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84화

감사실 회의실 시계가 밤 10시를 가리켰다.

이지원이 긴 테이블 위에 세 개의 바인더를 일렬로 펼쳤다. 20년 전 성적서. 9년 전 보고서. 현재 검수 기록. 오른손 검지가 각 바인더의 로트 번호를 짚었다.

“DH-98-2A-521. DH-09-2A-114. B4-BV-2287.”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 전부 같다.”

“인장강도도 같습니다. 16.4뉴턴. 기준치보다 2.1뉴턴 부족.”

이지원이 세 번째 바인더를 열었다. 오늘 오후 최명식이 복사해 둔 7년 전 노트 사본이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에 추가할 항목이 있습니다.”

신우진이 노트 사본을 짚었다.

“KD-2037-087. 7년 전 무정차 통과 사고 부품. 이것도 DH 코드, 금형라인 2A.”

“검증은?”

“고동수 팀장 노트 원본에 로트 번호 기록이 있다. 결함 내용은 현행 B4-BV-2287과 동일. 제동밸브 인장강도 저하.”

이지원이 노트 사본을 바인더에 끼웠다. 손끝이 잠시 메탈 시계 밴드에 닿았다.

“그럼 이 체인은 20년, 9년, 7년, 현재. 네 시점 모두 동일 제조사, 동일 금형 라인, 동일 결함입니다.”

“7년 전 사고 보고서에는 이 연결이 빠져 있었다.”

“이유는.”

“고 팀장이 구매처 지시로 이의 제기를 철회했다. 내부 메모에 ‘구매처 윤태호 대리’라고 명시돼 있다.”

이지원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메모도 증거 목록에 올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목록의 각 항목을 점검했다. 신우진이 유성 매직으로 마지막 장에 번호를 적었다. 이지원이 그의 손끝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서류는 공식 증거 등록 절차가 필요합니다.”

“감사원 경로로?”

“네. 유족이 제출하는 개인 소장 문서는 감사원 증거 규정 제17조에 따라 소명 자료를 첨부해야 해요. 저는 직계 유족이고, 원본 보존 상태와 입수 경위를 진술서로 제출했습니다.”

“접수는.”

“오늘 오후 4시 55분. 감사실에서 정식 접수번호를 받았습니다. 등록번호 AU-2024-0087-03.”

신우진이 바인더 뚜껑을 닫았다.

“됐다.”

문이 열렸다.

한경숙이 들어왔다. 노조 조끼 위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왼손에 명단 뭉치를 쥐고 테이블 앞에 섰다.

“검수원 열두 명 전원 내일 증언대 선다. 세 시간 동안 리허설 돌렸다.”

이지원이 의자를 당겼다.

“제보자는.”

“작년에 제보했던 김영수 씨. 변호사 입회해서 참여 확약했다. 조건은 실명 비공개. 증언은 비공개 회의에서만.”

“수용 가능합니다. 증언 요지만 기록에 남기면 된다.”

한경숙이 명단을 테이블에 펼쳤다. 검수원 서른여섯 명의 서명이 빼곡했다. 그중 열세 명 옆에 별표가 그어져 있었다.

“증인 출석 순서는 어떻게 되나.”

신우진이 목록을 짚었다.

“나부터. 부품 검수 기록과 사고 인과 관계.”

이지원이 그다음을 짚었다.

“제가 문서 체인과 시험 성적서 조작 계보를 제시합니다. 그다음 현장 검수원 세 명.”

한경숙이 명단을 훑었다.

“최명식. 박중호 씨 병실에서 구술 녹취했던 김민수. 그리고 정비팀 15년차 황재호.”

“그다음 김영수 씨 비공개 증언. 마지막으로 한 지부장님이 집단 증언 요약.”

한경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신문 포인트는 예상했나.”

“윤태호 측은 로트 번호 차이를 물고 늘어질 겁니다. 20년 전 부품과 현재 부품이 다르다는 논리죠.”

이지원이 세 바인더를 차례로 두드렸다.

“하지만 제조사 코드 DH와 금형라인 2A는 세 시점 모두 일치합니다. 동일한 제조 공정에서 나온 부품이라는 뜻. 로트 번호는 생산 시점만 다를 뿐.”

“그리고 인장강도 16.4뉴턴.”

신우진이 말을 이었다.

“결함 수치도 같다. 20년간 같은 부품이 로트 번호만 바뀌어 납품된 거다.”

한경숙이 명단을 접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현장 애들한테 오늘 밤은 집에 가서 자라고 했다. 새벽 여섯 시 차량기지 정문에서 모여서 같이 출발한다.”

“노조 규약 제42조 발동은.”

“유지. 본사 인사팀의 대기 발령이 부당 인사 조치에 해당한다는 법률 검토 끝났다.”

한경숙이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밤 11시 10분.

“나는 현장 사무실 들렀다 갈게. 새벽 출발 준비 확인하고.”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내일 하자.”

한경숙이 문을 닫고 나갔다. 복도에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같은 시각, 대한정밀 본사 대회의실.

윤태호가 긴 테이블 앞에 섰다. 법무팀장과 외부 변호사 두 명이 양옆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증거 목록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핵심은 시간입니다.”

법무팀장이 레이저 포인터로 첫 번째 항목을 짚었다.

“이지원 씨 아버지의 20년 전 성적서. 공식 감사 경로를 거치지 않은 개인 소장 문서입니다. 이관 기록도 소실됐고, 보존 연한도 지났습니다.”

“증거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라는 거군요.”

“정확합니다. 문서 체인의 시간적 연속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현재 부품과 20년 전 부품의 동일성 주장은 근거를 잃습니다.”

윤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빈틈을 얼마나 확장할 수 있죠.”

“1997년 자료는 애초에 감사 범위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2015년부터가 공식 범위. 그 이전 기록을 증거로 채택하려면 감사원이 별도로 범위 확대 결정을 해야 하는데, 그 결정 자체가 법적 다툼 대상입니다.”

외부 변호사가 서류를 넘겼다.

“두 번째. 정치 후원금 문제. 한상진 의원실 후원금은 정치자금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신고된 금액입니다. 금액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뇌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하면 명예훼손 역소송도 가능합니다.”

윤태호가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세웠다.

“그 인과관계를 그들이 어떻게 입증하려는지 파악했나.”

“시험 성적서 발급일과 후원금 입금일의 시간적 근접성입니다. 평균 간격 4.3일이라는 수치를 내세울 겁니다.”

“4.3일.”

윤태호가 짧게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

“통계적 상관관계일 뿐 법적 인과관계는 아니군요.”

“맞습니다. 거기서 반격합니다.”

법무팀장이 세 번째 문서를 꺼냈다. 청문회 운영 규정 사본이었다.

“증인 채택 통보서에 서명 일자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운영 규정 제14조 2항에 따르면, 서명 일자가 기재된 문서로 효력이 발생합니다. 절차적 하자를 제기하면 최소 하루, 길면 사흘 지연이 가능합니다.”

“그걸로 방어 논리를 정리하죠.”

윤태호가 탁자 끝을 짚었다. 왼손이 자연스럽게 턱으로 올라갔다. 손가락 끝이 왼쪽 턱선의 얕은 흉터를 스쳤다.

법무팀장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윤태호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내일, 청문회장에서 제일 중요한 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에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왼쪽 턱선의 흉터가 형광등 빛에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들이 무슨 문서를 들이밀든, 표정 하나 바꾸지 마라.”

“예, 대표님.”

윤태호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곤 돌아서며 말했다.

“증인 반대신문 요령은 내일 아침 차 안에서 다시 확인하죠.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철도공사 정문 앞. 밤공기가 서늘했다.

신우진이 유성 매직을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이지원이 가방 지퍼를 잠그며 말했다.

“최명식 씨한테 흉터 이야기 했다면서요.”

“들었나.”

“한 지부장님한테서요. 최명식 씨가 리허설 끝나고 잠깐 얘기했대요.”

신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들어 집게손가락의 흉터를 내려다봤다.

“말하고 나니 오히려 가벼웠다.”

“짐을 나눠 가진 기분인가요.”

“그런 건가.”

두 사람은 정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차량기지 야간 조명이 꺼져 있었다.

이지원이 가방을 가슴 쪽으로 당겼다.

“아버지 기록이 20년 만에 증거 목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제출 번호까지 받고.”

“20년 전 이철호 과장님은 뭐라고 쓰셨나.”

“‘누가 보존하는가, 누가 책임지는가.’ 연필로 적힌 메모였어요. 이제 그 답을 내일 증거대 위에 올리는 거죠.”

신우진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8시 30분. 청문회장 로비.”

“네. 거기서 뵙겠습니다.”

이지원이 가방을 단단히 안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신우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돌아섰다.

차량기지로 향하는 길. 검수실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문을 열자 최명식이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내일 제출할 증거 봉투 세 개를 차례로 점검하고 있었다.

“명식아.”

“선배님. 아직 안 가셨어요?”

신우진이 작업대 옆에 섰다.

“내일. 방청석에 앉아 있을 거지.”

“물론이죠. 제 증언 순서 때는 앞자리로 갈 거고.”

“부탁 하나 하마.”

최명식이 고개를 들었다.

“강재호… 그 친구 연락처를 안다. 청문회 끝나면 같이 가자.”

최명식의 눈이 커졌다. 이내 입을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우진이 검수실 불을 껐다.

다음 날 아침 7시 15분. 윤태호의 개인 집무실.

거울 앞에 선 윤태호가 넥타이를 천천히 매었다. 짙은 남색 넥타이. 왼쪽 칼라에 회사 로고 배지를 꽂았다.

양복을 입은 채 거울을 똑바로 바라봤다.

원래 턱선 각도에서 왼쪽으로 15도쯤 돌아간 자리. 피부가 미세하게 함몰된 흉터가 형광등 아래 선명했다.

그가 손끝으로 흉터를 짚었다.

7년 전 그 밤. 검수장 피트 안. 부서진 제동밸브. 흘러내린 유압유. 그리고—

윤태호가 손을 내렸다. 거울 속 남자의 표정에는 아무 흔들림도 없었다.

“대표님, 차 대기했습니다.”

“곧 내려가지.”

그가 책상 위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법무팀 방어 전략 문서. 정치 자금 회계 장부 사본. 청문회 운영 규정 발췌본.

사무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서면서, 그의 구두 소리가 한 번도 리듬을 잃지 않았다.

신우진이 차량기지 정문 앞에서 차에 올랐다. 계기판 시계는 오전 7시 42분.

차 안에 앉자마자 핸들을 잡은 손이 잠시 멈췄다. 계기판 너머로 떠오른 것은 관제 기록의 한 줄이었다.

열차 번호 KTX-217. 무정차 통과. 통과 시각. 통과 역.

문제없음. 문제없음. 문제없음.

기록 속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볼트 하나가 빠져도, 부품이 한계치를 넘어도, 사고 열차가 정차역을 지나쳐도.

기록은 언제나 조용했다.

신우진이 시동을 걸었다. 계기판 불빛이 켜지며 바늘이 살짝 올라갔다.

이제 기록이 말할 차례였다.

차가 천천히 정문을 빠져나갔다. 청문회장까지 40분 거리였다.

거울 앞에 선 윤태호가 넥타이를 천천히 매었다. 짙은 남색 넥타이. 왼쪽 칼라에 회사 로고 배지를 꽂았다.

양복을 입은 채 거울을 똑바로 바라봤다.

원래 턱선 각도에서 왼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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