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91화

위원장이 목탁을 두드렸다.

“청문회를 속개합니다.”

방청석의 검수원들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전자 게시판에는 CH-90-04가 여전히 분홍색으로 깜빡인다. 신우진은 증인석을 떠나 방청석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두꺼운 파일 한 권.

“위원장님, 추가 증거를 신청합니다.”

위원장이 손을 들었다.

“어떤 증거입니까.”

“철도공사 정비팀장 박중호가 9년 전 제출한 품질 의혹 보고서입니다.”

이지원이 파일을 들어 올렸다. 가죽 재킷을 입은 박중호가 방청석 후열에서 일어선다. 손에는 갈색 서류 봉투.

“보고서 번호 QC-2009-0031. 부품 번호 TH1187-04.”

법률 대리인이 즉시 일어섰다. 은색 넥타이 핀이 조명에 반짝인다.

“위원장님, 이의 있습니다.”

위원장이 시선을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9년 전 보고서는 이미 종결된 사안입니다. 해당 부칙 조항에 따르면 부품 시험 성적서의 보존 책임은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합니다. 보존 연한이 지난 문서를 현재 청문회 증거로 채택하는 것은 절차상 중대한 하자입니다.”

법률 대리인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예정된 문장을 읽는 듯했다.

“더불어 해당 보고서는 당시 정식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작성자가 임의로 보관한 문서일 뿐, 공식 기록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박중호가 봉투를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얘진다.

신우진은 그 손을 봤다. 토크 렌치를 쥐던 정비반장의 손이었다.

위원장이 이지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감사실 측 의견은.”

이지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보존 연한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지원이 파일을 펼쳤다. 구매 기록 복사 페이지가 방청석에서도 보인다.

“철도공사 구매처는 현재까지 동일한 부품 번호 TH1187-04를 태흥미래에서 구매하고 있습니다. 2015년, 2018년, 2021년, 2023년. 네 차례의 정식 구매 계약이 존재합니다.”

페이지가 한 장씩 넘어갔다.

“법률 대리인께서 말씀하신 부칙 조항은 부품 시험 성적서의 보존 책임을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품의 구매가 현재도 진행 중이라면, 그 협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법률 대리인이 다시 일어섰다.

“감사관님, 보고서 작성 시점은 2009년입니다. 현재 구매 계약과 직접 연결된다는 증거는—”

“부품 번호.”

이지원이 말을 끊었다. 파일을 책상 위에 평평하게 펼친다.

“TH1187-04.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 9년 전 보고서에 기록된 부품 식별자와 현재 납품되는 부품의 식별자가 완전히 일치합니다.”

법률 대리인이 잠시 멈췄다. 윤태호가 옆에서 작게 기침한다.

“부품 번호가 같다는 것은 납품사가 같다는 뜻일 뿐입니다. 부품 자체의 동일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장강도를 확인하시죠.”

이지원이 파일 안쪽에서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9년 전 보고서에 기록된 부품의 인장강도는 16.4뉴턴입니다. 오늘 아침 위원회가 채택한 노조 안전위원회 기록철. 거기에 기록된 2021년, 2023년 동일 부품의 실측 인장강도도 16.4뉴턴입니다. 설계 기준 18.5뉴턴보다 2.1뉴턴 부족하죠.”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부품 번호, 제조사 코드, 금형라인, 인장강도 부족치. 네 가지가 모두 일치합니다. 이것이 우연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방청석에서 검수원 하나가 작게 숨을 들이쉰다. 한경숙이 팔짱을 낀 채 이지원을 올려다봤다.

위원장이 손을 올렸다.

“박중호 팀장. 보고서 원본을 증언대에 제출해 주십시오.”

박중호가 걸어나왔다. 구두 소리가 무겁게 울린다.

증언대 앞에 서자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한 A4 용지. 왼쪽 상단에 빨간색 ‘보고서 반려’ 도장이 찍혀 있다. 도장 아래에는 날짜 — 2009년 10월 14일.

박중호가 서류를 증언대 위에 올려놓았다.

“9년 전 이거였고, 지금도 이거다.”

짧은 한마디였다. 위원장이 서류를 집어 든다.

법률 대리인이 다시 일어나려 했다. 윤태호가 손목을 짚었다. 변호사가 자리에 앉는다.

“위원장님, 잠시 법률 검토가 필요합니다.”

윤태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반복해서 톡톡 두드렸다.

“논쟁의 중심인 시행령 부칙은 명확한 판례가 정리되지 않은 영역입니다. 위원회가 성급하게 증거를 채택할 경우, 추후 권리 구제 절차에서 중대한 하자로 지적될 소지가 있습니다.”

법률 대리인이 보충했다.

“피청문인 측은 문제의 부칙 조항 중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한다’는 문구에 주목합니다. 이는 보존 연한이 획일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음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9년 전 보고서의 보존 책임이 현재까지 유지된다는 해석은 지나친 확장입니다.”

위원장이 잠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지원이 다시 한 걸음 나간다.

“위원장님, 신우진 검수관의 기술적 소견을 요청합니다. 9년 전 보고서와 현재 사고 부품 간의 기술적 연관성은 현장 검수원이 가장 정확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위원장이 끄덕였다.

“증인 신우진, 증언대에 나와 주십시오.”

신우진이 일어났다. 가슴 주머니에 접어 넣은 실측 데이터 차트를 꺼내 든다. 증언대까지 걸어가는 동안 생각은 없었다. 이미 리허설한 내용이다.

증언대에 서자 왼손으로 차트를 펼쳤다.

“무정차 통과 사고 차량에서 탈거한 부품. 부품 번호 TH1187-04.”

손가락이 차트의 첫 번째 줄을 짚었다.

“인장강도 16.4뉴턴. 설계 기준보다 2.1뉴턴 부족.”

두 번째 줄.

“패킹 재질 HNBR. 설계 기준 EPDM이 아닙니다.”

세 번째 줄.

“마모 패턴. 표면 균열 발생 지점이 9년 전 보고서에 기재된 위치와 동일합니다.”

신우진이 차트를 내려놓았다.

“부품 번호와 불량 패턴이 일치합니다.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법률 대리인이 일어났다. 넥타이 핀을 만지작거린다.

“증인께서 말씀하신 불량 패턴의 일치는 증인의 현장 경험에 근거한 주관적 판단입니다. 계측 장비의 교정 기록, 측정 환경의 온도와 습도, 부품의 실제 사용 시간을 모두 통제한 비교가 아닙니다.”

“측정치는 같습니다.”

“측정치가 같아도 9년의 시간 차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보존 연한이라는 것은 그 시간 차이로 인해 증거의 신뢰성이 저하된다는 법의 판단입니다.”

잠시 정적.

위원장이 목탁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놓았다.

“본 위원회는 다음 두 가지 쟁점에 대한 법률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첫째, 해당 부칙 조항의 보존 연한 해석. 둘째, 9년 전 보고서와 현재 부품 간의 기술적 동일성 입증 수준.”

방청석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에 따라 30분간 정회를 선언합니다.”

목탁이 울렸다.

신우진은 차트를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박중호가 증언대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열었다.

방청석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박중호가 봉투를 신우진 쪽으로 밀었다.

“봐.”

신우진이 봉투에서 보고서 사본을 꺼냈다. 9년 전 종이의 눅눅한 냄새가 났다. 첫 장 상단 — ‘품질 의혹 검토 요청’. 결재란은 비어 있었다. 마지막 장에 손글씨 메모.

`반려. 구매처 협의 필요.`

신우진이 메모를 짚었다.

“누구 글씨입니까.”

“당시 구매처 과장 김기환.”

박중호가 짧게 답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복도 벽에 붙은 좁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검색창에 판례 번호를 입력 중이었다.

“위원장은 기울고 있다.”

이지원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문제는 법적 확신이야. 보존 연한 해석 차이를 근거로 한 상고 사례가 세 건 있어. 전부 합의부 판결이라 위원회가 함부로 건너뛸 수 없는 영역이 됐어.”

박중호가 보고서 한 페이지를 펼쳤다. 중간쯤에 있는 부품 사진이 드러난다.

“이 부품. 지금도 창고에 있을 거다.”

“아직 있다고요.”

“2009년 검사한 원본 부품 일곱 개. 반려되면서 폐기 지시가 났는데, 내가 빼돌렸다.”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지원이 타이핑을 멈춘다.

박중호가 보고서를 접으며 덧붙였다.

“창고 C동 지하 1층. 검수원 라커 뒤쪽에 봉인 상자로 보관 중이다. 개인 자물쇠 걸어놨어.”

“왜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언젠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9년 전에도 불량이었고, 지금도 불량이다.”

박중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부품 번호 바뀔 때마다 납품사만 바뀌었지, 속은 똑같더라고.”

이지원이 노트북을 돌렸다. 화면에 판례 요약이 떠 있다.

“대법원 2012다87654 판결. 보존 연한 조항의 해석은 ‘문서의 형식적 보존 기한이 지났더라도 해당 문서가 입증하려는 사실관계가 현재 진행 중인 절차의 직접적 쟁점과 연관될 경우 증거 능력을 부인할 수 없다’고 판시했어.”

이지원이 스크롤을 내렸다.

“다만 이 판결, 원심에서 증거 능력이 인정됐다가 상고심에서 파기환송됐어. 보존 연한을 넘긴 문서에 대한 법원의 태도가 통일되지 않았다는 게 쟁점이었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신우진이 차트를 다시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위원회가 지금 결정하지 못하는 건 법적 리스크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보존 연한 조항 밖에서 연결고리를 더 만드는 거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덮었다.

“속개되면 위원장은 아마 참고 자료로 분류하고 정식 채택을 보류할 거야. 지금 상태론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니까.”

“참고 자료면 충분하다.”

신우진이 차트 이면에 볼펜으로 메모를 적었다.

“보고서가 참고 자료로 인정되면 위원회는 부품 번호 TH1187-04에 대한 질문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공식화되면 보존 연한 조항의 모호함은 윤태호 쪽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거다.”

박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이 시작되면 답해야 한다. 답할수록 구멍이 보일 거다.”

복도 반대편에서 문이 열렸다. 윤태호가 법률 대리인과 함께 나왔다. 윤태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다. 다만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신우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윤태호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가며 짧게 던졌다.

“자네도 이제 그만 쉬어도 될 텐데.”

신우진이 답하지 않았다. 차트를 접어 가슴 주머니에 다시 넣을 뿐이었다.

법률 대리인이 윤태호의 팔꿈치를 잡으며 속삭였다.

“판례를 뒤집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보존 연한 논쟁만으로 오늘 결정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윤태호의 목소리는 낮고 정확했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발소리만 남았다.

방송 스피커에서 정회 종료 알림이 울렸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접어 가방에 넣고 신우진을 향해 돌아섰다.

“속개되면 바로 질문해. 부품 번호를 청문회장 전체가 기억하게 만들어.”

“알고 있습니다.”

신우진이 청문회장 문을 향해 걸었다.

박중호가 봉투를 다시 움켜쥐었다.

“이번엔 묻힐 일 없다.”

세 사람이 차례로 청문회장으로 들어갔다.

위원회 자리가 채워지고 있었다. 사무국 직원이 전자 게시판을 점검 중이다. 방청석의 검수원들도 하나둘 자리를 찾았다.

신우진은 방청석 앞줄에 앉았다. 가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차트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지원이 옆자리에 노트북을 올려두었다. 박중호는 후열에서 서류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위원장이 목탁을 두드렸다.

“청문회를 속개합니다. 정회 중 법률 검토를 진행했습니다. 쟁점은 앞서 쟁점이 된 시행령 부칙 규정의 보존 연한 해석이었으며, 이에 대한 판례가 통일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위원장이 숨을 한 번 들이쉰다.

“이에 본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합니다. 박중호 팀장이 제출한 품질 의혹 보고서는 정식 증거가 아닌 참고 자료로 인정합니다. 증거 채택 여부는 추후 법률 검토를 거쳐 결정하겠습니다.”

윤태호의 입가에 미세한 선이 그어졌다. 미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법률 대리인이 펜을 내려놓았다.

정적.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원장님.”

위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참고 자료로도 충분합니다. 부품 번호 하나만 보여드리면 됩니다.”

윤태호의 미소가 사라졌다.

무정차 통과9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