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복수전
2화
밤이 내려앉은 상단 후원.
서리한은 담장을 넘기 전 잠시 멈췄다.
등 뒤로 들려오는 백서린의 발소리. 가볍고 규칙적이었다.
“경비 교대는 한 시진 뒤.”
서리한이 짧게 말했다. 확인이 아니라 정보였다.
백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작은 침통을 꺼내 손목에 매며 말했다.
“약재 창고 먼저죠. 독재료는 냄새로 추적할 수 있어요.”
서리한이 앞장섰다. 왼쪽 소매가 바람에 펄럭였다.
후원으로 통하는 골목길은 어두웠다. 서리한의 걸음이 빨라졌다. 회랑 기둥을 짚고 몸을 날려 창고 옆 낮은 지붕 위로 올라섰다. 백서린이 뒤를 따랐다. 발 디딜 곳을 침착하게 고르며.
창고 후문.
서리한이 허리춤에서 가는 철사를 꺼냈다. 자물쇠 구멍에 밀어 넣고 손목을 한 번 꺾었다.
딸깍.
문이 열렸다. 백서린이 눈썹을 올렸다.
“배운 게 다양하군요.”
“살아남는 법.”
서리한이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약재 냄새가 진동했다. 말린 인삼, 당귀, 천궁. 그 아래로 썩은 듯 단내.
백서린이 코를 찡그렸다.
“이건… 일반 약재가 아니에요.”
선반에 빼곡히 쌓인 약재들 사이로 그녀의 시선이 멈췄다. 구석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 뚜껑이 살짝 열려 있었다.
서리한이 다가가 열었다.
안에는 한지 묶음. 사마독의 직인이 선명했다.
「밀반입 약재 목록 — 을해년 시월」
눈이 멎었다.
한빙석 30근. 칠절초 12근. 벽라향 5병. 만년단목 분말… 익숙한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칠절초.”
서리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칠절마독공의 핵심 재료.”
백서린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약재명을 훑으며 그녀의 손가락이 하나씩 짚어갔다.
“한빙석… 이건 백 년 묵은 한빙사의 독낭에서 채취하는 광석이에요. 독문 계열에서나 쓰는 재료죠. 벽라향은 호흡기 독의 매개체고…”
손가락이 멎었다.
“이 조합, 냄새만으로 알아요. 금독단의 원료예요. 독경통… 아니, 고문헌에서 본 적 있어요.”
말을 삼켰다. 독경통해라는 말까지 나오려다 참아낸 것이다.
서리한은 듣지 못한 듯했다. 목록을 도포 안주머니에 접어 넣으며 말했다.
“밀실.”
“네?”
“이 목록에 있는 약재는 여기 안 보인다. 별도 보관처겠지.”
백서린이 주변을 살폈다. 선반 아래, 벽면을 따라 걸으며 코를 가까이 댔다.
“…여기예요.”
그녀가 선반 뒤쪽 벽을 가리켰다. 겉보기엔 평범한 회벽이었다.
“칠절초 특유의 쇳물 냄새가 이 벽 뒤에서 나요. 아주 미세하지만.”
서리한이 손바닥을 벽에 댔다. 독기를 감지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오른손이 벽돌 하나를 눌렀다. 힘을 주지 않은 부드러운 압력. 벽돌이 안으로 밀려들었다.
드르륵.
벽면 일부가 옆으로 밀렸다. 숨겨진 문이었다.
서리한이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오른손이 떨렸다. 목의 혈관이 푸르스름하게 부풀었다. 칠절마독공이 내부 독기에 반응한 것이다.
“잠깐.”
백서린이 서리한의 팔을 잡았다. 손목을 짚으며 빠르게 맥을 더듬었다.
“독기 역류… 아니에요. 이건 내부 독이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거예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흥미롭군요. 칠절마독공이 숙주의 의지와 무관하게 같은 계열 독에 감응한다는 건…”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독경통해 초기 증상 기술과 유사해요.”
입을 다물었다. 너무 많은 걸 말했다는 듯.
서리한이 뒤돌아봤다.
“무슨.”
“아뇨. 그냥… 의서를 떠올린 것뿐이에요.”
백서린이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앞치마 주머니 속 독경통해 사본의 모서리가 손가락에 스쳤다.
마지막 페이지가 결락된 의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밀실 내부는 좁았다.
가로 세로 일곱 자 남짓. 중앙에 집무 탁자, 벽 쪽엔 작은 책장. 그리고 수십 개의 독약병이 진열된 유리장.
서리한이 탁자 위를 뒤졌다. 문서 뭉치, 장부, 작은 나무 상자.
그가 나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낡은 편지 뭉치. 그리고 두꺼운 장부 한 권.
표지에 적힌 글자.
「금독단 제조 기록 — 만독상단 사마독」
페이지를 넘겼다.
칠절초 증류량. 한빙석 분쇄 시간. 벽라향 혼합 비율.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살인이었다.
백서린이 편지 뭉치를 집었다. 상단의 종이, 사마독의 필체. 그녀의 손가락이 한 통을 펼쳤다.
「스승님께.
소자가 처음 금독단을 올리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열입곱이었습니다. 무림맹 공식 등록 약방주는 꿈도 못 꾸던 때였지요. 그때 스승님께서 절 아들이라 부르며 하사하신 자수정 목걸이…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번 금독단은 특히 정성이 깊습니다. 칠절초 배합 비율을 두 배로 올렸습니다. 전과는 다릅니다. 한 알이면 충분히… 스승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얻으실 겁니다.
아버지라 부르며 올리는 이 금독단…」
백서린의 숨이 멎었다.
“서리한.”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있었다.
서리한이 편지를 받아 들었다.
눈이 한 줄 한 줄을 따라갔다.
열입곱. 아들이라 부르다. 자수정 목걸이.
스승님이 사마독에게 직접 목걸이를 하사하신 날. 그날이었다. 사형 셋이 모여 축하주를 나누고, 스승님이 웃으시던 얼굴. “사마독, 네 재주면 중원에 이름을 떨칠 날도 머지않았다.”
그리고 한 달 뒤.
같은 입으로 금독단을 올렸다. 스승님이 드시던 약이라는 핑계로.
‘아버지라 부르며.’
서리한의 오른손이 편지를 구겼다.
“찾았다.”
한마디였다.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목의 혈관이 더 짙게 부풀어 올랐다.
백서린이 기록부를 펼쳐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 완성된 금독단 개수와 출고 날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사십오 알. 사흘 전 기록이 마지막이에요.”
서리한이 기록부를 받았다. 그의 왼손목에 새겨진 일곱 개 문신 중 하나가 미세하게 떨렸다.
빛났다.
잠시. 아주 짧은 순간.
푸른 기운이 문신 하나를 스쳤다.
백서린이 눈치챘다.
“방금….”
“반응이다. 칠절마독공이 복수 대상의 독과 공명한다.”
서리한이 짧게 설명했다.
“사마독의 금독단에 내 스승님이 쓰러지셨다. 그 독을 만든 손. 그 손이 첫 번째 증표.”
백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서리한의 왼손목에 머물렀다.
그의 등 뒤로 작은 창문 너머 달빛이 기울었다.
그때.
발자국 소리.
멀리서부터 규칙적인 장화 소리. 셋, 아니 넷. 경비들이었다.
서리한이 즉시 행동했다. 편지 초안과 기록부를 천 주머니에 싸서 품에 넣었다. 백서린이 약재 목록을 건넸다.
“갑시다.”
그녀가 짧게 말했다.
서리한이 밀실 문을 닫았다. 벽이 원위치됐다. 두 사람은 후문을 빠져나와 약방으로 향했다.
발자국 소리가 창고 앞을 지나갔다.
백서린의 임시 약방.
촛불이 반쯤 줄어든 탁자 위에 증거물들이 펼쳐졌다.
백서린이 기록부의 성분표를 유심히 살폈다. 칠절초 40%, 한빙석 분말 25%, 벽라향 15%, 만년단목 분말 10%, 기타 10%.
“이 조합….”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독문 표준 해독제가 전혀 통하지 않는 배합이에요. 칠절초 비율이 두 배면 약성이 상승하는 게 아니라 변이해요. 일반 해독제로는 절대 풀 수 없는 구조.”
서리한이 성분표를 내려다보았다.
스승이 쓰러지시던 날.
독문 약방에서 마지막으로 조제하던 해독제의 성분과 정확히 일치했다.
칠절초 40%. 그날 스승이 분석하시다 손을 떨던 그 배합. “이건… 변형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거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서리한의 시선이 편지 초안으로 옮겨갔다. 탁자 위에 펼쳐진 종이.
“뒷면.”
백서린이 뒤집었다.
편지 초안 뒷면.
연필로 휘갈긴 작은 글씨.
「거래일: 이달 초사흘」 「장소: 흑시루 삼층」 「구매자: 중원 잔룡채 외 사문파 셋」
백서린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일 밤이에요.”
서리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탁자 위의 기록부를 천천히 정리해 품에 넣었다. 오른손이 허리춤의 독약병을 스쳤다.
“사마독.”
이름을 입에 올렸다.
“첫 번째 이름.”
도포 안주머니에서 쪽지가 바스락거렸다. 사마독의 직인, 편지 초안, 기록부. 세 개의 증표가 품 안에 있었다.
서리한의 왼손목 위로 문신 하나가 한 번 더 깜빡였다. 마치 복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백서린이 그 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독경통해를 꺼낼 순 없었다. 아직은.
그녀는 물끄러미 서리한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만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