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독문복수전

10화

구관 중앙 홀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백서린이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맥박이 가파르게 뛰었다. 침을 꽂지 않고도 느껴지는 독기의 파동.

“숨을 깊게 들이쉬어요. 환영이 아니라 독이에요. 공기 자체가.”

서리한이 고개를 들었다. 스승의 얼굴을 한 환영이 바로 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입술이 열리기 전에, 왼발을 뒤로 빼며 거리를 벌렸다.

“나를 구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사형.”

목소리는 스승의 것이 아니었다. 소연화. 벽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홀 전체에 퍼졌다. 현천명의 환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있었다.

백서린이 침통에서 침 하나를 뽑아 서리한의 목 옆에 꽂았다. 명문혈. 뜨거운 기운이 혈도를 타고 뻗어 나갔다. 환영이 떨리다가 형체가 일그러졌다.

“이걸로 환각은 막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근본적인 해독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장 쪽에서 종잇조각이 흩날렸다. 누런 한지였다. 한 장이 서리한의 발치에 떨어졌다.

집어 들었다. 스승의 글씨였다. 칠절초 배합 비율과 약성 메모.

여백에 작은 글씨로 덧붙여 있었다. ‘사마독에게 주라. 상품성이 좋다.’ 그리고 그 옆에, 다른 필체. ‘사형이 부럽습니다.’

들어 본 적 없는 문장이었다. 스승이 남긴 모든 편지와 쪽지, 독문의 모든 기록을 뒤졌지만 이런 내용은 없었다.

종잇조각이 계속 흩날렸다. 모두 스승의 필체였다. 나한철에게 보낸 무공 비결, 다섯째 사제에게 보낸 독약 처방, 여섯째에게 전한 상단 거래 지시. 모든 조각의 끝에는 한 줄씩 덧붙여 있었다. ‘사형만 인정받다니.’ 서리한의 손아귀가 종이를 구겼다.

백서린이 침을 하나 더 꺼내 들고 주위를 살폈다. 떨어지는 종이 조각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홀 왼쪽 벽, 부서진 선반 위. 그곳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기예요.”

백서린이 가리킨 곳에서 소연화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찾았네요. 하지만 사매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텐데.”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또 한 장의 종이가 서리한의 앞에 떨어졌다. 다른 것보다 반으로 접혀 있었다. 펼치자 익숙한 글씨가 드러났다. ‘서리한 군은 독문의 적통을 이을 제자다. 특히 칠절마독공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나머지 제자들도 감수할 수 있다.’

소연화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내려앉았다.

“네놈만 바라봤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그냥… 네놈을 위한 재료였을 뿐이지.”

백서린이 서리한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재빨리 읽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가짜예요.”

종이를 등롱 불빛에 비추었다. 한지 뒷면으로 스며든 먹의 번짐이 일정하지 않았다.

“필획의 굵기가 달라요. 누군가 필체를 흉내 내서 나중에 덧쓴 거예요. 게다가 이 먹 냄새… 고련피가 섞여 있어요. 십 년 전이면 이런 배합을 쓰지 않았어요.”

소연화의 침묵이 잠시 홀을 메웠다.

“눈썰미가 좋군요.”

목소리 톤이 반음 낮아졌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스승은 항상 네놈만 봤어.”

선반 뒤에서 검붉은 치맛자락이 살짝 드러났다 사라졌다. 소연화가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기억나, 사형? 스승이 처음 칠절마독공을 가르치던 날. 우리 넷은 제련실 밖에서 기다렸어. 사마독은 주먹을 쥐고 있었고, 나한철은 아무 말도 안 했지. 그리고 나는…”

한 번 멈췄다. 숨소리만 들렸다.

“…나는 밖에서 스승의 목소리를 들었어. 네놈만 부르는 그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어.”

서리한이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매일 밤 독경을 외우게 하고, 매번 잘못된 배합을 반복하게 하고. 그래도 나는 스승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려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어.”

소연화의 목소리가 선반을 따라 이동했다.

“그냥 신경 쓰지 않은 거야. 제자라는 이유로 옆에 둔 것뿐. 스승이 진짜로 바라본 건 처음부터 네놈 하나였어.”

백서린이 침을 쥔 손을 올렸다. 소리를 따라 조준하고 있었다.

“그 증거를 보여줄까?”

소연화의 손가락이 선반 밖으로 나왔다. 길고 보라색 손톱 사이에 반으로 접힌 편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오래된 종이. 귀퉁이가 누렇게 바랬다. 스승이 직접 쓴 편지였다.

“칠 년 전, 스승이 북쪽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쓴 거야. 받을 사람은 네놈이었고.”

종이를 펼쳤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필체. 현천명의 글씨였다.

“이 사문의 모든 독공 비급과 독문주 자리는 서리한 군에게 상속한다.”

소연화가 조용히 읽었다. 음성에 떨림을 섞지 않았다.

“제자들 중 유일하게 만독귀원의 경지를 감당할 그릇이다. 나머지 제자들은 각기 쓰임에 맞게 배치하라.”

서리한의 호흡이 끊겼다. 손에 쥔 종이 조각들을 무의식적으로 구겼다. 그 편지는 몰랐다. 스승이 그런 유언 같은 편지를 남겼다는 사실을, 스승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네놈만이었어. 처음부터.”

소연화가 편지를 접어 가슴께에 넣었다.

“사마독은 그걸 참지 못했고, 나한철은 알고도 외면했어. 나는… 나는 그 편지를 훔쳐서 읽었어. 그리고 그날 밤, 스승을 내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했지.”

백서린이 낮게 말했다.

“그게 스승을 죽인 이유예요? 인정받지 못해서요?”

“인정이 아니야.”

소연화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내가 원한 건 스승이 나만 보는 거였어. 한순간이라도 좋았어. 그런데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스승의 눈동자에는 네놈이 비쳐 있었어.”

서리한의 어깨가 굳어졌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스승은 네놈 이름을 불렀지.”

선반 뒤에서 실루엣이 움직이더니 멀어졌다. 복도 쪽으로 발소리가 났다.

“그래서 복수인 거야, 사형. 나는 네놈이 아니라, 네놈이 가진 스승의 기억을 지우려는 거야.”

백서린이 침을 던졌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선반 모서리에 꽂혔다. 빗나갔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서리한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구겨진 종이 조각들이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칼을 쥔 손이 풀리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세요.”

백서린이 다가와 손목을 다시 짚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서리한의 맥박이 갑자기 불규칙해졌다.

목의 혈관이 검게 부풀어 올랐다. 한 번, 두 번. 숨이 짧아졌다.

“발작이… 왜 지금…”

무릎이 꺾였다. 칼이 바닥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백서린이 받아내며 바닥에 눕혔다. 침통을 열어 침 네 개를 동시에 뽑았다.

“움직이지 마요.”

손목, 팔꿈치, 어깨, 목. 차례로 침을 꽂았다. 서리한의 전신이 경련했다. 이가 갈리는 소리.

“만독지환 발작이에요. 그런데 삭일도 아니고, 이렇게 갑자기…”

백서린이 서리한의 눈동자를 벌려 확인했다. 동공이 빠르게 수축과 확장을 반복했다. 그녀가 허리춤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코 가까이 가져갔다. 냄새를 맡았다.

“구문향이에요.”

약병을 내려놓으며 주위를 살폈다.

“방금 그 편지에, 환영독 말고도 구문향을 발라 놨어요. 독문의 오래된 냄새를 재현한 촉매 독이에요. 만독지환에 걸린 자에게만 반응해 발작 주기를 앞당겨요.”

서리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백서린이 침 하나를 더 꺼내 명치 아래 깊숙이 꽂았다. 독기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퍼뜨리지 않기 위한 응급 조치였다.

“해독… 가능한가.”

서리한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백서린이 대답하지 않고 맥을 짚었다. 오른손 검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솔직히 말할게요.”

침을 한 개 더 꽂으며 입을 열었다.

“구문향은 해독할 수 있는 독이 아니에요. 그냥 방아쇠예요. 당신 체내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만독지환의 타이머를 당겨버렸어요.”

서리한의 손가락이 간신히 움직여 자신의 왼쪽 가슴을 짚었다. 만독지환의 문신이 있던 자리였다.

“얼마나…”

“하루.”

백서린이 맥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길어야 하루예요. 그 안에 만독지환을 완전히 해독하거나, 소연화에게서 독경통해의 마지막 페이지를 찾아내거나.”

서리한이 팔꿈치로 바닥을 밀며 상체를 일으켰다. 목에 꽂힌 침이 흔들렸다.

“일어나지 마요. 침이 빠지면 다시…”

“하루면 충분하다.”

서리한이 벽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오른손은 다시 칼을 집었다.

백서린이 침통을 접으며 말했다.

“완전한 제어는 불가능해요. 이 침이 독기가 심장으로 퍼지는 걸 막고 있을 뿐이에요. 사지 마비는 점점 더 심해질 거예요.”

선반 저편의 복도 입구를 바라보았다. 소연화의 발소리가 사라진 곳이었다.

“돌아갈 문은 없어요.”

등롱을 들었다.

“앞으로 가는 수밖에.”

두 사람이 복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서리한의 걸음이 반 박자 늦었다. 왼쪽 무릎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 눈에 보였다. 바닥에 흩어진 편지 조각들 위로 발자국이 찍혔다. 스승의 글씨가 먼지에 덮여 희미해졌다.

복도는 예상보다 깊었다. 백서린은 등롱을 높이 들었다. 벽 선반들은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병 조각과 쥐 발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소연화의 웃음소리는 멎었고, 공기 중에 희미한 진동만 남아 있었다.

진동이 가장 강한 벽면에 금이 가 있었다. 바닥의 긁힌 자국이 그 앞에서 멈췄다. 손바닥으로 벽돌을 밀자 돌이 안쪽으로 들어가고 벽 전체가 미끄러졌다. 비밀 서고였다.

좁은 방 중앙에 촛농이 굳은 촛대 하나, 벽 선반에는 독문의 비전 서고에서 옮겨온 서책들이 꽂혀 있었다. 탁자 구석, 돌멩이에 눌린 찢긴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독경통해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백서린이 종이를 집어 들었다. 눈이 글자를 빠르게 훑었다.

「……고로 칠절마독공의 진성 독기는 단순한 중화로 제거되지 아니하며, 그 순환을 거슬러 해독하는 자는 반드시 독을 몸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안으로 거두어들여……」

찢긴 가장자리에 마지막 문장이 반토막나 있었다. “…오직 독공의 주인이 자신의 독기를 스스로 거둘 때에만…”

충분했다. 해독의 방향은 분명했다. 외부에서 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서리한 자신이 독을 회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빙석유는 촉매일 뿐, 해독제가 아니었다.

종이를 품에 접어 넣고 서고를 빠져나왔다. 복도를 올라가는 발소리가 빨라졌다.

중앙 홀 입구, 서리한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왼쪽 빈 소맷자락이 축 처지고 오른손은 검집을 짚고 있었다. 표정은 평온했으나 숨결이 고르지 못했다.

“찾았어요.” 백서린이 품에서 페이지를 꺼냈다. “소연화가 여기 있었어요. 임시로 쓴 서고였죠.”

서리한이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가 종이를 응시했다. 페이지를 건네려는 백서린을 막고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소매를 가리켰다.

“이거부터.”

소맷자락 위로 드러난 손목. 일곱 독 문신 중 마지막 하나가 피부색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만독지환과 공명하는 거예요.” 백서린이 침을 뽑아 서리한의 목 옆줄기에 꽂았다. “독문 자체가 체내 독기와 반응하는 중이에요. 구관의 공기가 무거워진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서리한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두 번째 문신도 전보다 희미해졌다. 복수의 진전이 문신을 지우고 있었지만, 마지막 문신이 지워지는 속도는 유독 빨랐다.

백서린이 페이지를 건넸다. 서리한이 오른손으로 받아 들었다. 눈이 텍스트를 훑다 마지막 반 토막 문장에서 멎었다.

“독공의 주인이 스스로 거둔다.”

“그래요. 해독의 주체는 서리한님이에요.” 백서린이 침을 하나 더 꽂으며 말했다. “한빙석유는 보조일 뿐, 칠절마독공을 역으로 운용해 체내 독기를 한곳에 모으고 배출하지 않고 소멸시켜야 해요.”

“폐공.”

“네. 칠절마독공을 폐공하는 거예요. 독경통해가 제시한 유일한 방법이에요.”

서리한이 종이를 내렸다. 목에 꽂힌 침 주변으로 검은 혈관의 부풀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소연화는 알고 있었을까.”

“이 페이지를 찢어 숨긴 이유일 거예요. 만독귀원을 완성하려면 칠절마독공을 유지해야 하니까. 폐공하면 그녀가 원하는 절대적 독도 사라지죠.”

발소리가 들렸다. 홀 반대편 벽 뒤에서 돌과 돌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열렸다.

소연화가 걸어 나왔다.

검붉은 치마가 촛불에 번들거렸다. 손목의 금줄 방울이 걸을 때마다 작게 울렸고, 한 손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서고를 뒤진 건 예의가 아니에요.” 나긋나긋한 말투였으나 눈은 서리한의 손에 들린 페이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종이, 내가 가져야 할 물건인데 사형에게 주다니.” 시선이 백서린에게로 옮겨갔다. “의원이라는 사람이 환자의 살 길을 막는 법을 가르치고 있군요.”

백서린이 침 한 개를 뽑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살 길이 아니라 살리는 길이에요. 독공을 버리고 사는 것, 그걸 막는 사람은 당신이죠.”

소연화의 입꼬리만 올라갔다. 눈은 웃지 않았다.

“그게 정말 살리는 길일까? 사형, 스승님이 왜 당신에게 칠절마독공을 전수했을까.”

서리한은 종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만독귀원에 이르면 사형의 피는 살아 있는 독이 돼요. 수백 가지 치명독을 품은 채로 사는 거예요. 파괴를 위한 독이 아니라 독 자체로 완성되는 경지.” 소연화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걸 폐공하라니. 살기 위해 죽음의 경지를 버리는 게 살리는 길일까.”

“순환이다.”

서리한이 페이지를 들어 올렸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스승님이 가르치려던 건 파괴가 아니야. 독을 만들고, 독을 품고, 독을 거두는 것. 그게 순환이야.”

소연화의 눈썹이 올라갔다.

“넌 독을 품는 것만 알았지 거두는 법은 몰랐다.”

“착각이군요.” 소연화가 두루마리를 풀었다. 만독귀원 비급 초본이었다. 글자들은 제멋대로 휘갈겨져 있고 군데군데 덧칠한 흔적이 있었다. “내가 거두지 못한 건 스승님의 독뿐이에요. 사형, 당신의 피를 내게 줘요. 당신의 피로 내 비급을 완성하면, 나는 스승님도 이루지 못한 절대의 경지에 서게 돼.”

“안 된다.” 서리한이 벽에서 몸을 떼고 페이지를 백서린에게 건넸다. “스승님의 가르침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순환 없는 독은 파괴뿐이다. 그게 네게 가르쳐주지 않은 이유다.”

소연화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보랏빛으로 물든 긴 손톱이 두루마리를 찢을 듯 파고들었다.

“스승님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백서린이 페이지를 품에 넣었다. 소연화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나는 스스로 선택했어요. 스승님을, 나 자신의 방식으로. 그런데 사형은 그 선택조차 못 했잖아요. 스승님이 죽을 때도, 제자들이 배신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서리한의 오른손이 다시 검집을 쥐었다. 핏줄이 손등에 솟았다.

소연화가 빈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안에서 작은 쇳조각이 반짝였다. 구관 함몰 장치의 기폭 스위치였다.

“내일. 내일 이 홀에서 결판을 내요. 칠절마독공 대 만독귀원, 누가 더 위대한 독의 경지에 있는지.”

스위치를 든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갈라진 입술에 웃음이 돌았다.

“만약 도망치면 이 구관 전체가 사형의 무덤이 될 거예요. 문을 봉쇄할 수도 있었지만 재미없으니까.”

“도망치지 않아.” 서리한의 목소리에 혼란이 없었다.

“좋아요.” 소연화가 뒤로 물러섰다. “사형,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 죽을 때는 스승님과 같은 표정을 지어 줘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정이었으니까.”

등 뒤의 벽이 다시 열렸다. 검붉은 치마자락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벽이 닫히기 직전 목소리가 울렸다.

“사형, 이곳에서 스승님과 함께 묻히자.”

벽이 완전히 닫혔다. 홀에 침묵이 찾아왔다.

백서린이 침을 거두며 말했다. “내일이 한계예요. 만독지환 발작은 더 이상 늦출 수 없어요.”

서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공할 거다.”

“승산은 있어요.” 백서린이 서리한의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마지막 문신이 촛불 아래에서 지워진 듯 빛바래 있었다. “스승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그쪽에 있다면, 그게 서리한님의 길이에요.”

서리한이 검집을 고쳐 쥐었다. 보랏빛으로 물든 오른손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일곱 문신 중 마지막 하나가, 이제 윤곽만 남은 채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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