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99화
위원장이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봤다. 종이 모서리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속기사가 자판에서 손을 떼었다. 네 손가락이 공중에 반쯤 올라간 채 멈췄다.
“본 합동 청문회는 최종 결론을 다음과 같이 확정합니다.”
위원장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천장 스피커로 퍼졌다. 평소보다 반 박자 느린 속도였다.
“첫째, 납품사 태흥미래에 대한 영구 입찰 자격을 박탈합니다. 둘째, 본사 구매처 임원 4인에 대한 형사 고발 및 징계 절차를 즉시 개시합니다.”
신우진은 방청석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셋째, 2017년 11월 1일 탈선 사고와 금번 무정차 통과 사고는 동일 로트 부품 B4-BV-2287의 인장강도 결함에 기인한 것으로 공식 인과를 확정합니다.”
스크린의 대조표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2009와 2024. 같은 숫자.
청문회장이 술렁였다. 방청석 뒤쪽에서 기자 한 명이 노트북을 급히 열었다. 경첩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피청문인석에서 윤태호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왼손 약지의 금색 인장 반지가 형광등 빛을 받아 한 번 깜빡였다.
변호사가 고개를 숙였다. 은색 커프링크스가 탁자 아래로 사라졌다.
위원장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상으로 본 위원회의 결정을 모두 낭독했습니다.”
속기록이 인쇄되는 소리가 프린터에서 짧게 울렸다.
방청석 왼쪽에서 한경숙이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노조 안전위원회 기록철을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소리 없이. 그리고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딱, 딱, 딱.
느리고 또렷한 박자였다.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박수보다 빨랐지만 같은 무게로 이어졌다.
신우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이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왼손 검지의 유압유 흉터를 엄지로 문질렀다.
한 번. 그리고 손을 무릎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주먹이 느리게 폈다 쥐어졌다.
이지원이 태블릿을 덮었다. 속기록 마지막 페이지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오른손이 발언 요청 카드를 집었다. 카드 모서리가 한 번 접혀 있었다.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위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정책 제안이 접수되었습니다. 감사실 대리인 이지원 주무관.”
이지원이 일어났다. 왼손으로 슬랙스 주름을 한 번 폈다. 오른쪽 광대 아래 작은 점이 형광등 빛에 살짝 드러났다.
“위원장님, 감사실 대리인 이지원입니다.”
차분했다. 속도가 아닌 톤으로 무게를 실었다.
“본 청문회를 통해 확인된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철도안전법 시행령 부칙 제12조 3항의 해석 모호함입니다.”
탁자 위로 태블릿을 들어 화면을 보였다. 화면에는 시행령 해당 조항의 문구가 밑줄과 함께 띄워져 있었다. ‘공사와 납품사가 협의하여 정한다.’
“이 문구는 부품 시험 성적서의 보존 책임을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 청문회 과정에서는 납품사 측이 보존 기간을 임의로 축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로 악용되었습니다.”
속기사가 다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감사실은 이 조항의 ‘협의하여 정한다’는 문언을 ‘최소 5년’이라는 하한선을 포함한 구체적 보존 기준으로 개정할 것을 본 위원회의 권고사항으로 상정할 것을 공식 제안합니다.”
이지원이 태블릿을 내렸다. 시선이 위원장 테이블에 고정되었다.
“증거인멸 방지가 이 조항의 입법 취지임을 감안할 때, 보존 책임의 모호함이 반복적으로 사고 조사와 감사 절차를 저해해왔다는 사실이 이번 청문회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방청석에서 박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조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끄덕였다.
위원장이 오른쪽과 왼쪽 위원들을 번갈아 보았다. 인사팀 차장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팀 선임 변호사가 그 뒤를 따랐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위원회는 감사실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위원장이 망치를 집었다.
“철도안전법 시행령 부칙 개정 권고안을 본 청문회의 정책 제안으로 속기록에 정식 등재합니다.”
망치 소리가 짧게 울렸다.
속기사가 마지막 줄을 입력했다. 태블릿 화면에 ‘속기록 등재 완료’ 알림이 떴다. 이지원이 그것을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포니테일이 어깨를 살짝 스쳤다.
신우진이 이지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지원이 발언 요청 카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목의 메탈 시계가 소매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방청석 뒤쪽에서 기자들이 일제히 노트북을 닫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외장이 부딪히는 소리가 겹쳐 울렸다.
한경숙이 박수를 멈추고 앉았다. 손에 쥐었던 기록철을 다시 무릎 위에 올렸다.
위원장이 망치를 세 번 두드렸다.
“이상으로 본 합동 청문회를 폐회합니다.”
스크린의 대조표가 꺼졌다.
청문회장 복도는 조용했다. 천장의 형광등이 길게 줄지어 복도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박중호가 보조기 손잡이를 두 손으로 짚었다. 금속 지지대가 바닥에 부딪혀 짧은 소리를 냈다.
“나는 주차장으로 간다. 내일 자문역 첫 출근이다.”
신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박중호의 얼굴에는 더 이상 긴장이 없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박중호가 손을 들어 답례했다. 보조기를 밀며 복도 서쪽 출구로 향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지원이 태블릿을 가방에 넣고 어깨끈을 정리했다. 왼쪽 광대 아래 작은 점이 형광등 불빛에 옅게 드러났다.
“속기록은 사본 한 부 감사실로 보냈습니다. 시행령 개정 권고안이 정식 등재됐어요.”
“알겠습니다.”
한경숙이 방청석 쪽 문을 밀고 나왔다. 손에 노조 안전위원회 기록철이 들려 있었다. 기록철 표지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우리도 철수한다. 오늘 증언록 스물세 건, 전부 채택됐어.”
신우진이 그녀를 바라봤다.
“제보자 신변은.”
“노조가 끝까지 책임진다. 이미 약속했다.”
한경숙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노조원들이 기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저 끝에서 문이 열리고 닫혔다.
이지원이 손목의 메탈 시계를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서류 정리만 하고——”
“신우진 씨.”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위원장이었다. 검은 양복 차림에 손에는 청문회 진행 자료 묶음이 들려 있었다. 비서 한 명이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신우진이 몸을 돌렸다.
“예, 위원장님.”
위원장이 다가왔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허리를 곧게 편 걸음걸이였다. 신우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늘 증언, 수고 많았습니다. 청문회 위원 전원이 당신의 진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본 위원회는 당신의 증언을 공로로 인정해, 철도공사에 표창 추천을 할 예정입니다.”
이지원의 손이 시계에서 멈췄다. 시선이 살짝 신우진에게로 옮겨갔다.
신우진은 잠시 침묵했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게 획을 그었다. 멈췄다.
“표창은 사양하겠습니다.”
위원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손에 든 자료 묶음을 비서에게 건넸다.
“뜻밖이군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현장 검수원으로 남아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쪽이 낫겠습니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낮고 일정했다. 감정의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대신.”
위원장이 기다렸다. 복도가 잠시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공조 장치의 낮은 진동음이 들렸다.
“그 표창을 강재호 선임의 유족에게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지원이 숨을 들이켰다. 짧은 소리였다. 그녀의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서류 가방 끈을 움켜잡았다.
위원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신우진의 왼손을 훑었다. 유압유 흉터를 보았다.
“강재호 검수원. 7년 전 탈선 사고로 순직하신 분이군요.”
“제가 오늘 증인석에서 언급한 선임입니다. 2017년 11월 1일.”
“기억합니다. 당신이 그의 조사 노트를 증거로 제출했죠.”
신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왼손이 가볍게 펴졌다 쥐어졌다.
위원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뒤에서 비서가 손목시계를 흘끔 봤다. 위원장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표창을 유족에게 전하는 것.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공식 절차가 필요하니 본 위원회가 검토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당신에게도 충분히 자격이 있는데.”
신우진이 위원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는 현장에서 일하는 게 맞습니다. 부품 하나, 볼트 하나를 점검하는 일. 거기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 그걸로 충분합니다.”
위원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존중합니다. 강재호 선임의 유족 표창은 본 위원회가 책임지고 추진하겠습니다.”
신우진이 손을 잡았다. 짧은 악수였다. 위원장의 손은 건조하고 따뜻했다.
위원장이 몸을 돌려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비서가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복도 끝 회의실 문으로 사라졌다.
이지원이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입을 열었다.
“강재호 선임의 노트. 오늘 그 네 페이지가 청문회 기록에 남았습니다.”
신우진이 이지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압니다.”
“당신이 표창을 안 받겠다고 할 때, 나는 예상 못 했다.”
이지원이 존대 말투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어미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신우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다. 그는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유성 매직을 꺼냈다. 몇 초 동안 뚜껑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꽂았다.
두 사람은 유리문을 밀고 국회 의원회관 정문 밖으로 나왔다. 오후 네 시 무렵의 햇살이 계단을 반쯤 덮은 상태였다. 바람은 약했고, 계단 아래 광장에는 몇몇 취재진이 삼각대를 접는 중이었다. 최명식이 광장 한쪽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걸어가던 중이었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였다.
이지원이 계단을 한 계단 내려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기록 보존 TF를 발족할 예정인데, 현장 자문역으로 함께해주시겠습니까.”
신우진이 계단 난간에 손을 얹었다. 철제 난간이 오후의 열기를 머금고 미지근했다.
“기꺼이.”
짧은 대답이었다.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류 가방에서 얇은 서류 한 부를 꺼냈다.
“TF 발족식은 내일 오전 10시. 감사실 회의실 3번입니다. 이것은 계획서 초안입니다.”
신우진이 서류를 건네받았다. 첫 장에 ‘철도 부품 시험 성적서 영구 보존 체계 구축안’이라는 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보존 연한을 30년으로 연장하는 안이죠.”
“예. 현장 검수 기록과 시험 성적서, 사고 조사 보고서를 한 체계로 묶을 겁니다. 박중호 자문역님도 참여하십니다.”
“내일 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광장 바닥의 대리석이 발걸음을 반사했다. 한경숙이 노조원들과 광장 반대편 출구로 걸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최명식은 이미 광장을 벗어나 차량기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신우진은 계단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지원도 멈췄다.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남았네요.”
신우진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눈은 여전히 광장 앞차로를 향해 있었다.
이지원이 서류 가방을 한쪽 어깨로 다시 메며 말했다.
“내일 TF 회의실에서 뵙겠습니다, 신우진 자문역님.”
신우진이 손을 살짝 들어 답례했다. 이지원이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소리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며 작아졌다.
신우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왼손을 들었다. 검지의 유압유 흉터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손을 내렸다.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길이 잠시 하늘을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늦가을 하늘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청문회 증언 종료 확인서를 꺼내 접었다. 상의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걸음을 재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