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90화
신우진이 방청석에서 일어났다. 왼손에 든 증언서 파일 표지가 형광등 빛에 반사됐다. 이지원이 건넨 서류 봉투에서 꺼낸 지 삼 분이 채 안 됐다.
위원장이 정회 선언 직전의 긴장을 정리하며 탁자 위 서류를 한 번 더 넘겼다. 속기사가 손가락을 멈추고 기다렸다.
신우진이 증언대 앞으로 걸어갔다. 세 걸음 거리에서 멈춰 위원장을 향해 목례했다.
“증거 제출을 요청합니다.”
위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신우진 주무관, 지금 증인 신청은 하지 않으셨습니다만.”
“증언이 아닙니다. 현장 검수원 47명의 공동 증언서를 먼저 제출하겠습니다.”
신우진이 파일을 들어 올렸다. 두께는 20매가 조금 넘어 보였다. 표지에는 'B4-BV-2287 계열 부품 교체 주기 조작에 관한 현장 검수원 공동 증언서'라고 인쇄돼 있었다.
방청석 뒤편에서 기자 한 명이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위원장이 손을 내밀었다. 신우진이 증언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위원장 탁자 앞으로 파일을 건넸다. 보좌관이 받아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위원장이 표지를 넘겼다. 첫 장에 서명 목록이 빼곡했다. 소속 차량기지, 이름, 검수원 등록 번호, 서명 날짜. 47명의 서명이 네 페이지에 걸쳐 이어졌다.
“본 증언서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신우진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첫째, 해당 제동 밸브의 공식 교체 주기는 36개월이나 현장에서는 50개월 이상 사용된 부품이 반복 확인됐습니다.”
둘째 손가락을 접었다.
“둘째, 교체 주기를 넘긴 부품의 검수 기록에는 '적합' 판정이 유지됐고, 그 판정의 근거가 된 시험 성적서에 인장 강도 수치가 동일하게 18.5뉴턴으로 기재돼 있었습니다.”
셋째 손가락을 접었다.
“셋째, 이 패턴은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최소 세 차례 이상 서로 다른 검수원에 의해 목격됐습니다. 개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입니다.”
위원장이 서명 페이지를 조용히 넘겼다. 47개의 이름. 열 개 차량기지. 여섯 개 지역 본부.
법률 대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정장의 소매가 탁자 모서리에 닿았다.
“위원장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위원장이 손바닥을 들어 법률 대리인을 제지했다. 네 페이지 서명을 다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형식적 요건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다만...”
법률 대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증인 사전 증거 제출 원칙 위반입니다. 본 청문회 규정에 따르면 증인은 증언 개시 전까지 모든 증거를 사전에 목록화하여 제출해야 합니다. 이 증언서는 오늘 개회 이후, 정회 중에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절차적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선례가 될 수 있습니다.”
신우진이 대답하려는 순간, 방청석 앞줄에서 이지원이 일어났다. 손에 작은 규정집 한 권을 들고 있었다. 표지가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위원장님, 청문회 운영 규칙 제14조 2항입니다.”
이지원이 규정집을 펼쳤다. 해당 페이지에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증인은 증언 중 필요한 경우 보충 증거를 제출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공동 증언서는 이미 증거 목록에 포함된 1997년 성적서와 2009년 박중호 보고서의 연속성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법률 대리인이 몸을 돌렸다.
“보충 증거 제출권은 증언 중에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신우진 주무관은 아직 증인으로 채택되지도 않았습니다. 증인도 아닌 자가 증언도 하기 전에 보충 증거를 제출하는 것은 규칙의 확장 해석입니다.”
이지원이 규정집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규칙 제14조에는 '증언 중'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증인은 필요한 경우 보충 증거를 제출할 수 있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시점을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통상의 해석이 아닙니다.”
“통상의 해석은 관행일 뿐입니다. 성문 규칙이 우선합니다.”
위원장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속기사가 다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위원장이 규정집을 요청했다. 이지원이 탁자 앞으로 걸어가 건넸다. 위원장이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은 페이지를 읽었다. 옆자리의 인사팀 차장과 법무팀 선임 변호사가 함께 들여다봤다.
삼십 초가량 침묵이 흘렀다.
위원장이 규정집을 덮었다.
“청문회 운영 규칙 제14조 2항에 근거하여, 현장 검수원 47명의 공동 증언서를 본 청문회의 정식 증거로 채택합니다.”
망치 소리가 울렸다.
법률 대리인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위원장을 향해 반 걸음을 뗐다가 멈췄다.
“위원장님, 적어도 증거 채택의 조건으로...”
“변호사님.”
위원장이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을 끊었다.
“규칙은 명확합니다. 이 증거는 채택됐습니다.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법률 대리인이 잠시 서 있더니 몸을 돌려 착석했다.
보좌관 두 명이 증언서 사본을 재빨리 복사하기 시작했다. 한 명이 복사기로 걸어가고, 다른 한 명이 출력물을 정리해 위원 세 사람 앞에 한 부씩 배포했다. 전자 게시판에 새 줄이 추가됐다.
일곱 번째 줄: 현장 검수원 47인 공동 증언서 — 채택.
신우진은 증언대 옆에 서서 증언서 사본이 배포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방청석에서 검수원 세 명이 동시에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위원장이 증언서 사본 한 부를 집어 들며 말했다.
“본 증거의 공식 번호는 AU-2024-0087-07입니다. 증거 목록에 등재했으며, 내일 증언에서 이 증언서의 구체적 내용을 검토하겠습니다.”
속기사가 마지막 문장을 입력하고 손을 멈췄다.
이지원이 조용히 규정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왼손이 가방 지퍼에 닿을 때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곧바로 멈췄다. 그녀는 방청석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고 신우진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신우진은 증언대에서 물러나며 이지원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법률 대리인이 탁자 아래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화면 불빛이 얼굴에 잠시 비쳤다가 사라졌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정면을 응시했다.
위원장이 다음 의제로 넘어가기 위해 서류를 정리했다.
속기사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전 10시 45분. 청문회장 안의 공기가 갑자기 탁해진 듯 숨 쉬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다시 시간을 확인했을 땐 벌써 11시 2분이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문회장 밖 복도로 나왔다.
11시 20분.
위원장이 목탁을 두 번 두드렸다.
“다음 증인. 전국철도노동조합 안전위원회 한경숙 지부장.”
방청석 왼편에서 한경숙이 일어났다. 손에 A4 크기의 묶음 하나가 들려 있었다. 검은색 바인더로 제본된 두꺼운 기록철이었다.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증언대 쪽으로 걸어갔다.
증언대 앞에 서자 위원장이 손을 들었다.
“증인께서 제출하실 자료가 있습니까.”
“네. 노조 안전위원회가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자체 수집한 부품 교체 주기 및 검수 불량 기록철입니다. 정식 증거로 채택을 요청합니다.”
한경숙이 바인더를 위원석으로 건넸다. 사무국 직원이 받아 위원장 앞에 놓았다. 위원장이 첫 장을 넘겼다. 페이지마다 날짜, 부품명, 불량 유형, 검수원 서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작성 주체는 누구입니까.”
“노조 안전위원회 소속 검수원들이 현장 검수 직후 직접 작성했습니다. 노조 내부 문서 관리 절차에 따라 지부장 결재를 거쳐 보관해 왔습니다.”
“원본은 어디에.”
“노조 사무실 문서고에 보관 중입니다. 이것은 공증 사본입니다. 원본 대조는 언제든 가능합니다.”
위원장이 기록철을 넘겼다. 2019년 3월, 2021년 9월, 2023년 4월 탭에 붉은색 플래그가 붙어 있었다.
“붉은 표시는 무슨 뜻입니까.”
“동일한 부품 계열에서 세 차례 이상 반복된 불량 패턴입니다. 모두 B4 계열 제동 밸브.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 설계 기준보다 인장강도가 2.1뉴턴 부족한 상태로 세 번 납품됐습니다.”
윤태호 측 변호사가 몸을 약간 움직였다.
위원장이 메모를 한 줄 적고 고개를 들었다.
“이 기록의 보존 경로를 설명해 주십시오.”
“매월 안전위원회 회의록에 첨부해 지부장 결재를 받습니다. 결재 완료된 원본은 문서고에 연도별로 편철하고, 사본은 국토교통부 정기 안전 감사 제출용으로 별도 보관합니다.”
“제출용 사본과 이 기록의 차이는.”
“없습니다. 동일 문서입니다.”
위원장이 잠시 침묵했다. 좌우 위원들과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방대한 분량입니다. 위원회 사전 검토를 위해 15분간 휴정을 선언합니다.”
목탁 소리. 방청석 뒤편에서 기자 두 명이 노트북을 접었다.
한경숙이 증언대 옆에 서서 기록철 사본을 정리했다.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짧게 손을 들었다.
복도로 나온 윤태호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걸어가고 있었다. 오른쪽에 검은 정장의 측근이 한 걸음 뒤에서 따랐다.
“별장 서류, 오늘 중으로 정리해.”
윤태호의 목소리가 복도에 낮게 깔렸다.
“금고 쪽은 내일 아침에 연다. 그 전에 인수증부터 확보해.”
측근이 짧게 고개를 숙이고 반대편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윤태호는 휴대폰을 내리고 피청문인 측 휴게실로 들어갔다.
자판기 앞에 서 있던 최명식이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7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윤태호 쪽을 보지 않은 채, 오른손으로 이어폰을 빼며 천천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감사실 방청석 근처 벤치. 이지원이 압수수색 영장 신청서 초안을 무릎 위에 펼쳐놓고 있었다.
“이 감사관님, 잠깐.”
최명식이 이지원 옆에 앉았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정도 높았다.
“방금 복도에서요. 윤태호가 누구한테 ‘별장 서류 오늘 정리하라’고 했어요. 금고 내일 열 거라고도.”
이지원이 영장 신청서에서 시선을 들었다. 오른쪽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직접 들었어요?”
“네. 자판기 앞에서요. 거의 7, 8미터쯤?”
이지원이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별장 서류, 금고, 인수증이라고 적었다. 시간은 현재 시각을 시계로 확인해 기입했다.
“다른 말은.”
“인수증부터 확보하라고요. 그다음은 휴게실로 들어가서 못 들었어요.”
이지원이 메모지를 영장 신청서 옆에 끼워 넣었다. 추가 기재 사유란에 작게 별표를 그리고 메모의 내용을 요약해 적었다.
“고마워요. 이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최명식이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뒷목을 오른손으로 한 번 만졌다.
윤태호는 휴게실 문 너머로 복도를 한 번 응시했다. 최명식은 이미 벤치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15분 후.
위원장이 목탁을 두 번 두드렸다.
“청문회를 속개합니다.”
한경숙이 증언대 옆으로 물러서고, 위원장이 기록철을 들어 올렸다.
“위원회는 전국철도노동조합 안전위원회 기록철을 검토했습니다. 제출된 2015년부터 2024년까지의 기록에서 B4 계열 제동 밸브 부품에 대해 2019년 3월, 2021년 9월, 2023년 4월, 3개년에 걸쳐 동일한 인장강도 부족 현상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원장이 기록철의 붉은 플래그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더불어 이 패턴은 직전 증인 신우진이 제출한 현장 검수원 47명 공동 증언서의 기술 내용과 일치합니다. 이에 따라 기록철을 증거번호 CH-90-04로 정식 채택합니다.”
사무국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전자 게시판에 새로운 줄이 올라갔다.
CH-90-04 — 전국철도노동조합 안전위원회 검수 불량 기록철 (2015-2024).
위원장이 시선을 돌려 윤태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피청문인 측에 명령합니다. 방금 채택된 기록에서 확인된 2019년, 2021년, 2023년 세 차례 납품 건과, 이와 동일한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로 생산된 모든 부품의 로트별 시험 성적서를 전면 제출하십시오. 제출 기한은 내일 오전 10시까지입니다.”
윤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날 듯 움직였다. 변호사가 팔을 짚어 말렸다.
“위원장님, 자료의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합니다. 8년간의 특정 제조사 전체 시험 기록을 하루 만에 취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물리적 어려움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24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위원장의 목소리에 여운이 없었다.
“본 청문회는 오늘부로 납품사 태흥미래의 모든 부품 시험 기록을 공개 검증 대상으로 전환합니다.”
윤태호의 얼굴에서 혈색이 가시는 것이 방청석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오른손이 책상 모서리를 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이지원이 무릎 위의 압수수색 영장 신청서를 집어들었다. 메모지가 끼워진 페이지를 반으로 접어 가방 안쪽 서류칸에 넣었다.
위원장이 다시 목탁을 들었다.
“오늘 청문회는 이것으로 종료합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속개됩니다.”
방청석에서 검수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우진은 가슴 주머니에 넣어둔 집단 증언서 사본을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게시판을 올려다봤다.
전자 게시판에 분홍색으로 새로 채택된 증거번호 CH-90-04가 깜빡였다.
CH-90-03 바로 아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