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독문복수전

4화

등불이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인데도 불꽃이 일렁였다. 심지 끝이 바싹 탄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촛농이 탁자에 고였다. 굳기 시작한 반투명 덩어리가 탁자 나뭇결을 따라 번지고 있었다.

백서린이 침통을 열던 손을 멈췄다.

서리한의 오른손이 반지를 움켜쥔 채였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손등에 실핏줄이 떠올랐고, 반지의 모서리가 손바닥 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괜찮다는 말보다 빨랐다.

턱.

서리한의 목에서 푸른 혈관이 솟아올랐다. 만독지환의 징후. 피부 바로 아래를 흐르는 독혈이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게 보였다.

삭일도 아닌데 증세가 터져 나왔다. 혈관을 타고 검은 실핏줄이 귀밑을 지나 뺨까지 번졌다. 피부 아래로 어둠이 스며들 듯.

“늦었군.”

서리한이 짧게 내뱉었다. 숨을 토해내는 소리에는 고통보다 짜증이 섞여 있었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탁자 위의 촛불이 순간 기울어진 그림자에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났다. 오른손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나무가 삐걱, 짧은 비명을 질렀다. 손톱 밑이 보랏빛으로 변색됐다. 독이 말초혈관까지 밀려온 증거였다.

백서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침을 뽑아드는 손끝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침 세 개가 동시에 뽑혔다. 은빛 침끝이 촛불을 받아 반짝였다. 첫 침은 뒷목의 아문혈, 둘째는 가슴팍의 전중혈, 셋째는 왼쪽 어깨의 견정혈. 침 끝이 피부를 뚫을 때 서리한의 등 근육이 경련했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일직선으로 근육이 뭉쳤다 풀어졌다.

“숨을.”

백서린이 말했다. 부드러웠지만 손끝은 단호했다. 그녀의 눈빛은 침 끝에 꽂혀 있었다.

“짧게 들이쉬고 길게 뱉어요. 지금 폐경맥이 수축하고 있어요.”

서리한이 숨을 들이켰다. 바람 새는 풀무 같은 소리가 목구멍에서 났다. 가쁜 숨결 사이로 독기가 섞인 입김이 흘러나왔다.

공기 중에 쇠 맛이 나는 듯한 비릿한 기운이 번졌다. 백서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네 번째 침을 오른쪽 갈비 아래 태충혈에 놓았다.

“발작 주기가 당겨졌어요. 복수 과정에서 칠절마독공을 쓴 영향이에요.”

서리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 탁자 위에 떨어졌다. 푸른 혈관이 조금씩, 마치 썰물처럼 옅어졌다.

백서린이 맥을 짚었다. 세 손가락이 손목 안쪽을 가볍게 눌렀다. 그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독기가 경맥을 타고 역류했어요. 만독지환과 칠절마독공이 공명한 것 같습니다. 몸속에서 두 독이 서로를 부른 거예요.”

침을 하나 더 뽑았다. 이번에는 손목의 내관혈. 침이 들어가자 서리한의 호흡이 느려졌다. 억지로 쥐어짜던 숨이 한 겹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억제했지만….”

백서린이 침을 정리하며 말을 흐렸다. 침 하나하나를 천천히 거두는 그녀의 손끝에는 아직 긴장이 남아 있었다. 서리한의 손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여전히 반지는 움켜쥔 채였다. 손가락 마디에 낀 흰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주기를 예측할 수 없어요. 매일 아침저녁으로 맥을 짚어야 합니다.”

서리한이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이 마르면서 피부에 소금기 같은 흔적을 남겼다.

“할 수 있나.”

“치료는 가능해요. 다만….”

백서린이 침통을 덮었다. 나무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작게 울렸다.

“완전한 해독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해요.”

서리한의 녹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촛불을 받아 짐승처럼 빛났다. 백서린의 손을 보았다.

침을 놓은 자리마다 정확했다. 혈 자리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떨림은 없었다.

아직은.

반지를 탁자 위에 올렸다. 금속이 나무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촛불이 반사됐다. 표면은 흑요석이 아니었다. 빛이 닿자 얇은 금속 고유의 광택이 퍼졌다.

사마독이 열 개나 끼고 있던 반지들. 겉보기엔 그저 사치스러운 장신구일 뿐이었다. 무게조차 평범했다.

백서린이 다가왔다. 땋은 머리 끝의 비취 고리가 흔들리며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이 반지.”

그녀가 손가락으로 밀어서 빛을 비추었다. 촛불 가까이 가져가 각도를 틀자, 안쪽 면에 가느다란 줄이 새겨져 있었다. 침으로 긋고 그 위에 무언가를 박아 넣은 흔적. 은가루나 금실 같은 미세한 재료가 말려 들어가 있었다.

“암호문이에요.”

서리한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등뼈가 차례로 펴지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들릴 듯했다. 목의 혈관이 아직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반지를 집었다.

촛불 가까이.

심지 바로 옆까지 가져가자 열기가 손끝에 닿았다. 줄 안쪽에 미세한 글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돋보기 없이는 제대로 읽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기호와 숫자, 그리고 한자. 직선과 곡선이 교차하는 모양은 지도. 길을 나타내는 선과 방위각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광산 표식.”

서리한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독문이 과거 비밀 물자를 운송할 때 사용하던 암호. 스승님이 가르쳐준 것. 수련이 끝난 밤이면 촛불 앞에서 암호 해독을 연습시켰다.

사형들도 알았다. 머리를 맞대고 암호문을 해석하며 서로의 답을 비교하던 기억이 잠시 스쳤다. 사마독은 몰랐다.

그에게는 장사 밑천만 알려줬을 뿐. 스승은 그를 끝까지 믿지 않으셨던 걸까.

“북방 폐철광산.”

백서린이 암호문을 읽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암호 위를 짚으며 천천히 움직였다.

“나한철의 거점이 거기예요.”

종이를 꺼내 암호를 옮겨 적었다. 거친 마지(麻紙) 위로 붓끝이 급하게 움직였다. 먹물 냄새가 촛농 냄새와 섞였다.

서리한의 시선이 반지에 남은 무언가를 붙잡았다. 단순히 암호문만이 아니었다.

안쪽에 박힌 작은 조각. 반지에 꿰인 줄이 아니라 반지 금속 안쪽에 감춰져 있었다. 금속을 약간 파내고 그 안에 끼워 넣은 흔적이 역력했다.

빼내자 빛이 반사됐다. 촛불보다 훨씬 깊은, 내부에서 스스로 발광하는 듯한 녹색 빛이었다.

비취. 초승달 모양. 크기는 손톱만. 가장자리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고, 표면에 은은한 광택이 흘렀다.

서리한의 손이 멈췄다. 손가락이 돌처럼 굳었다.

백서린의 숨소리가 끊겼다. 그녀는 그 모양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리한의 표정 변화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방심이 스쳤다.

그 모양을 알고 있었다. 스승의 목걸이. 현천명이 입문식 때마다 제자들 앞에서 보여주시던 장식. 일곱 조각이 모여 원을 이루던 비취. 각 조각은 제자 한 명에게 언젠가 물려주겠다던 약속이 담겨 있었다.

서리한이 천천히 조각을 빛에 비추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두 번째.”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포에 긁힌 듯 건조하고 낮았다.

“스승님의 것.”

백서린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반지와 조각은 사마독이 스승의 목걸이를 찢어 나눠 가졌다는 증거였다. 일곱 조각 중 하나를 이런 식으로 반지 안에 숨겨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이 그의 광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서리한이 비취 조각을 품 안에 넣었다. 천천히, 마치 유리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스승의 유품.

사마독의 반지. 금독단 두 병. 증표가 늘었다. 품 안에서 그것들이 서로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왼손목을 보았다.

문신.

첫 번째가 옅어졌다. 사마독을 상징하는 독초 문양이 희미하게 변해 있었다. 선명했던 검은 잉크가 마치 수십 년 묵은 것처럼 색이 바랬다.

체크리스트 복수의 징표. 한 명을 처단할 때마다 사라지는 저주. 살아있는 먹물이 제 할 일을 다하고 조용히 잠드는 모양새였다.

백서린이 문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복수의 진전이 문신에 반응하는 거로군요. 독문의 술법은 그런 방식이에요….”

혼잣말처럼 읊조리다가 손을 뻗었다.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표지가 누렇게 바랬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독경통해(毒經通解)’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글씨를 새겼던 붓 자국은 이미 반쯤 지워져 그림자처럼 보였다. 가장자리가 찢기고 접힌 흔적. 모서리마다 손때가 올라 검게 빛났다.

서리한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동공이 순간 수축했다.

“그걸.”

“알고 있었군요.”

백서린이 책을 탁자 위에 펼쳤다. 페이지가 바람에 저절로 넘어갈 듯 얇았다.

“칠절마독공의 해독 원리가 기록된 유일한 의서예요. 당신의 스승님이 독문을 만들 때 함께 편찬하셨다고 합니다.”

책장을 넘겼다. 손가락이 오래된 종이를 조심스럽게 집었다. 그림과 글이 빼곡했다.

일곱 가지 독의 상호 작용, 경맥의 흐름, 침혈의 위치. 붉은 선과 푸른 선이 인체도 위에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스승님의 서체였다. 모서리마다 빽빽이 적힌 주석이 그의 꼼꼼한 성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미 연구를 시작했어요. 당신과 만나기 전부터.”

백서린의 손가락이 마지막 페이지를 가리켰다. 찢긴 자국이 선명했다. 종이 결이 날카롭게 찢어져 내려가 있었고, 누군가 일부러 뜯어낸 듯한 경계선이 뚜렷했다. 손톱이나 칼날 같은 것으로 한 번에 그어 찢은 흔적.

“끝부분이 없어요. 완전한 해독 단계가 기록된 페이지. 일곱 번째와 여섯 번째 독의 상극 원리를 다룬 결정적 부분이죠.”

서리한이 책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찢긴 자리를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조건.”

“조건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백서린이 책을 덮었다. 표지의 먼지가 공중으로 조금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칠절마독공 일곱 독 중 다섯까지 해독하는 단계까지예요. 남은 둘은 찢긴 페이지의 해독법이 필요해요. 그 페이지 없이는 교차 반응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어요.”

“찢은 자.”

“모릅니다. 다만 확실한 건 찢기지 않았다면 완전한 해독이 가능하다는 점이에요. 이 책을 쓴 분의 의학 지식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범위였어요.”

백서린이 서리한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촛불이 작게 반사되었다.

“당신이 복수하는 동안, 저는 해독 연구를 계속할게요. 찢긴 페이지도 반드시 찾을 거예요. 당신이 스스로 파괴되기 전에.”

마지막 말이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입술을 다물었다.

서리한의 손이 문신 위를 스쳤다. 손가락이 독초 문양의 희미한 외곽선을 따라 움직였다.

두 번째 문신. 셋째 사형의 징표. 아직 선명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검은 먹물의 윤곽이 달빛 속에서도 또렷했다.

“북광산까지는 이레.”

말을 꺼내며 일어섰다. 의자에서 몸을 떼어내자 나무 바닥이 삐걍, 하고 짧게 울었다.

“연구할 시간이 필요할 거다.”

백서린이 침통을 품에 넣으며 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침통의 가장자리를 한 번 더 확인하듯 눌렀다.

“당신은.”

버릇처럼 허공에 손가락을 그었다가 멈췄다. 서리한이었다. 공중에 맺히려던 말 대신 어둠만 스쳤다.

“찾아간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바닥에서 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네가 연구할 시간을 벌어주마. 나는 나한철을 찾아 복수하겠다.”

백서린이 독경통해를 품에 넣었다. 땋은 머리 끝의 비취 고리가 다시 한 번 흔들리며 바람 없는 공기를 찔렀다.

“동행 조건, 기억하죠.”

서리한이 멈춰 섰다. 등을 보인 채였다. 어깨너머로 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방 안의 촛농 냄새와 약 냄새를 한꺼번에 휩쓸었다. 촛불이 꺼졌다. 심지 끝에서 하얀 연기 한 줄기가 올라와 허공에서 흩어졌다.

어둠 속에서 백서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둠에 섞여 더욱 깨끗하게 들렸다.

“새벽이에요. 북행은 아침에 시작하죠.”

서리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별빛이 창틀 사이로 스며들었다. 문을 열어젖힌 그의 실루엣 가장자리에 은빛 테두리를 둘렀다.

비취 조각이 품속에서 느껴졌다. 체온에 데워져 미약한 온기를 품은 돌. 스승의 온기. 찬 바람이 목의 푸른 혈관을 스쳤다. 혈관이 미세하게 수축했다가 이완했다.

북방을 향해 길이 열려 있었다. 어둠 저편으로 낡은 길이 별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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