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81화
병원 복도. 한경숙의 발걸음이 멎었다.
502호 문 앞.
손에 든 서류 봉투 — 현장 검수원 12인 서명 완료, 익명 제보자 1인 서명 추가. 총 13명.
문을 열었다.
박중호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오른팔은 깁스를 풀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상태.
눈이 마주쳤다.
“들어와.”
한경숙이 침대 옆 탁자 위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열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서명부 한 장. A4 용지에 이름과 소속이 빼곡했다.
“13명이다.”
박중호가 명단을 쓸어 읽었다. 손가락이 줄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12명. 아니다. 맨 밑에 한 명 더 있구나.”
“작년 제보자. 익명 조건으로 청문회 증언 동의했다.”
박중호의 시선이 멎었다. 손끝이 명단의 마지막 줄을 짚었다.
“서명 없는 놈이 제일 큰 걸 줬군.”
한경숙이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충전기 연결. 전원 켜짐.
“증언 정리할 양식, 내가 만들었다. 시기별로 부품 번호, 결함 내용, 목격 시점 순서.”
“보자.”
박중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깁스 푼 오른손으로 키보드를 당겼다. 손가락이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타이핑은 내가 할 테니 팀장님은 구술만.”
한경숙이 자판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중호가 명단을 다시 봤다.
“정비3팀 김영수. 2017년 5월쯤 B4 제동밸브 패킹 교체하다 이물질 혼입 발견했어. 당시 검수 보고서엔 ‘정상’으로 기재. 구두로 이의 제기했지만 기록 안 남았어.”
한경숙이 치기 시작했다. 키보드 소리가 병실에 가볍게 울렸다.
“계속.”
“정비4팀 이민호. 2019년 납품분 B4-BV-2287 인장강도 의심된다고 검수 거부 의사 밝혔어. 팀장이 덮었어. 그 팀장 작년에 퇴직.”
“이름 알 수 있나.”
“알지.”
박중호가 이름을 불렀다. 한경숙이 적었다.
문 열리는 소리.
최명식이었다. 한 손에 음료수 캔 세 개. 다른 손에 노트와 펜.
“오, 시작하셨네요. 여기 커피랑 녹차.”
캔을 탁자 구석에 내려놓으며 노트 필기 준비.
“명식아.”
“예.”
“너도 들어. 네가 본 것도 적어야 하니까.”
최명식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노트 펴고 펜 뚜껑 뽑았다.
“2015년 것부터 정리합시다. 그때 입사한 직원들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박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구술 시작.
오후 2시 40분.
문이 다시 열렸다.
신우진이었다.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이게 3대 체인 사본입니다.”
탁자 위에 펼쳤다. 20년 전 이철호 보고서, 9년 전 박중호 보고서, 현재 검수 기록. 나란히 정렬.
박중호가 세 문서를 번갈아 봤다. 입가가 굳어졌다. 손끝이 가운데 문서를 짚었다.
“QC-2009-0031.”
“그렇습니다.”
“본부장 결재 단계에서 막혔다. ‘품질 기준 재검토 필요’ 사유.”
“누가 반려했습니까.”
“김기환 본부장. 그 위에 배상호 팀장이 반려 의견 먼저 올렸다.”
신우진이 수첩을 꺼내 적었다. 볼펜이 종이를 빠르게 긁었다.
“당시 상황 전부 말씀해주십시오.”
박중호가 호흡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2009년 3월, 대한정밀 납품 부품 KD-2037 인장강도 시험. 16.4뉴턴 나왔다. 기준은 18.5. 부적합 판정으로 보고서 썼다.”
“결재 상신.”
“배상호한테 먼저 올라갔다. 이틀 뒤 ‘보완 필요’ 사유로 반송. 측정 데이터는 지우고 외관 검사만 다시 적어서 올리라고.”
“거부하셨죠.”
“원본 그대로 재상신. 배상호가 반려 의견 달아서 본부장한테 올렸다. 본부장이 ‘품질 기준 재검토 필요’ 쓰고 결재 거부. 그걸로 종결.”
“보고서 원본은.”
“내 금고다. 지금도 있다.”
신우진이 적던 손을 멈췄다.
“본부장 김기환. 현재 생존 확인됩니까.”
“작년까지 산업안전협회 고문으로 있었어.”
한경숙이 끼어들었다.
“찾을 수 있다는 거군.”
“주소는 모른다. 협회로 연락하면 될 거다.”
신우진이 서류 봉투 안에서 복사본 한 장을 더 꺼냈다. 인사 기록 발췌본. 2009년 당시 결재 라인이 도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 도표에 따르면 반려에서 종결까지 72시간.”
“그렇다. 그동안 논의 한 번 없었다. 문서만 두 번 오갔다.”
“충분히 의도적입니다.”
“당연하지.”
박중호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갔다.
“내용 검토할 시간조차 안 줬다. 처음부터 묻을 셈이었어.”
최명식이 필기하던 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다른 검수원들은요.”
“알고 있었다. 누구 하나 기록 남기진 못했지만.”
한경숙이 노트북 모니터를 돌렸다. 방금 정리한 증언 개요가 화면에 떴다.
“이번에 증언 서명한 12명 중 세 명이 2009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팀장님이 보고서 올린 것도, 묻힌 것도.”
박중호가 키보드를 당겼다. 직접 타이핑 시작. 속도는 느렸지만 오타 없이 정확했다.
“12명이 전부는 아니다. 현장에 있던 놈들 더 있다. 연락 돌려.”
한경숙이 휴대폰을 꺼냈다.
“노조 연락망으로 가능합니다. 오늘 밤까지 추가 명단 확보하겠습니다.”
오후 3시 15분.
신우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음이 탁자 위에서 낮게 울렸다.
발신자: 김정환 감사관.
“잠시.”
신우진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한 걸음 물러서 문을 반쯤 닫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며 통화 버튼.
수첩과 서류는 탁자 위에 그대로.
복도 너머로 희미하게 말소리만 들렸다.
3분 뒤. 문이 다시 열렸다.
신우진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눈가만 조금 좁아졌을 뿐.
“감사원입니다.”
박중호가 고개를 들었다.
“배상호 외에 본부장 김기환도 조사 대상이다. 오늘 오후 중 출석 요구서 발부.”
병실이 조용해졌다.
키보드 소리 멎었다. 최명식의 펜도 멎었다.
박중호가 침대에 등을 기대며 천장을 바라봤다.
“드디어.”
한 단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한경숙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14년. 겨우 14년 걸렸다.”
신우진이 수첩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더 올라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충분하지. 본부장까지 찍히면 배상호도 더 숨길 재간 없을 거다.”
박중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깁스 풀린 손으로 키보드를 다시 당겼다.
“네가 마무리해라.”
신우진을 정면으로 봤다.
“나는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한다.”
“알겠습니다.”
“명식이는 두고 가라. 정리할 거 많다.”
신우진이 최명식을 바라봤다.
“여기 남아서 팀장님 증언 자료 작성 보조.”
“어. 알겠습니다, 선배님.”
최명식이 펜을 다시 쥐었다. 손끝에 힘을 줬다.
“청문회까지 엿새. 그 안에 현장 증언 전부 문서화하겠습니다.”
박중호가 이미 타이핑을 재개하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울렸다.
“한 지부장님.”
신우진이 돌아서기 전 한 번 더 멈췄다.
“추가 증인 연락은.”
“내 몫이다. 여기서 같이 진행한다.”
한경숙이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노조 연락망 그룹 채팅이 이미 열려 있었다.
“오늘 밤까지 최소 다섯 명 더 확보한다.”
신우진이 짧게 목례했다.
서류 봉투를 챙겨 겨드랑이에 끼웠다. 병실 문을 향해 걸었다.
병원 1층 로비.
신우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로비는 오후 3시 30분. 외래 환자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걸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이지원 번호. 통화 연결.
수신음 두 번.
연결됨.
“신우진입니다.”
“네.”
이지원의 목소리. 배경음 없이 조용했다.
“당시 본부장도 조사 대상입니다. 감사원 출석 요구서 발부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숨이 들렸다.
“이제 남은 건 하나입니다.”
신우진이 로비 중앙을 가로질렀다. 유리문 너머로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청문회장에 전달하는 것.”
이지원이 대답 없이 숨을 한 번 더 들이쉬었다.
길지 않았다. 신우진은 그 침묵을 끊지 않고 걸었다.
유리문을 밀고 나가며 전화를 귀에 댄 채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