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82화
감사원 회의실. 오전 9시 15분.
탁자 위에 회계 장부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A3 용지로 출력된 스프레드시트 여섯 장. 우측 상단에 '대정밀·프로젝트T·2019-2024'가 워터마크로 박혀 있었다.
이지원이 장부의 세 번째 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수취인 란. '한상진 의원실 후원회'.
“2019년 3월 15일. 2천만 원.”
김정환이 맞은편에서 노트북을 열어 비교 자료를 띄웠다.
“그날 발급된 시험 성적서가 있습니까.”
이지원이 서류 봉투에서 서류 한 묶음을 꺼냈다. 철제 클립으로 정리된 성적서 사본. 인덱스 탭이 날짜별로 붙어 있었다.
“3월 15일자 KD-2037-114 시험 성적서. 발급일 기준 3주 지연. 인장강도 16.4뉴턴.”
김정환이 장부의 같은 행을 따라 손가락을 옮겼다.
“다음 건은.”
“2019년 9월 10일. 3천만 원.”
“성적서.”
“9월 9일자 B4-BV-2287 패킹 재질 시험. HNBR로 기재. 같은 지연 패턴.”
탁자 위에 성적서 사본이 한 장씩 추가됐다. 이지원의 손끝이 멈추지 않았다. 날짜를 짚고, 금액을 읽고, 성적서를 덧댔다. 김정환은 장부의 해당 행마다 체크 표시를 했다.
“패턴입니다, 김 감사관님.”
이지원이 펜을 내려놓았다.
“2019년 3월부터 2024년 4월까지, 연 2회. 3월과 9월.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습니다.”
김정환이 노트북 화면을 돌려 이지원에게 보였다. 시험 성적서 발급일과 후원금 입금일의 대조표였다. 평균 간격 4.3일. 후원금이 항상 성적서 발급일 이후 1주일 안에 들어왔다.
“여섯 해, 열두 번. 금액 합산은.”
이지원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총 3억 4천만 원입니다.”
김정환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넥타이를 풀지 않은 손이 잠시 멈췄다.
“성적서 조작 시점과 후원금 지급 시점의 상관관계가 명확하군요.”
“시험 성적서 다섯 건은 후원금 입금 전날 발급됐습니다. 2021년 9월 건은 당일 오전 발급, 오후 입금.”
김정환이 장부의 마지막 행을 가리켰다. 2024년 4월 9일. 금액 5천만 원. 다른 건보다 컸다.
“이 건은.”
이지원이 성적서 뭉치 맨 아래에서 한 장을 뽑았다.
“2024년 4월 8일자. 부품 검수 기록 전면 삭제되기 11일 전입니다. B4 계열 전 제품군 시험 성적서 세 건이 같은 날 발급됐고, 특이하게도 발급일-시험일 간격이 하루로 단축됐습니다.”
“정상 패턴에서 이탈했군.”
“네. 이때부터 무언가 급해진 흔적입니다.”
김정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회의실 창 너머로 세종대로가 보였다. 아침 햇살이 정부청사 유리벽에 반사되고 있었다.
“한상진 의원실.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철도안전법 개정안 심의권을 갖고 있습니다.”
이지원이 성적서를 연도별로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2019년 개정안 상정 시기와 첫 후원금이 일치합니다. 이후 매년 정기국회 전에 후원금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윤태호 납품사의 시험 성적서가 갱신됐습니다.”
김정환이 돌아섰다.
“정치적 방패 구매로 볼 수밖에 없겠군요.”
“법률 검토는.”
“정치자금법 제45조, 정치자금 부정 수수. 정기적 후원 패턴과 의정 활동 시점이 일치하는 건 입증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짧게 세 번.
김정환이 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신우진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서류 봉투 하나.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때맞춰 오셨군요.”
김정환이 탁자 앞쪽 의자를 가리켰다. 신우진이 앉으며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겉면에 '구매처 과장 유착 증거·2024년 3월-8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지원이 성적서와 장부 대조표를 신우진 쪽으로 밀었다.
“한상진 의원실 후원금과 시험 성적서 조작의 상관관계입니다. 6년, 열두 건.”
신우진이 대조표를 훑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20초. 지문이 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주기는.”
“매년 3월, 9월.”
“정기국회 전.”
“네.”
신우진이 봉투를 열었다. 구매처 과장과 윤태호 간 통화 기록, 이메일 출력본, 윤태호의 결재 일지 사본이 철해 있었다.
“이 자료와 장부를 연결합니다.”
봉투에서 이메일 한 장을 꺼내 탁자 중앙에 놓았다. 2021년 9월 8일자. 수신인은 구매처 과장, 발신인은 윤태호의 회사 계정이었다.
“시험 성적서 발급일이 하루 앞당겨졌습니다. 이메일에는 '금일 중 재발급 요망'이라고 적혀 있고, 다음 날 후원금이 입금됐습니다.”
김정환이 이메일을 집어 들었다.
“원본은.”
“감사실 서버에 보관 중입니다. 메타데이터 보존 완료.”
김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메일을 탁자 위에 다시 내려놓으며 장부와 성적서 위에 나란히 배치했다.
“정황 증거로는 충분합니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한상진 의원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겠습니다.”
이지원이 펜을 집어 들었다. 회의록에 영장 청구 결정을 기재했다. 날짜, 시간, 사유.
“청문회 증거 목록에도 추가해야 합니다.”
김정환이 노트북을 닫았다.
“어떤 순서로 하실 생각입니까.”
신우진이 답했다.
“문서 체인 다음. 후원금 흐름은 독립 증거가 아니라 조작의 동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지원이 회의록에서 고개를 들었다.
“동의합니다. 성적서 조작이 우연이나 단순 실수가 아님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하겠습니다.”
김정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 서류를 차례로 챙겼다. 장부 사본 여섯 장, 성적서 묶음, 이메일 출력본. 순서대로 정렬해 파일 폴더에 넣었다.
“오늘 중 영장 청구서 작성합니다. 집행은 내일 오전이 될 겁니다.”
신우진이 봉투를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압수 대상은.”
“의원실 후원회 회계 장부, 2019년부터 현재까지. 국토교통위원회 회의록과 교차 대조할 예정입니다.”
이지원이 회의록 마지막 줄을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청문회까지 닷새. 그 안에 정치 자금 라인까지 입증되면 윤태호의 방어 논리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김정환이 폴더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영장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청문회 증거 목록 최종본을 오늘 중으로 정리해 주십시오.”
문을 열며 한 번 더 돌아봤다.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윤태호 측에서 먼저 움직일 가능성은.”
신우진이 탁자 위에 놓인 장부 사본을 가리켰다.
“이미 움직였습니다. 이 장부가 존재하는 걸 모르는 게 그들의 유일한 약점입니다.”
김정환이 짧게 목례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신우진이 이지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지원은 회의록을 덮으며 손목의 메탈 시계를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오전 11시 40분. 윤태호 사무실.
책상 위 스피커폰에서 법무팀 수석 변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사원이 오늘 오전 회계 장부를 확보했습니다. 한상진 의원실 압수수색 영장 청구도 진행 중입니다.”
윤태호가 창가에 서서 커피 잔을 내려다봤다.
“장부는 예상했다. 청문회 증인 명단 쪽은.”
“특이 사항 없습니다. 현장 검수원 열두 명 전원 채택.”
윤태호가 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액체가 살짝 흔들렸다.
“절차서 원본을 다시 봐.”
서류 넘기는 소리가 스피커폰 너머로 들렸다. 십여 초.
“대표님.”
변호사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증인 채택 절차서에 서명 일자가 누락돼 있습니다.”
“어느 서류.”
“청문회 사무국이 검수원 측에 발송한 채택 통보서. 사무국장 서명란에 날짜가 없습니다.”
윤태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행정 절차 하자입니다.”
“네. 청문회 운영 규정 제14조 2항, 증인 채택 통보는 서명 일자가 기재된 문서로 효력이 발생합니다.”
“그럼 지금 효력이 없는 겁니까.”
윤태호가 책상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절차 지연 신청서 초안을 작성해. 근거는 서명 일자 누락. 청문회 사무국에 오늘 중 제출한다.”
“증인 전원에 대한 효력 정지를 신청하는 쪽이 효과적입니다.”
“그렇게 해. 열두 명 전부.”
윤태호가 탁자 위 만년필을 집었다. 뚜껑을 열지 않고 손가락으로 돌렸다.
“신청서에 한 가지 더 넣어. 증인 채택 절차의 중대한 하자이므로 청문회 일정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리.”
“알겠습니다. 오후 3시까지 초안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박중호 건은.”
스피커폰이 잠시 조용해졌다.
“입원 중인 증인의 증언 능력에 대한 의료 자문도 함께 신청하면 좋겠습니다.”
“진단서 확보했나.”
“병원 측 제출용과 다른 버전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확인해. 확실하지 않으면 만들고.”
윤태호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 중으로 신청서 접수. 끝.”
스피커폰이 꺼졌다.
윤태호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왼손 약지의 금색 인장 반지를 엄지로 돌렸다. 창밖으로 정오를 지나가는 도심이 보였다.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지원은 휴대폰을 다시 들어 청문회 사무국 담당자 번호를 찾았다. 화면에 오후로 넘어가는 햇빛이 반사됐다. 어깨를 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