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86화
속기사의 자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지원이 증인석에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곧게 폈다. 손목의 메탈 시계가 증인석 가장자리에 닿지 않도록 왼손을 서류 위에 올렸다.
위원장이 말했다. “증인, 소속과 성함을 밝혀 주십시오.”
“철도공사 감사실 감사관 이지원입니다.”
“증인은 현재 감사실에서 어떤 업무를 담당합니까.”
“본건 특별감사의 증거 분석과 문서 체인 검증을 담당했습니다.”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이 제출한 증거 목록 AU-2024-0087에 대해 증언해 주십시오.”
이지원이 투명 파일을 열었다. 첫 번째 문서를 꺼내 증인석 좌측의 문서 카메라 아래에 놓았다. 청문회장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 1997년 12월 18일자 시험 성적서가 표시되었다.
“이 문서는 1997년 12월 18일 발행된 B4 계열 제동밸브, 부품 번호 B4-BV-2287의 시험 성적서입니다. 발행처는 당시 대한정밀—현 대정밀입니다.”
이지원이 손가락으로 세 군데를 짚었다.
“인장강도 16.4뉴턴입니다. 설계 기준은 18.5뉴턴이었습니다. 2.1뉴턴이 부족합니다. 패킹 재질은 설계 기준 EPDM이 아닌 HNBR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시험일과 발행일 사이에 3주의 간격이 있습니다. 소급 작성이 의심됩니다.”
스크린의 성적서 하단에 수기 서명이 보였다. 검수자: 이철호.
이지원의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승인자는 당시 부품검수과장 배상호였습니다. 이 보고서는 반려되었고, 검수자 이철호는 8일 후 좌천 발령되었습니다.”
위원회 석이 조용해졌다. 속기사의 자판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이지원이 두 번째 문서를 문서 카메라 아래로 옮겼다.
“QC-2009-0031. 2009년, 9년 전 박중호 검수관이 작성한 내부 보고서입니다.”
스크린에 보고서의 측정치 표가 떠올랐다.
“인장강도 16.4뉴턴. 기준 대비 2.1뉴턴 부족. 패킹 재질 HNBR. 부품 계열은 B4,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입니다. 1997년 성적서와 모든 수치가 일치합니다.”
이지원이 세 번째 문서를 꺼냈다.
“2024년 3월, 신우진 검수관이 작성한 검수 기록입니다. 부품 번호 B4-BV-2287. 인장강도 16.4뉴턴. 패킹 재질 HNBR.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입니다.”
스크린에 세 문서가 나란히 배열되었다. 1997. 2009. 2024. 측정치는 세 열 모두 동일했다.
이지원이 증인석 마이크를 향해 말했다.
“27년간 동일한 부품이 동일한 결함으로 납품되었습니다. 같은 금형, 같은 재질 치환, 같은 인장강도 부족. 그리고 세 번의 검증 시도는 모두 묵살되거나 반려되었습니다.”
피감사인 석에서 윤태호가 오른손 검지로 탁자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이지원은 문서 카메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납품 로트는 1997년 KD-2037-087, 2009년 KD-2037-114, 2024년 B4-BV-2287입니다. 로트 번호는 변경되었으나,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는 27년째 동일합니다. 동일한 금형에서 생산된 동일한 부품입니다.”
위원장이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증인의 증거 제출을 완료로 인정합니다. 피감사인 측, 반대 신문하십시오.”
윤태호 측 법무팀 수석 변호사가 일어났다. 검은 정장, 은색 타이핀. 방어 전략 문서의 두 번째 탭을 손끝으로 짚었다.
“변호인, 반대 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증인, 1997년 문서의 원본 소재를 확인해 주십시오.”
이지원이 답했다.
“원본은 현재 감사원 증거 보관소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 원본은 이번 감사 전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철도공사 문서보관실 3서가, 전 감사실장 김재원의 개인 보관함에서 이관된 기록입니다.”
변호사가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개인 보관함에서 발견된 문서가 공식 감사 경로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은 증인도 인정하시겠지요. 또한 2009년 보고서는 당시 정식 채택되지 않은 초안입니다. 제출하신 세 문서 가운데 두 건이 공식 기록이 아닌 셈입니다.”
“문서의 출처가 공식 경로가 아니라는 점과 문서 자체의 진본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문서의 진본성에 대해 묻겠습니다. 1997년 성적서가 검수자 이철호의 친필임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이지원이 투명 파일 안의 별지 한 장을 꺼냈다.
“이철호 검수관의 1998년 4월 15일자 이의 제기 문서입니다. 필적 감정 결과 일치합니다. 감정서는 증거 목록 AU-2024-0087-03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변호사가 잠시 서류를 훑었다.
“인정합니다. 그럼 2009년 보고서의 작성자 박중호 검수관에 대해 묻겠습니다. 현재 그의 상태는.”
이지원의 손목 시계가 증인석에 닿았다. 가벼운 금속음이 울렸다.
“박중호 검수관은 현재 치료 중이며, 서면 증언을 제출했습니다.”
“치료 중이라면 반대 신문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뜻입니까.”
“서면 증언은 감사원의 공식 증거 채택 절차를 거쳤습니다. 반대 신문이 필요한 항목에 대해선 감사원이 개별 확인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변호사가 미소를 띠었다.
“그 확인 절차에 피감사인 측이 참여한 적이 있습니까.”
이지원이 답을 멈추지 않았다.
“없습니다. 그러나 증거 능력은 반대 신문 참여 여부가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으로 결정됩니다.”
“바로 그 절차적 정당성에 대해 지적하겠습니다.”
변호사가 방어 전략 문서를 펼쳤다. 페이지 상단에 ‘문서 증거 능력 공격 논점’이 인쇄되어 있었다.
“철도안전법 시행령 부칙 제12조 3항. 이 조항은 부품 시험 성적서의 보존 책임이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한다’라고 규정합니다. ‘협의한다’는 표현은 의무가 아닌 미정의 상태를 의미하지요. 보존 책임이 법적으로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문서를 근거로, 20년 전 행위의 위법성을 입증하겠다는 겁니까.”
청문회장이 술렁였다. 방청석의 한경숙이 손에 쥔 노트를 접었다. 최명식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지원은 잠시 침묵했다. 손목 시계를 바로 잡았다.
“시행령 조항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제도 개선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그러나 그 모호함이 문서의 물리적 진본성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리적 진본성은 세 문서 간의 연속성과 다른 문제입니다.”
변호사가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1997년과 2024년 사이에 27년이 있습니다. 그 사이 이 부품에 대한 검수 기록은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공식 이관 기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증인은 27년의 공백 위에 3개의 점을 찍고, 그 사이를 직선으로 이었습니다. 그 직선을 그린 것은 증인의 해석이지, 기록이 아닙니다.”
이지원의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기록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은 기록이 존재했음을 반증합니다. 그리고 그 삭제 행위 자체가 증거 목록 AU-2024-0087-04로 제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27년간의 연속적인 보존 사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법원이 요구하는 증거 연속성은 결코 만족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가 위원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위원장님. 증인이 제출한 세 문서는 각각 개별적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문서가 하나의 연속된 증거 체인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증인의 해석에 불과합니다. 이 주장은 법적 증거 연속성을 충족하지 못하며, 따라서 증거 체인으로서의 증거 능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원장이 손을 들었다.
“증인. 변호인의 지적에 대한 반론이 있습니까.”
이지원은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세 문서가 여전히 스크린에 걸려 있었다.
“1997년, 2009년, 2024년의 문서에 동일한 오차가 반복된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인장강도 16.4뉴턴, 패킹 재질 HNBR, 시험일 대비 발행일 지연 패턴.—”
“패턴의 유사성은 연속성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이지원의 말을 끊었다.
“증인이 제출한 패턴은 관찰 가능한 사실입니다.”
“사실과 법적 증거는 다릅니다. 후자는 사슬을 요구합니다. 증인의 사슬은 27년간 3개의 고리만 남아 있고, 그 사이는 모두 끊어져 있습니다.”
방청석에서 신우진이 일어났다. 왼손 검지가 흰색 증거 목록 사본의 한 줄을 짚고 있었다.
“위원장님. 보충 증언을 요청합니다.”
위원장이 그를 바라보았다.
“신우진 증인은 1차 증언을 종료했습니다. 다만—현 증인의 증언과 관련된 보충이라면 허가합니다.”
신우진이 방청석을 떠났다. 발걸음은 일정했다. 지나가는 동안 왼손의 유압유 흉터가 형광등 아래로 드러났다. 증인석에 서서 마이크를 당겼다.
“세 문서에서 동일한 것은 측정치뿐 아닙니다. 위원장님, 스크린에 부품 규격 위반 코드를 비교해 주십시오.”
위원장이 기술 담당에게 손짓했다. 스크린 좌측에 새 창이 열렸다.
신우진이 말했다.
“1997년 성적서의 위반 코드는 T-16.4입니다.”
오른손 검지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2009년 보고서의 위반 코드도 T-16.4입니다.”
손을 옮겼다.
“2024년 검수 기록 역시 T-16.4입니다. T는 인장강도 부족, 16.4는 실측치입니다.”
스크린의 세 문서가 확대되었다. 세 개의 다른 서체로 쓰인 ‘T-16.4’가 나란히 표시되었다.
“이 코드는 검수관이 임의로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도안전법 시행규칙 별표 4에 따른 규격 위반 분류 코드입니다. 만약 검수관 세 명이 각자 임의로 기록했다면, 코드 체계가 달랐을 것입니다. 1997년 검수관과 2024년 검수관은 행동 양식이 달랐을 테니까.”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그 코드 일치는 측정치가 같았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그 측정치가 같았던 이유입니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올라가지 않았다.
“인장강도 시험의 오차 범위는 ±0.3뉴턴입니다. 27년간 3회의 시험에서 정확히 16.4뉴턴이 측정된 것은 측정 오차의 관점에서도 동일한 원재료, 동일한 금형, 동일한 불량 공정을 가리킵니다. 누구의 해석이 아닙니다. 시편의 물리적 특성 자체가 동일했습니다.”
피감사인 석에서 윤태호가 변호사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그럼에도 27년의 기록 공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부품 자체의 연속성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서 보존의 연속성입니다.”
신우진이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문서 보존이 연속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단절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다른 증거가 설명합니다. 검수 기록 삭제 로그. 9년 전 보고서의 승인 거부 기록. 1997년 성적서 반려 기록. 보존의 단절은 부품의 결함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결함을 숨기려는 시도가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청문회장이 침묵했다. 위원장이 속기록을 한 장 넘겼다. 속기사의 자판이 잠시 멈추었다.
신우진이 한 걸음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문서는 기억합니다.”
스크린의 세 문서가 여전히 같은 수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변호사가 윤태호를 돌아보았다. 윤태호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그러나 오른손 검지가 탁자 아래에서 천천히 구부러졌다.
위원장이 손을 들었다.
“위원회는 피감사인 측의 이의 제기를 검토했습니다. 문서 보존의 연속성에 대한 법적 의문은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증인이 제출한 세 문서의 물리적 동일성—측정치, 위반 코드, 재질 편차—은 법적 연속성 논의와는 독립된 사실로 판단합니다.”
위원장이 목차를 넘겼다.
“세 문서는 증거로서 채택합니다. 다만 법적 증거 연속성 충족 여부는 청문회 종료 후 법원이 별도 판단할 사안으로 부치겠습니다.”
윤태호의 입술 끝에 미세한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은 곧 사라졌다.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피감사인 측은 이 증거들에 대한 추가 해명이 있으면 다음 회기에 제출하십시오. 감사원은 청문회 기록에 ‘시행령 부칙 제12조 3항의 모호함’을 핵심 쟁점으로 등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원 석의 김정환이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펜을 놓지 않고 속기록을 한 장 넘겼다.
“또한 증인 신우진—귀하의 보충 증언은 기록에 남깁니다. 방청석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신우진이 증인석에서 물러났다. 방청석으로 걸어가는 동안 이지원과 눈이 마주쳤다. 이지원이 증거 제출 확인증을 가슴 높이로 올려 들었다. 종이 모서리가 떨리지 않았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청석 뒤쪽에서 박수가 터졌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이내 열두 명의 검수원들이 동시에 손뼉을 쳤다.
한경숙이 박자를 맞추지 않고 천천히 손을 올렸다. 최명식은 고개를 숙인 채 박수를 쳤다. 손바닥이 붉어져 있었다.
피감사인 석의 윤태호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왼손이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미소 하나 없는 얼굴로 변호사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는 탁자 위 서류들보다 낮았다.
“증인 채택 절차. 서명 누락. 절차를 문제 삼으십시오.”
변호사가 방어 전략 문서의 세 번째 탭을 펼쳤다. 페이지 상단에 ‘증인 채택 절차 이의 제기’가 인쇄되어 있었다.
“서명 날짜 누락. 사무국장.”
윤태호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내일입니다. 증인은 현장 검수원들입니다.”
위원장이 방청석의 박수를 제지하지 않았다. 천천히 청문봉을 들어 탁자를 한 번 쳤다.
“정회를 선언합니다. 다음 증인 심문은 내일 오전 10시에 속개합니다.”
스크린에는 여전히 세 개의 문서가 걸려 있었다. 1997. 2009. 2024. 형광등 빛 아래서 T-16.4가 번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