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92화
청문회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신우진이 말을 마치자 윤태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법률 대리인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톡, 두드렸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듯한 움직임.
위원장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증인, 참고 자료로도 충분하다고 하셨죠. 구체적인 부품 번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신우진이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 세 개를 폈다.
“TH1187-04.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
속기사의 자판이 따라붙었다. 전자 게시판에 세 줄이 떠올랐다.
“이 셋은 9년 전 보고서와 현재 사고 부품에서 완전히 일치합니다.”
신우진이 가슴 주머니에서 차트를 꺼내 펼쳤다.
“여기 있습니다. 현장 검수원들이 직접 잰 마모도 실측 데이터입니다.”
사무국 직원이 건네받았다. 위원회 탁자마다 여섯 부가 돌았다. 동시에 전자 게시판에 TH1187-04의 단면도와 수치표가 띄워졌다.
신우진이 화면을 가리켰다.
“설계 기준 인장강도는 18.5뉴턴. 시험 성적서상 기재된 값도 18.5입니다.”
표 하단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현장 실측값은 16.4. 차이는 2.1뉴턴. 허용 오차 ±0.3의 일곱 배입니다.”
위원 셋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 부품이 설계 기준을 통과하려면, 성적서에 적힌 값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치라는 뜻입니다.”
신우진의 음성은 평온했다.
방청석. 박중호가 이를 악물었다.
“16.4. 그때랑 똑같아.”
위원장이 자료 더미를 한 장 넘겼다.
“증인, 누가 측정했습니까.”
“현장 검수원 3인이 각자 다른 장비로 측정했습니다. 측정일은 지난달 17일. 장비 번호와 교정 이력은 별지에 첨부했습니다.”
위원장이 별지를 찾아 넘겼다. 좌측 법무팀 선임이 목록을 훑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호 측 법률 대리인이 일어났다.
“반대 심문을 청합니다.”
“허가합니다.”
대리인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증언대 쪽으로 걸어왔다. 청문회 규정집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증인. 현장 측정 장비의 교정 기록은 어디에 보관됩니까.”
“본사 장비관리시스템에 등록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시 가능합니까.”
신우진이 차트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별지 3매. 장비 번호, 교정일, 교정 기관, 유효기간이 표로 빼곡했다.
“이미 제출했습니다. 세 대 모두 측정일 기준으로 유효기간 내 교정입니다.”
대리인이 별지를 집어 들었다. 몇 초 들여다보더니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측정 환경 차이는 반영하셨습니까. 현장과 공장 시험실은 온도, 습도, 진동 조건이 다르지요.”
“부품 규격서의 측정 환경 범위는 온도 15~25도, 습도 45~65%. 현장 측정 당일은 21도, 습도 52%였습니다. 범위 내입니다.”
대리인의 입이 잠시 닫혔다.
“그렇다면……”
이내 화제를 틀었다.
“해당 규정의 별표 조항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부품 시험 성적서의 보존 책임은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한다.’ 보존 연한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대리인이 청문회장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계약서 부속 합의서상 보존 기간은 ‘최소 5년’. 7년 전 성적서 폐기는 이 조항에 따른 적법한 조치였습니다.”
그가 신우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증인은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 성적서를 근거로 현 부품의 결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보존 연한이 지난 문서가 없다고 부품에 문제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나요.”
방청석 뒤편. 기자들의 노트북 타자 속도가 빨라졌다.
신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존 연한이 ‘최소 5년’이라면, 그건 폐기 의무 조항이 아닙니다.”
대리인의 눈썹이 치솟았다.
“5년 이후 폐기해도 된다는 건, 보존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폐기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었습니다.”
신우진이 방청석 쪽으로 손을 폈다.
“박중호 팀장의 9년 전 보고서.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같은 부품 번호, 같은 제조사 코드, 같은 금형라인. 9년 묵은 문서가 현존합니다. 폐기가 불가피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박중호가 벌떡 일어났다.
“내 보고서에도 인장강도 16.4로 찍혀 있다. 9년 전에도 불량, 지금도 불량. 그게 증거야.”
위원장이 두 손을 모았다.
“증인, 한 가지만 더 확인하겠습니다. 현장 장비 교정 유효기간 관리는 누가 합니까.”
“장비관리시스템이 자동 알림을 발송합니다. 만료 30일 전, 7일 전, 당일. 세 번입니다. 시스템에 로그가 전부 남습니다.”
“그 로그의 제출이 가능합니까.”
“감사실에 요청하시면 열람할 수 있습니다.”
좌측 법무팀 선임이 위원장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원회는 장비관리시스템 로그를 감사실에 요청하겠습니다. 아울러……”
위원장의 시선이 이지원을 향했다.
“방금 인용된 조항, ‘보존 책임은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한다’는 조문의 해석에 대해 감사실의 공식 유권해석을 요청합니다. 지금 가능합니까.”
이지원이 일어났다. 작은 메모지 한 장을 쥐고 있었다. 청문회 정회 시간에 확보한 판례와 해석문 초안이었다. 왼손으로 메모를 접어 책상에 내려놓고 허리를 곧게 폈다.
“가능합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해당 조문의 입법 취지는 ‘증거인멸 방지’. 보존 책임을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게 한 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폐기를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이지원의 왼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최소 5년’은 폐기 허가 기준이 아닙니다. 보존 의무의 하한선이죠. 따라서 ‘5년이 경과했으므로 폐기했다’는 주장은 법 취지를 오해한 것입니다.”
법률 대리인이 손을 들었다.
“위원장님, 이의 있습니다. 유권해석은 감사실장 결재 문서여야 합니다.”
“감사실장과 유선 협의를 마쳤습니다. 공식 문서는 오늘 중 제출됩니다.”
이지원이 받자 법률 대리인의 손이 내려갔다.
위원장이 목탁을 두드렸다.
“위원회는 감사실의 유권해석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7년 전 TH1187-04 관련 시험 성적서 폐기 경위에 대한 별도 조사를 본 청문회 의제로 추가합니다. 사무국은 관련 자료를 1주일 내 취합해 주십시오.”
속기사의 자판 소리가 멎었다. 기록이 완료된 순간이다.
이지원이 메모지에 마지막 한 줄을 더 적었다. 청문회 공식 요청 문서 번호가 될 기록이었다.
위원장이 망치를 들었다.
“오늘 청문회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속개는 내일 오전 10시.”
망치 소리가 울렸다.
복도.
신우진이 청문회장 문을 밀고 나왔다. 오른손으로 증인 신분증을 풀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신우진.”
한경숙이 벤치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갈색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겉면에는 아무런 표기도 없었다.
“이거 받아.”
신우진이 봉투를 건네받았다. 얇았다. 안쪽에 종이 몇 장이 들었다.
“뭐죠.”
“익명 제보야. 어젯밤 노조 사무실 문 밑으로 들어와 있었어. 특정 납품 로트 번호별로 성적서 조작 의심 사례가 날짜별로 적혀 있어. 검토해 봐.”
한경숙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노조가 확인 가능한 선에서 검증은 끝냈다. 팩트다.”
신우진이 봉투를 반으로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품 안에서 차트 모서리가 바스락, 접혔다.
“내일 청문회 전까지 훑어두겠습니다.”
한경숙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혹시 모르니까 사본 만들어 둬. 우리 쪽은 확보했고.”
“알겠습니다.”
한경숙이 돌아서서 청문회장 쪽으로 걸었다. 방청석에 두고 온 물건을 챙기러 가는 참이었다.
최명식이 복도 반대편에서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선배님, 아, 저……”
“뭐.”
최명식이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이지원이 복도 끝에서 감사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감사관님한테 전할 게 있어서요.”
그 말과 동시에 이지원의 통화 목소리가 복도에 낮게 울렸다.
“아닙니다, 그 파일은 제가 직접 승인했습니다. 접근 기록을 다시 확인해 보세요.”
이지원이 휴대폰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목의 메탈 시계가 형광등 빛을 튕겨냈다.
최명식이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지금은 안 되겠다……”
“뭔데 그래.”
“그, 게임 길드원이랑 마지막 통화할 때……”
이지원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지금 청문회장입니다. 복귀하면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이지원이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표정은 굳어 있었다. 최명식이 한 걸음 다가서려던 순간, 청문회장 안쪽에서 안내 방송이 울렸다.
“청문회 관계자분들께 안내드립니다. 내일 오전 10시 속개 예정이오니 증인 및 참고인께서는 9시 30분까지 입장 등록을 완료해 주십시오.”
방송이 끝나자 복도의 인원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명식이 벤치에 털썩 앉았다. 휴대폰을 꺼내 채팅 로그를 올렸다.
“다음 휴회 땐 무조건 말한다……”
신우진이 청문회장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가슴 주머니 속 봉투의 무게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복도 끝. 이지원이 다시 휴대폰을 귀에 대고 통화를 시작했다. 굳은 얼굴 그대로, 휴대폰을 귀에 바짝 붙인 채 신우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감사실입니다. 긴급 보고가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다.
신우진이 걸음을 멈췄다.
이지원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휴대폰을 꼭 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