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9화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아침 해가 유리창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신우진은 책상 위 서류철을 펼쳤다. 대조표 사본. 회의록 사본. 7년 전 그가 남긴 조사 기록 사본.
기능복 상의를 걸친 채 의자에 앉았다. 왼손으로 대조표를 넘겼다.
부품 교체 주기 연기 이력. 세 차례. 전부 동일 결재자.
오른손 검지가 표의 오른쪽 열을 짚었다. B4-112, B4-118, B4-203, B4-207. 네 대 모두 B4 계열. 같은 로트에서 들어온 부품들이었다. 납품 시기도 2년 전 3월로 같다.
신우진은 수첩을 꺼냈다. B4 차량군 로트 번호를 옮겨 적었다. 납품일.
교체 주기 만료일. 연기 승인일. 수첩 위에 날짜 세 개가 가지런히 정렬됐다.
수첩을 덮고 유성 매직을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검수고 바닥에서 금속성 진동이 낮게 울렸다. 유도로 저편에서 엔진 공회전 소리. 견인차가 객차를 밀고 있었다.
신우진은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도로 위로 B4 계열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푸른색 측면 도장. 차량 번호판. 지난밤 회의에서 점검 일정이 잡힌 열두 대가 대기 중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
돌아섰다. 문이 열리고 이지원이 들어왔다. 흰 셔츠에 네이비 슬랙스.
어깨엔 메신저백. 발소리는 안전화가 아니라 낮은 굽의 구두였다. 검수고 복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
이지원이 책상 앞에 섰다. 시선이 서류철을 한 번 훑었다.
“오전 10시 예정보다 일찍 왔습니다.”
신우진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 “문서고 앞이었는데.”
“장소를 바꿨습니다. 여기가 더 조용할 것 같아서요.”
조용하다. 사무실에는 둘뿐이었다. 검수고 유도로에서는 정비 인원들 발소리와 공구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이쪽 복도는 비어 있었다.
이지원이 메신저백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사고 조사 보고서 결재 로그 사본.
“본사 결재 라인에서 확인된 내용입니다.”
신우진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결재 시간. 결재자. 결재 의견.
이지원이 로그의 세 번째 줄을 짚었다. “사고 접수 45분 후 구매처 과장 결재 완료. 통상적인 부품 사양 검토 시간은 최소 4시간 20분입니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손가락이 로그 하단으로 내려갔다. 통신 기록. 결재 직후 발신 번호 하나. 감사실장 내선 번호였다. 수신 시간은 구매처 과장 결재 완료 8분 후.
“감사실장 민경수입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내부에서 새는 거였군.”
“지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통신 기록과 그 직후 제 보고서가 반려된 시간이… 지나치게 근접해 있습니다.”
이지원은 서류를 거둬 메신저백에 넣었다. 동작이 느렸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신우진 주임님.”
잠시 멈추고 호흡 한 번.
“제가 감사실에서 이 사건을 파는 방식은 주임님과 달랐습니다. 서류와 전례와 절차로만 접근했고, 현장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 방법의 한계였습니다.”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목표가 같다는 걸 압니다. 부품 결함을 입증하고, 그 결함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구조를 드러내는 것.”
메신저백 끈을 다시 어깨에 걸며 이지원이 말을 이었다.
“저는 제 권한으로 감사 기록을 체계화할 수 있습니다. 주임님은 현장의 증거를 알고 계시고요. 비공식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면 양쪽 모두 속도가 붙을 겁니다.”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책상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
“조건은.”
“정보 교환은 보안 메신저로만 합니다. 감사실 내부에 이 사건을 유출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면, 공식 메일이나 내선 통화는 위험합니다.”
“그 정보원이 누군지 감은 있나.”
“아직 없습니다. 다만 어젯밤 내부 접근 로그를 추가로 확인했을 때, 사고 조사 보고서 초안에 비인가 열람 기록이 있었습니다. 감사실 내부 계정에서였고, 보고서가 시스템에 배정된 직후였습니다.”
이지원은 말을 끊었다. 검수고 저편에서 경적 소리가 짧게 울렸다.
“제보자가 한 명 더 있어서 알게 된 정보입니다. 그쪽은 감사실 내부 실무자입니다. 신원은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지금까지 준 정보는 모두 정확했습니다.”
신우진은 서류철에서 옛 조사 기록 사본을 꺼냈다.
“그럼 이것도 정확할 거다.”
책상 위에 펼쳤다. 12페이지. 손글씨가 빼곡했다. 한 문장을 짚었다.
'시험 성적서 발급 기관명 — 한국철도부품시험원. 당시 실제 시험소는 중앙시험소였음. 불일치.'
이지원이 사본을 들여다봤다.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한국철도부품시험원. 5년 전에 폐쇄됐습니다. 인가 취소 사유는 시험 성적서 허위 발급이었고요.”
신우진은 수첩을 책상 위에 올렸다. B4 차량군 로트 번호 옆에 방금 들은 내용을 적었다. '시험소 불일치. 7년 전. 동일 패턴.'
“이 노트는 7년 전 우리 팀 선임이 작성했다. 당시 TH-1187 계열 부품 결함을 추적했고, 납품사는 지금과 같은 대영산업이었어.”
“7년 전에도.”
“그렇다. 부품 계열만 다르고 패턴은 같다. 패킹 불량. 밀봉 파손. 마모 과다. 그리고 시험 성적서 발급 기관 불일치.”
이지원이 사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입술이 살짝 다물렸다.
“이건… 시험 성적서 조작의 상위 구조로 볼 수 있겠군요. 납품사가 허위 성적서를 발급받았고, 그걸 근거로 계약이 유지됐다면.”
“교체 주기 조작은 그다음이다. 성적서가 가짜인 부품을 계속 쓰려면 주기를 늘려야 하니까.”
이지원은 수첩을 꺼내 사본의 정보를 옮겨 적었다. 필기 속도가 빨랐다.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이어졌다.
“신우진 주임님.”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음성이 한 톤 낮아졌다.
“제가 이 사건에 매달리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신우진은 기다렸다.
“20년 전 철도공사에 부품 비리를 내부 제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감사실 조사관이었고, 제보 직후 지방 사무소로 발령났습니다.”
왼손이 메신저백 끈을 움켜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사무실이 조용했다. 유도로 저편에서 용접 불꽃 소리가 짧게 튀었다.
“그 제보자의 딸입니다.”
신우진은 오른손 검지로 책상 위를 쓸었다. 짧은 수평선.
“그래서 이쪽으로 온 건가.”
“철도에 들어온 이유는 아닙니다. 대학에서 철도공학을 전공했고, 감사 업무를 선택한 건… 서류와 시스템이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지원은 메신저백을 다시 어깨에 고쳐 걸었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목소리도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서류가 사람을 보호하려면, 그 서류를 쓴 사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잠시 멈췄다.
“주임님은 그걸 하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고 서류철을 정리했다. 대조표와 회의록을 한데 모았다. 7년 전 조사 기록은 따로 빼서 책상 왼쪽 서랍에 넣었다.
“보안 메신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앱 이름이 뭔가.”
태성정밀 본사 대표실.
윤태호는 창가에 서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도심 전경. 'DS' 로고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왼손에는 커피 잔. 오른손은 바지 주머니 속에서 인장 반지를 천천히 돌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
“들어오십시오.”
구매처 과장이 들어왔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마에 얕은 땀.
“앉으시죠.”
손짓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자신은 집무용 의자로 걸어가 앉으며 커피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 내용은 들었습니다.”
“네, 대표님.”
“정비팀 주임 하나가 대조표와 부품 사진으로 3년 치 정비 기록을 뒤집었더군요. 현장에 계셨으니 직접 보셨을 테고.”
구매처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 제압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감사관도 있었고, 팀장님도 결국 점검 일정을 승인했습니다.”
“그 점검은 오늘 오전 중이겠군요.”
“네.”
윤태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잔이 책상에 닿을 때 소리는 없었다.
“점검 결과는 나올 겁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신우진이라는 주임은 거기서 끝내지 않을 거고, 결국 시험 성적서를 요구하겠죠.”
“법무팀에서 성적서 원본 폐기를 검토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건 진행 중이고. 오늘 부탁드릴 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책상 서랍에서 태블릿PC를 꺼내 구매처 과장 쪽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B4 차량군 입고 검수 데이터베이스 메인 화면.
“이 데이터베이스에 접근 가능하시죠?”
“관리자 권한으로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B4 차량군 입고 검수 결과 중 '교체 주기 예외 승인'으로 분류된 항목을 전부 찾아주십시오.”
구매처 과장의 손가락이 태블릿으로 향했다가 멈칫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라는…”
“별도 이관입니다. 공용 서버 말고 오프라인 저장소로 옮기고, 원본 데이터베이스에서는 해당 테이블만 조용히 비웁니다. 방법은 과장님께서 더 잘 아실 테고.”
윤태호의 눈이 구매처 과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깜빡임이 없었다. 입가에는 미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구매처 과장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건… 예외 승인 항목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관련된 모든 부품 이력 로그에 구멍이 생깁니다.”
“시험 성적서 폐기 절차도 병행할 예정입니다. 두 작업이 일관되게 진행돼야 나중에 헷갈리지 않겠죠.”
“언제까지.”
“오늘이요.”
윤태호는 태블릿을 다시 자기 쪽으로 당겨 화면을 끄고 서랍에 넣었다.
“법무팀이 성적서 폐기 일정을 이번 주 안으로 잡고 있습니다. 과장님 쪽 데이터 이관도 빠를수록 좋고요. 신우진이라는 사람이 점검 결과를 정리해 문서를 꺼내기 전에, 꺼낼 문서 자체를 재정리해 두는 겁니다.”
구매처 과장이 일어났다. 이마의 땀이 더 진해졌다.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이 작업의 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윤태호도 일어나 정장 자켓 단추를 여몄다.
“지금은 법적 근거를 따질 단계가 아니란 뜻입니다. 살려면 움직여야 하고, 그건 과장님도 다르지 않으실 겁니다.”
구매처 과장은 대답 없이 허리만 숙이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과장님.”
등을 돌린 채로 불렀다.
“잘 해결될 겁니다. 정치권 쪽도 이미 연락이 돼 있습니다. 우리는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문이 닫혔다.
윤태호는 다시 창가로 갔다. 커피 잔은 들지 않았다.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인장 반지를 돌렸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희미했다.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후원자 명단을 열고 두 번째 줄의 이름을 짚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잠시 멈췄다.
법무팀 번호를 먼저 눌렀다.
“성적서 폐기 일정을 사흘 당겨 주십시오. 가능하면 내일 중으로. 네. 사유는 문서 보존 기간 경과에 따른 정기 폐기.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전화를 끊고 명단을 다시 훑었다. 손가락이 두 번째 줄에 멈췄다. 통화 버튼.
“의원님. 태성정밀 윤태호입니다.”
목소리에 미소가 실렸다. 눈은 차가웠다.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신우진은 휴대폰 화면에 보안 메신저 앱을 설치했다. 이지원이 건넨 메모를 보고 직접 입력했다. 암호화 키 교환까지 완료.
“첫 메시지는 오늘 오후에 보내겠습니다.”
이지원이 메신저백을 챙기며 말했다.
“감사실 내부 제보 라인에 추가 확인을 요청한 게 있습니다. 민경수 실장과 구매처 과장의 통신 빈도 기록. 받는 대로 공유하겠습니다.”
“여기서 받은 시험소 불일치는 언제 확인 가능한가.”
“중앙시험소는 아직 존재합니다. 공식 조회를 넣으면 7년 전 성적서 발급 이력을 역추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록이 남아서 감사실장이 볼 수 있어요. 접근 방식을 더 검토해야 합니다.”
“비공식 경로는 없나.”
잠시 생각하던 이지원이 입을 열었다. “중앙시험소에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연락해 보겠습니다.”
“알겠다.”
이지원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기 전에 멈추고 돌아섰다.
“신우진 주임님. 한 가지 더.”
신우진이 기다렸다.
“감사실 내부에 정보원이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누군지 특정은 못 했지만, 결재 권한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예요. 민경수 실장일 수도 있고, 그 아래 팀장급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알아내는 것도 지금 하는 거고.”
“네.”
이지원이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서자 발소리가 바뀌었다. 구두 소리가 검수고 콘크리트 바닥에 울렸다. 유도로 저편에서는 B4 차량 점검을 마친 정비 인원들이 공구를 정리 중이었다.
메신저백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확인했다.
내부 제보 라인. 메시지 한 건.
'오늘 오전 구매처 과장이 비인가 데이터베이스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대상은 B4 차량군 검수 로그입니다.'
왼손이 메신저백 끈을 꽉 움켜잡았다.
화면을 신우진의 메신저 창으로 전환했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