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88화
철도공사 본사 인사팀 사무실. 오후 2시.
신우진이 서류 봉투 두 개를 인사팀장 책상 위에 올렸다. 왼쪽은 사직서. 오른쪽은 제안서.
인사팀장이 봉투를 번갈아 봤다.
“이게 무슨.”
“사직서와 제안서입니다.”
인사팀장이 사직서 봉투를 집었다. 뜯지 않고 다시 내려놨다.
“신 검수관, 본부장님 직인이 찍힌 승진 발령안이 올라와 있습니다. 지금 이걸 내면.”
“알고 있습니다.”
신우진이 오른쪽 봉투를 한 뼘 더 밀었다.
“검수원 후배 양성 프로그램 신설안입니다. 4년 차 이상 검수원이 교관으로 순환 배치되고, 6개월 실습 커리큘럼이 포함됩니다.”
인사팀장이 제안서를 꺼냈다. 첫 장을 넘겼다.
“예산 항목까지 잡아 놨네.”
“본부장 결재 전에 실무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사팀장이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았다. 의자에 깊이 기대어 천장을 봤다.
“승진 거부하는 사람 처음 봅니다. 그것도 사직서랑 제안서를 동시에 내는 사람은.”
“승진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들어 보죠.”
신우진은 검지로 제안서 두 번째 페이지를 짚었다.
“3년간 현장에서 검수원 열다섯 명이 이직했습니다. 그중 일곱 명은 부품 결함을 지적한 경력이 있습니다.”
인사팀장의 손가락이 멈췄다.
“일곱 명.”
“전원 구매처 이의 제기로 정식 보고가 반려됐습니다. 현장은 불량을 봐도 기록을 남기는 방법을 모릅니다.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0초쯤 침묵이 흘렀다. 인사팀장이 제안서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결재란은 비어 있었다.
“이 프로그램, 실무 책임자는 누굽니까.”
“제가 맡겠습니다. 사직서를 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검수관 직책으로는 교관 배정 권한이 없습니다.”
인사팀장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본부장님한테 내가 뭐라고 보고해야 될지.”
“있는 그대로.”
인사팀장이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제안서 표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접수합니다. 다만 오늘 중으로 본부장님 결재가 떨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딱 한 번. 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인사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 검수관.”
신우진이 문 앞에서 멈췄다.
“승진 발령 건은?”
“철회해 주십시오.”
문이 닫히고, 인사팀장이 전화기를 들었다.
철도공사 감사실 대회의실. 오후 4시 7분.
이지원이 회의 테이블 앞에 섰다. 칠판에는 ‘기록 보존 태스크포스(TF) 신설 안건’이라고 적혀 있었다.
감사실장이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실무 직원 다섯 명이 양쪽으로 흩어져 앉았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열며 말했다.
“TF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현장 검수 기록, 시험 성적서, 사고 조사 보고서의 영구 보존 체계를 구축하는 겁니다.”
감사실장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 번 쳤다.
“보존 연한은.”
“1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하는 안을 내부 규정 개정으로 상정합니다.”
“인력은.”
“초기 4인 체제. 저를 포함해 기록 관리 전담 인력 둘, 현장 자문역 하나.”
감사실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현장 자문역은 누굽니까.”
“박중호 전 검수관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하급 조제사 한 명이 손을 들다가 내렸다.
감사실장이 팔짱을 꼈다.
“건강 상태는 어떤지.”
“이번 주 금요일 퇴원 예정입니다. 의사 소견서에는 일주일 휴식 후 경미한 업무 가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본인이 동의했습니까.”
“어제 면회 가서 확인했습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현장 안전 진단을 월 1회 이상 하게 해 달라고.”
누군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감사실장이 고개를 숙여 노트북 화면을 봤다.
“첫 영구 보존 대상은.”
이지원이 서류 가방에서 복사본 두 묶음을 꺼냈다.
“왼쪽은 이철호 검수관의 1997년 시험 성적서 원본입니다. 오른쪽은 박중호 검수관의 2009년 보고서.”
두 묶음을 나란히 놓았다.
“두 문서가 증명한 동일한 부품 결함은 27년간 은폐됐습니다. 이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TF의 첫 임무입니다.”
감사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가서 잠시 밖을 봤다.
“이철호 검수관은 이 감사관의.”
“아버지입니다.”
감사실장이 돌아서지 않은 채 말했다.
“좋습니다. TF 신설안, 결재합니다. 인력 배치는 오늘 중으로 인사팀에 협조 공문 보내겠습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한 가지 더.”
감사실장이 고개를 약간 돌렸다.
“방금 인사팀에서 연락 왔습니다. 신우진 검수관이 승진을 거부하고 사직서를 냈다고.”
이지원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사유는.”
“후배 검수원 양성 프로그램 제안서를 같이 냈답니다. 본부장님 결재 대기 중.”
이지원이 입술을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손가락으로 서류 뭉치의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감사실장이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손을 들었다.
“오늘부로 기록 보존 태스크포스 정식 발족입니다. 이 감사관님, 초대 팀장 맡아 주십시오.”
이지원이 허리를 곧게 폈다.
“알겠습니다.”
칠판에 적힌 안건 제목 아래, 누군가 분필로 ‘승인’이라고 적었다.
이지원이 1997년 성적서와 2009년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두 묶음의 무게가 손바닥에 실렸다.
“TF의 첫 영구 보존 기록물로 정식 등록합니다.”
감사실장이 결재판에 도장을 찍었다.
오후 5시, 감사원 브리핑룸.
김정환 감사관이 단상에 올랐다. 왼손에는 바인더 하나, 오른손에는 마이크가 아닌 문서 한 장이었다. 플래시가 한 차례 터지고 곧 조용해졌다.
“감사원 특별감사관 김정환입니다. 청문회 결과에 대한 후속 브리핑과 함께, 추가 수사에서 확인된 사실 한 가지를 발표하겠습니다.”
김정환이 바인더를 열었다.
“윤태호 대표의 왼쪽 턱 흉터는 감사원 추적 결과, 10년 전인 2014년 2월 8일 발생한 폭력 사건의 결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윤태호는 대한정밀 공장 품질관리실에서 B4 계열 제동밸브의 시험 성적서 수정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한 품질관리 담당자에게 유리 재떨이를 집어던져 부상을 입혔습니다.”
김정환은 문서를 한 장 넘겼다.
“해당 담당자는 안면 열상을 입었고, 윤태호 자신도 반발 과정에서 왼쪽 턱에 깊은 자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회사 측의 합의금 지급과 개인 간 분쟁으로 둔갑해 공식 기록에서 누락되었습니다. 감사원은 해당 담당자의 진술서와 2014년 2월 10일자 병원 진료 기록을 확보했습니다.”
방청석에서 기자들의 노트북 자판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김정환이 마이크를 바로 잡았다. “흉터는 단순한 과거 상처가 아니라, 부품 시험 성적서 조작이라는 조직적 관행의 폭력적 증거입니다.”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피해자는 현재 어떤 상태입니까.”
김정환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한경숙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피해 담당자는 3년 뒤 퇴사했습니다. 당시 사건을 아는 직원들도 대부분 회사를 떠났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힐 수 있는 것은, 작년 노조에 제보를 넣었던 내부 관계자가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점입니다.”
한경숙은 기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제보자를 만났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USB 하나를 내밀던 그 손을 기억합니다. 그 기록 하나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 청문회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다른 기자가 물었다. “윤태호 측의 항고 가능성에 대한 감사원의 입장은.”
김정환이 대신 답했다. “감사원은 오늘 브리핑 내용을 포함한 모든 수사 자료를 검찰에 송치할 예정입니다. 항고는 법적 절차의 일부일 뿐, 행정적 제재 효력을 중단시키지 않습니다.”
브리핑은 17분 만에 끝났다. 김정환이 바인더를 닫고 한경숙과 함께 단상을 내려갔다. 기자 몇 명이 추가 질문을 위해 복도까지 따라붙었다.
한경숙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말했다. “제보자 신변 보호는 노조가 끝까지 책임집니다.”
다시 걸었다.
저녁 8시, 차량기지 검수실.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환풍기 소리가 낮게 울렸다. 신우진은 검수복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 유성 매직을 꽂았다.
최명식이 검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배님, 벌써 오셨어요? 오늘 청문회 끝나고 집에서 좀 쉬셔도 되는데.”
신우진은 작업 일지를 펼쳤다. “야간 정비 인원 부족하다고 들었다.”
“아, 네. 재호가 연차 냈고— 그런데 선배님, 오늘 진짜…”
최명식이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보다 빠르게 두세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청문회장에서 증언하는 거. 입회 진행관이 검수원 열두 명 부른 거. 그 장면이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아요.”
신우진은 일지에 날짜와 교대조를 적었다. 볼펜이 종이에 걸리는 소리가 잠깐 났다.
“네가 잘했다.”
최명식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오른손으로 뒷목을 한 번 만졌다.
“저도… 앞으로 후배 들어오면 제대로 가르칠게요. 선배님이 저한테 해주신 것처럼.”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부품 하나. 볼트 하나.”
최명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대로. 압니다.”
신우진은 점검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토크 렌치를 서랍에서 꺼내 지정된 위치에 놓고, 교정 일자를 확인했다. 확대경의 렌즈를 천으로 닦았다. 최명식도 옆에서 묵묵히 함께 정리했다. 야간 정비 2팀의 정비원 한 명이 복도를 지나며 인사를 건넸다.
“신 검수관님 수고하셨습니다.”
신우진은 손을 살짝 들어 답했다. 정비원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검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공구 정리를 마친 신우진은 작업 일지를 덮어 책장 위에 올렸다. 벽시계를 보지 않았다. 신호에 맞춰 움직이는 몸이 야간 작업 종료 시간을 알고 있었다.
밤 11시 30분, 차량기지 옆 승강장 끝.
야간 정비가 끝나고 분주하던 정비고 쪽 불빛도 하나둘 꺼졌다. 검수원들이 퇴근하고 승강장은 한산했다. 신우진이 플랫폼 북쪽 끝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레일이 희미하게 빛났다.
멀리서 경적이 짧게 울렸다.
열차의 전조등이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신우진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제시간이었다. 열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통과 선로로 진입했다. 바퀴와 레일이 맞닿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뀌며 가까워졌다.
첫 번째 객차가 지나갔다. 창문 너머로 승객이 보였다. 귀가하는 사람들, 졸고 있는 사람, 휴대폰을 보는 사람.
두 번째 객차. 세 번째. 마지막 객차의 후미등이 접근했다. 빨간 불빛이 어두운 승강장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신우진의 시선은 열차의 후미등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따라갔다. 레일 위로 침묵이 다시 내려앉았다. 아무 문제 없이 정시에 통과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밤 공기가 차가웠다. 내일도 똑같은 시간에 같은 열차가 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메시지였다.
이지원이었다. 교육 자료 목록이라는 제목의 파일 하나였다. 미리 보기 창에 1페이지 요약이 떠 있었다. 검수 절차 표준화 개요, 부품 식별 엔트리 실습, 기록 작성의 원칙.
신우진은 휴대폰을 든 채 고개를 들었다.
텅 빈 철로가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뻗어 있었다. 두 줄의 레일은 어둠 속으로 평행하게 이어졌다. 신우진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작업복 소매를 한 번 당겨 정리하고, 승강장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