에서 마지막으로 정보 하나 더 줬습니다.”
최명식이 스마트폰 화면을 신우진 쪽으로 돌렸다. 채팅 로그였다.
「지하 문서고 B-12 말고 또 있어요. 본사 말고 별도 보관 창고. 거기에 시험 성적서 원본 진짜들이 보관돼 있어요. 조작하기 전 원본 데이터를 폐기 안 하고 보관해 둔 거예요.」
신우진이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위치는.”
“경기도 광주 쪽입니다. 물류창고 B동 지하 2층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프로젝트T 장부 쪽이고… .”
최명식이 대화창을 더 위로 스크롤했다.
“성적서 원본은 B동 바로 옆에 있는 소형 보관 창고 C동이래요. 내부 인원들도 잘 모르는 장소. 별도 출입 대장도 있고, CCTV는 외부로 분리돼 있다고 합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들어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식이가 성적서 원본 보관 창고 위치를 확보했다. 대한정밀 물류창고 B동 옆 C동. 조작 전 원본 데이터가 보관돼 있다고 한다.”
수화기 너머로 이지원이 대답했다.
“좌표를 문자로 보내주십시오. 감사실에서 김정환 감사관에게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이 정보면 압수수색 영장 청구 사유가 충분히 성립합니다.”
신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좌표 보내라.”
최명식이 대화창에서 주소를 복사해 신우진에게 전송했다. 손이 약간 떨렸다.
“선배님, 이게 마지막 퍼즐이죠?”
“그렇다.”
신우진이 휴대폰으로 이지원에게 좌표를 전송했다. 전송 완료. 오후 2시 21분이었다.
오후 4시 55분. 철도공사 감사실.
이지원이 서류 봉투 세 개를 테이블 위에 정렬했다. 각 봉투 겉면에 문서 목록이 인쇄된 라벨이 붙어 있었다.
제1호 증거: 3대 문서 체인 원본 및 시험 성적서 조작 계보.
제2호 증거: 박중호의 9년 전 보고서 및 결재 반려 기록.
제3호 증거: 증인 명단 — 현장 검수원 12인, 익명 제보자 1인 서명 완료.
김정환 감사관이 봉투를 하나씩 들어 접수 대장에 기록했다. 감사원 직인이 찍혔다.
“접수 완료됐습니다. 압수수색 영장은 이미 신청 들어갔습니다.”
“발부 예정 시점은 언제입니까.”
“내일 오전 중으로 나올 겁니다. 창고 위치 정보가 구체적이어서 심사가 빨랐습니다.”
이지원이 접수증을 받아 쥐었다. 종이가 얇게 떨렸다.
오후 5시 42분. 차량기지 정비고 사무실.
신우진이 청문회 자료 바인더를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목차를 한 장씩 넘겼다. 부품 검수 기록, 교차 대조표, 3대 문서 사본, 사고 조사 보고서 발췌본.
최명식이 옆에서 문서 페이지를 맞추며 스테이플러로 철하고 있었다.
팩스 기계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종이가 한 장 밀려 나왔다.
신우진이 용지를 집어 들었다.
「감사원 특별감사 제2024-0087호 관련 압수수색 영장 발부 통보」 「대상: 대한정밀 물류창고 C동」 「집행 일시: 내일 오전 8시」
신우진이 종이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영장 나왔다.”
최명식이 손을 멈췄다. 스테이플러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진짜 끝이 보이네요,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