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8화

회의 시각은 오전 10시.

신우진은 아홉 시 삼십 분, 검수고 사무실 책상 앞이었다. 잠금 장치를 눌러 서류 가방을 열었다. 정비 일지 대조표 사본 세 부.

부품 육안 검사 보고서 사본 세 부. 날인 역순 증거 출력본. 선임의 조사 노트 사본.

하나씩 꺼내 탁자 위에 정렬했다.

대조표 마지막 줄을 재확인했다. 부품번호 #B4-7812. 공식 교체 주기 18개월.

실제 장착 기간 32개월. 연기 횟수 3회. 결재자 전원 구매처 과장 윤태호.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오른손 검지가 대조표의 날짜 열을 한 번 훑었다. 허공에 글자를 쓰는 버릇은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이 종이 위에 가만히 멈췄다.

전날 행정팀이 보낸 공문 확인 메일이 휴대폰에 떠 있었다. 참석자: 팀장 고영호, 구매처 과장, 감사실 담당. 회의실 3호. 오후 2시.

감사실 담당. 이지원이겠지.

대조표 사본을 가방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기능복 상의를 걸쳤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 유성 매직을 꽂았다. 확대경은 목에 걸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회의실 3호는 본부 2층 복도 끝.

신우진은 5분 전 도착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긴 테이블. 한쪽에 팀장 고영호. 반대편에 구매처 과장 최병호.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최병호는 40대 중반. 옅은 갈색 양복. 넥타이는 비뚤어졌다. 손가락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신우진이 들어서자 시선을 돌렸다.

고영호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입술이 얇게 당겨졌다. “왔나.”

신우진은 대답 없이 앉았다. 팀장의 대각선 방향. 닫힌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뒤쪽 문이 다시 열렸다.

이지원. 네이비 슬랙스에 흰 셔츠. 손목의 메탈 시계가 형광등 아래서 반사됐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한 걸음 물러난 벽 쪽 의자에 앉았다. 참관 자리였다.

“다들 오셨으니 시작하겠습니다.”

고영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자리는 무정차 통과 사고의 원인 규명을 위한 내부 검토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운전 부주의로—”

“아닙니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가방을 벌렸다.

“뭐가 아닌가.”

“원인이 운전 부주의가 아닙니다.”

신우진은 대조표 한 부를 꺼내 테이블 중앙으로 밀었다. 이어서 육안 검사 보고서. 날인 역순 증거 출력본.

“부품 결함입니다.”

고영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저번에—”

“저번에는 부품 교체 주기를 몰랐습니다.”

신우진이 대조표를 펼쳤다. A4 용지 세 장 분량. 가로축 날짜, 세로축 부품번호. 교체 주기 열이 붉은색으로 강조됐다.

“부품번호 #B4-7812. KD-2037 계열 제동 밸브. 공식 교체 주기 18개월입니다.”

최병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실제 장착 기간은 32개월. 세 번의 교체 연기가 있었습니다.”

신우진의 검지가 표의 해당 열을 짚었다.

“첫 번째 연기. 2년 전 3월. 두 번째. 작년 9월. 세 번째. 올해 12월.”

검지가 옆으로 이동했다.

“결재란. 세 개 전부 같은 도장입니다.”

고영호가 대조표를 집어 들었다. 시선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

“구매처 과장 윤태호.”

신우진이 이었다. “한 사람이 세 번 연기 결재를 했습니다. 정상적인 교체 주기 심의 절차를 거쳤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패턴입니다.”

최병호가 끼어들었다. “그건… 행정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행정 실수로 보기엔 반복됐습니다.”

신우진이 날인 역순 증거 출력본을 밀었다.

“그리고 이건 실수가 아닙니다.”

고영호가 출력본을 집었다. 날인된 도장들의 잉크 농도를 확대한 사진. 세 번째 연기 결재 도장이 가장 진했다. 첫 번째 연기 도장이 가장 옅었다. 도장 뒷면 번짐도 동일한 패턴.

“도장 날인 순서가 역전되어 있습니다.”

신우진의 음성은 그대로였다.

“2년 전 결재 도장이 가장 늦게 찍혔습니다. 올해 12월 도장이 먼저 찍혔고요. 한 번에 여러 장을 날인할 때 나타나는 패턴입니다.”

정적.

고영호가 대조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최병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더듬거리며 물컵을 찾았다. 손가락이 물컵을 건드렸다. 물이 테이블 위로 흘렀다.

“죄… 괜찮습니다.”

최병호가 냅킨을 찾으며 넥타이를 더 꼬았다. 냅킨으로 테이블 위를 허겁지겁 닦았다.

신우진은 보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대조표에 고정됐다.

“이 부품번호의 교체 주기는 세 번 연기됐습니다.”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짚었다.

“그때마다 결재란에는 같은 도장이 찍혔습니다. 그리고 도장은 한 번에 찍혔습니다.”

고영호가 심호흡을 했다. 한 번. 길게.

“주임. 이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우진이 육안 검사 보고서를 펼쳤다.

“#B4-7812 부품의 패킹 부 마모 상태입니다. 18개월 주기 기준으로는 정상 범위를 벗어납니다. 32개월 장착 부품의 마모 패턴과 일치합니다.”

사진을 넘겼다.

“밀봉 부의 미세 균열. 교체 주기를 넘긴 부품에서만 나타나는 피로 파손 초기 징후입니다. 이 부품이 장착된 차량이 무정차 통과를 일으켰습니다.”

고영호는 사진을 외면했다. 대신 신우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가의 잔주름이 깊어졌다.

“끝났나.”

“아직입니다.”

신우진이 대조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B4-7812와 같은 로트에서 출고된 부품이 장착된 차량.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이 열두 대입니다.”

최병호가 물컵을 내려놓다 유리가 테이블에 부딪혔다. 짧은 소리.

“열두 대 모두 점검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 안에.”

고영호가 손을 들었다. 신우진을 막는 동작이었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가 내려갔다.

“이 건은…”

고영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본부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다.”

“본부 판단 전에 차량 점검이 먼저입니다.”

신우진이 즉시 받았다. “같은 부품이 장착된 열차가 지금 선로에 있습니다.”

“절차가 있다.”

“절차는 안전을 위한 겁니다.”

시선이 부딪혔다.

고영호가 먼저 눈을 돌렸다. 대조표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한 장씩 천천히 넘기다 두 번째 페이지에서 멈췄다. 세 번째 연기 결재란. 윤태호의 도장.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좋다.”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점검 일정을 잡아라. 내일 아침 1차 점검.”

최병호가 고개를 들었다. 무어라 입을 열려는 듯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넥타이만 만지작거렸다.

“다만.”

고영호가 덧붙였다. “점검 결과와 관계없이 이 건은 본부에 정식 보고한다. 내가 결재선을 올릴 거야.”

“그렇게 하십시오.”

신우진은 세 번째 대조표 사본을 꺼내 고영호 앞으로 밀었다. “팀장님 보관용입니다.”

“……알겠네.”

고영호가 종이를 접어 수첩 사이에 끼웠다. 손가락에 가느다란 떨림이 실렸다.

최병호가 일어나려다 의자에 걸렸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서류를 챙기며 대조표 사본 한 부를 집었다. 손에 힘이 없어 종이가 구겨졌다.

“이건… 정말…”

중얼거렸지만 끝까지 잇지 못했다.

최병호가 회의실을 나갔다. 복도 쪽 발소리가 급박했다. 구두 굽이 리놀륨 바닥을 두드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고영호는 한동안 자리에 더 앉아 있었다. 그도 일어섰다. 신우진을 한 번 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문 쪽으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단 둘만 남았다.

신우진이 남은 대조표 사본 한 부를 서류철에 넣었다. 가방 지퍼를 닫았다.

이지원이 벽 쪽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회의 내내 메모만 계속했다. 작은 수첩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신우진 쪽에 다가왔다.

두 걸음 앞에서 멈췄다. 시선이 신우진의 서류 가방에 닿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짧게.

그것이 전부였다. 이지원은 회의실을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조용했다.

신우진은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글자를 썼다. 짧은 획 하나. 내려긋기. 손가락을 접었다.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오후 3시 10분. 태성정밀 본사 대표실.

윤태호는 책상 위 파일을 덮었다. 부품 시험 성적서. 두께 4센티미터짜리 철제 바인더. 표지에는 '대영산업 · KD-2037 계열 · 2017-2024'가 찍혀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최병호 번호.

윤태호는 세 번째 울림에서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십시오.”

부드러운 톤이었다.

수화기 너머 최병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대표님. 회의… 회의가 끝났습니다.”

“결과는.”

“그 검수 주임. 대조표를 만들어 왔습니다. 교체 주기 연기 전부. 결재자 전원 대표님이라고. 도장 날인 순서까지.”

최병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말이 끊기고 다시 이어졌다.

“팀장이 물러섰습니다. 내일 아침 차량 열두 대 전수 점검. 그리고… 사고 건은 본부에 이첩된다고.”

윤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왼손 엄지가 인장 반지를 돌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감사실 쪽. 이지원이라는 담당자가 회의를 참관했습니다. 한 마디도 안 했지만 전부 지켜봤습니다.”

“알겠습니다.”

윤태호가 전화를 끊었다.

창가로 걸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유리창을 때렸다. 붉은 원 안의 'DS' 로고가 창 밖으로 보였다.

30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상으로 돌아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법무팀 연결해 주십시오.”

10초 후 내선 연결.

“윤태호입니다. 부품 시험 성적서 원본의 문서 보존 기간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KD-2037 계열. 대영산업 납품 건.”

잠시 멈췄다.

“보존 기간이 언제 만료되는지. 정확한 일자로.”

수화기 너머로 서류 넘기는 소리. 짧은 대기.

“……대표님, 해당 문서의 보존 기간은 올해 3월 말까지입니다. 정확히 이번 분기 말입니다.”

윤태호의 입술이 얇게 당겨졌다.

“그럼 절차대로 폐기 준비를 하십시오.”

“일정은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아닙니다.”

윤태호가 잘랐다. 어조는 그대로 공손했다. “통상적인 폐기 일정보다 약간 앞당겨서. 분기 말까지로 되어 있으니, 분기 초에 실행해도 절차상 문제는 없을 겁니다.”

“……검토하겠습니다.”

“검토가 아니라 준비입니다.”

수화기가 조용해졌다.

“확인하셨으면 메일로 일정을 공유해 주십시오.”

윤태호가 전화를 끊었다.

서랍을 열어 안쪽 깊숙이서 얇은 명단을 꺼냈다. 종이가 아닌 코팅된 카드 형태. 인쇄된 글씨가 깔끔했다.

후원자 명단. 지역구 세 곳. 이름과 연락처. 기업명.

윤태호는 명단을 책상 위에 펼쳤다.

오른손 검지가 세 번째 줄을 짚었다. 정치인 이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엄지로 인장 반지를 한 번 돌렸다.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를 직접 눌렀다.

통화 연결음 두 번. 상대가 받았다.

“의원님. 태성정밀 윤태호입니다.”

미소가 목소리에 배어들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혹시 다음 주에 시간 되시는지요. 작년에 후원해 주신 건 말씀드렸습니다만, 올해도—”

유리창 너머로 'DS' 로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른손이 명단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신우진은 서류 가방을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기능복 상의를 걸었다. 대조표 사본 한 부를 꺼내 서류철에 끼웠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지원이었다.

“신우진 주임님.”

차분한 목소리. “오늘 회의에서 제시하신 대조표. 작성하신 방식을 감사 기법으로 기록했습니다.”

“기록.”

“네. 증거 체인의 구성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날인 역순 분석과 정비 일지 교차 검토. 저희 감사실에서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만…”

그녀는 잠시 멈췄다.

“현장 검수 담당이 이 정도로 문서화할 수 있다는 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가 책상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내일 오후에도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후 2시인가.”

“네. 문서고 앞.”

이지원이 이었다. 음성이 한 톤 낮아졌다. “한 가지 공유할 게 있습니다. 감사실 내부 통신 기록에서… 추가로 확인된 부분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신우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수고 유도로 너머로 객차 한 대가 견인되고 있었다. 내일 아침 1차 점검. 열두 대.

가방을 열었다. 회의록 사본을 꺼내 서류철에 추가했다. 선임의 조사 노트 사본은 따로 빼서 서랍 속 금속 상자에 넣었다.

서랍을 닫았다.

열쇠를 두 번 돌렸다.

무정차 통과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