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93화
복도는 한산했다. 형광등 불빛이 긴 복도의 리놀륨 바닥을 희뿌옇게 덮고 있었다. 저 멀리서 청문회장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벽을 타고 흘러왔지만 이쪽은 마치 진공 상태처럼 고요했다. 이지원이 휴대폰을 귀에서 떼자마자 최명식이 그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구겨진 넥타이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감사관님, 지금 바로……”
신우진이 가로막았다. 왼손을 공중에 들어 올리는 동작은 느렸지만 그 손바닥이 그리는 평면은 단호했다.
“숨 먼저 고르고.”
최명식이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물이 입가로 흘러내렸지만 닦을 생각도 못 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플라스틱 병이 이빨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게임 길드원…… 그러니까 태흥미래 회계팀에서 일하는 친군데, 아까 마지막 메시지가 왔어요.”
“내용.”
“사장님 별장, 부엌 찬장 안쪽에 가계부가 있다는 거예요.”
이지원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 복도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위치.”
“강원도라고만…… 평창인가 횡성인가. 거기까진 확실하지 않아요. 그리고 친구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습니다.”
이지원이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손끝이 액정에 닿자 화면이 켜졌다.
“왜 끊었는지.”
“내부 감사가 시작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대요. 무서워진 거죠. 혼자 빠져나온 것 같아요, 팀 단톡방도 나가고.”
최명식의 목소리는 제보라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갈라져 있었다. 신우진이 최명식의 팔을 짚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최명식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증거.”
최명식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채팅 로그 화면이었다. 액정에 난 가느다란 금이 대화창을 가로질렀다.
마지막 열두 줄. 부엌 찬장, 붉은 장부, 이중 바닥이라는 단어가 번갈아 나타났다. 타임스탬프 간격이 점점 좁아지다가 마지막 메시지에서 멈춰 있었다.
이지원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엄지가 아래로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서면으로 제출하세요. 전문 그대로.”
“네, 바로.”
최명식이 벤치로 달려가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지퍼가 걸려서 두 번이나 당겨야 열렸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지원은 이미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박혔다. 신우진이 따라붙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잠시 겹쳐졌다가 다시 갈라졌다.
“청문회 대기실로 갑니다. 15분.”
대기실 문을 닫자마자 이지원이 노트북을 열었다. 문 닫히는 소리가 허공에서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탁자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지는 2초 동안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한 번 두드렸다.
“감사실입니다. 윤태호 법인카드 사용 내역, 2021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전건 전송하세요.”
노트북 화면에 엑셀 파일이 열렸다. 행과 열이 빽빽하게 채워진 숫자들이 스크롤을 따라 위로 밀려 올라갔다. 이지원이 필터를 걸었다. 마우스 클릭 세 번.
사용처 — 강원도.
열두 건이 걸렸다.
평창군 소재 주유소 세 건. 횡성의 한우 전문점 한 건. 평창읍의 마트 네 건. 그리고 대관령면의 부동산 관리업체 결제가 네 건. 결제 금액은 매달 비슷했고 결제일은 대부분 금요일 저녁이었다.
“관리업체명.”
이지원이 마우스를 올렸다. 커서가 해당 셀에서 깜빡였다.
“태산자산관리.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334-7.”
신우진이 탁자 왼쪽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는 이미 저장되어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박중호 팀장님.”
“어, 와 있나.”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배경음으로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9년 전 보고서 원본,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내 손에.”
“청문회 증거 제출 절차 확인해 주십시오. 원본 실물이 필요합니다.”
“알았다.”
짧은 한 마디에 상황을 전부 파악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전화를 끊었다.
이지원이 감사실에 이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대기실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제목은 '긴급 증거보전 및 압수수색 영장 신청'.
첨부 파일은 세 개. 법인카드 내역. 출장 기록 대조표. 최명식의 채팅 로그 캡처. 각 파일명 끝에 시각이 찍혀 있었다.
“주소 특정됐습니다.”
신우진이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지도 위에 빨간 핀이 박혀 있었다.
“윤태호 본인 소유.”
“아닙니다. 태산자산관리가 2013년 매입한 부동산이고, 윤태호가 2015년부터 관리비를 납부 중. 명의는 회사지만 실사용자가 윤태호인 건 출장 일정과 결제 시점으로 입증 가능합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주머니에서 나오면서 조끼 단추 하나를 건드렸다.
“압수수색 가능한가.”
“영장 청구합니다. 긴급 증거보전 사유로. 부엌 찬장 이중 바닥에 은닉된 회계 장부 존재, 내부 제보자의 증언, 법인카드 결제 패턴까지 하나로 묶어서.”
이지원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메일이 발송되었다. 화면에 '전송 완료'라는 글자가 떴다가 사라졌다.
잠깐의 침묵.
대기실 벽에 걸린 둥근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렸다. 14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지 않고 신우진을 돌아보았다. 노트북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신 검수관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신우진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20년 전. 제 아버지가 이철호 검수관이었습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 움직임엔 속도가 없었다.
“TH1987-04 부품. 지금의 B4-BV-2287과 같은 계열, 같은 금형 라인입니다. 아버지는 1998년 4월, 동일한 인장강도 부족을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배상호 당시 검수과장이 일주일 만에 반려했고, 아버지는 전보됐습니다. 사유는 허위 보고.”
이지원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러나 음절과 음절 사이의 간격이 평소보다 좁았다.
신우진의 왼손 검지가 조끼 주머니 위에 올라갔다. 직사각형으로 약간 부풀어 오른 부분——담배 케이스였다.
“보고서 사본이 남아 있습니까.”
“물류창고 B동 지하 2층 기록보존소에 보관 중입니다. 분류 번호 PC-1998-042.”
“증거로 채택할 수 있나.”
“오늘 청문회에서 추가 신청할 겁니다. 9년 전 박중호 팀장 보고서와 20년 전 아버지 보고서가 동일한 결함 패턴을 입증하면——보존 연한은 더 이상 쟁점이 아닙니다. 의도적 은폐의 연속성이 증명되니까.”
신우진이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손바닥이 바지 주름을 눌렀다가 떼어졌다.
“좋다.”
바로 그때였다. 방송이 울렸다. 천장에 박힌 스피커에서 잡음이 섞인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청문회 관계자분들께 안내드립니다. 15분 후 청문회를 속개하오니 증인 및 참고인께서는 입장 등록을 완료……”
이지원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탁자 위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무판을 통해 대기실 전체로 퍼졌다.
“감사실입니다. 네. 네. 발부됐습니까.”
잠시 듣고 있던 이지원이 휴대폰을 내렸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영장 발부됐습니다. 대관령면 별장. 2시간 내 집행 예정.”
신우진이 증인석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두 밑창이 바닥을 밀어내는 소리가 짧고 단단했다.
“돌아오는 청문회에서 나는 보존 연한을 문다.”
“어떻게.”
“철도안전법 시행령 부칙 제12조 3항.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한다'는 조문 자체가 함정입니다. 협의 대상은 보존 기간이지 폐기 시점이 아니다.”
“판례 받침은.”
“대법원 2012다87654. 보존 연한이 지난 문서라도 현재 진행 중인 절차의 직접적 쟁점과 연관될 경우 증거 능력을 부인할 수 없다.”
이지원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숨은 들이마셔지자마자 바로 멈췄다.
“그걸 어떻게.”
“어젯밤 읽었다.”
신우진이 증언대 쪽 문을 열었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났다.
“법률 대리인이 보존 연한을 들고 나오는 순간, 그 판결문을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당신은 별장 압수수색 진행 상황만 확인해.”
이지원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방청석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랐다. 대기실 문이 닫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신우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신우진은 청문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위원장이 목탁을 두 번 두드렸다. 나무가 나무를 치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청문회장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청문회를 속개합니다. 증인 신우진, 증언대에 착석해 주십시오.”
신우진이 증언대에 섰다. 오른손에 A4 크기의 서류 한 묶음. 종이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철도안전법 시행령 조문. 판례 요약. 보존 연한 관련 감사실 유권해석 공문.
윤태호가 피감사인석에서 손가락으로 턱선을 쓸었다. 넥타이 매듭이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법률 대리인이 귀에 대고 짧게 속삭였다.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위원장이 신우진을 보았다.
“증인. 보존 연한 쟁점에 대해 추가 의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신우진이 서류 첫 장을 들었다. 종이가 공기 중에서 바스락거렸다.
“철도안전법 시행령 부칙 제12조 3항은 보존 책임을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한다'고 규정합니다. 이 조문은 보존 기간을 협의하라는 의미입니다. 폐기를 허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법률 대리인이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짧은 마찰음을 냈다.
“위원장님, 이의 있습니다. 증인은 법률 전문가가——”
“판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우진이 끊었다. 그 목소리는 이의를 자르고도 남을 만큼 정확한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법원 2012다87654. 보존 연한이 경과한 문서라도 현재 청문회의 직접적 쟁점과 관련될 경우 증거 능력이 인정됩니다. 1997년, 2009년, 2024년 부품 모두 동일한 제조사 코드 DH, 금형라인 2A입니다. 결함 수치 16.4뉴턴으로 일치합니다. 보존 연한은 폐기 명령이 아닌 보존 의무의 하한선입니다.”
위원 3명이 동시에 메모를 시작했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엇박자로 이어졌다. 중앙에 앉은 위원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법률 대리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넥타이를 한 번 만지고 나서였다.
“기술적 연속성과 법적 증거 능력은 별개의——”
“동일한 위반 코드 T-16.4가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패킹 재질 불일치 HNBR도 동일합니다. 기술적으로 같은 부품입니다. 기술적 사실이 증거 능력을 결정합니다.”
방청석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누군가 기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음이 재킷 주머니 안에서 옷감을 타고 번졌다.
화면을 확인한 이지원이 숨을 들이마셨다.
사진 한 장.
부엌 찬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찬장 안쪽 벽면의 나뭇결이 선명했다. 이중 바닥이 들려 있고, 그 안에 붉은 표지의 장부 세 권이 포개져 있었다. 장부 겉면에 수기로 쓰인 글씨. 검은 유성 매직의 획 끝마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2015-2017 회계', '2018-2020 회계'.
'2021-2024 회계'.
이지원이 방청석에서 신우진 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올렸다. 그 각도는 5도 남짓, 누군가 눈치채기엔 너무 작은 움직임이었다.
신우진이 증언대에서 그 시선을 받았다. 손에 쥔 서류를 한 번 내려다봤다가 다시 들었다.
말을 이었다.
“1997년 4월, 당시 검수관 이철호가 동일한 부품에 대해 인장강도 부족을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PC-1998-042호 보고서입니다. 오늘 이 보고서의 증거 채택을 추가로 신청합니다.”
위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신우진을 직시했다.
“이철호 검수관은 증인의 어떤 관계입니까.”
“저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잠시 멈췄다. 청문회장의 공기가 그 멈춤 속에서 굳어졌다.
“감사실 이지원 감사관의 선친입니다.”
청문회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방청석의 웅성거림이 멎고 피감사인석의 서류 넘기던 소리도 사라졌다. 위원들 사이에서 누군가 펜을 내려놓는 소리만 작게 울렸다.
이지원은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었다. 화면은 여전히 켜진 채였다. 붉은 장부의 사진이 방청석의 어두운 조명 아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손가락 사이로 액정의 빛이 새어나와 손등의 핏줄을 옅게 비추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