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복수전
6화
횃불이 광장으로 밀려들었다. 열댓 개의 불꽃이 갱도 입구를 메우고, 그 사이로 거구가 걸어나왔다. 대머리 정수리의 지네 흉터가 횃불에 반짝였다. 나한철이었다. 그의 뒤로 부하들이 좌우로 퍼져 광장 출구를 막았다.
나한철이 팔을 뻗어 손가락을 주먹 쥐듯 말았다.
쾅.
오른쪽 바위가 갈라지며 사람 머리만 한 암석 조각이 떨어졌다. 팔목에서 수십 개의 쇠팔찌가 부딪히며 날카로운 진동을 냈다. 그가 손을 펴자 손바닥에 쇄골착이 나타났다. 손잡이가 굵은 쇠몽둥이 끝에 포개진 철환 세 개가 박힌, 공사장 철거 도구 같은 무기였다.
나한철이 쇄골착을 어깨에 걸치며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단 말이다, 막내야. 사마독 그 겁쟁이 놈, 네놈한테 당했다며?”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썩은 내가 섞인 숨결이 횃불 연기와 뒤엉켰다.
“말을 해야지. 사부님 뼈를 만져보더니 감동했냐?”
쇄골착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바위가 움푹 패고 금이 번졌다. 돌가루가 튀자 부하들이 뒷걸음쳤다.
“내가 직접 부러뜨릴 때 말이다. 척추는 이렇게 잡았고.” 그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잡았다. “한 번에 부러지더라. 마른 나뭇가지처럼.”
서리한의 손목에서 독기운이 폭발했다. 푸른 안개가 단검을 감싸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칠절마독공 제3초식 독살검이었다.
“분하다고? 확인하고 싶냐?”
나한철이 쇄골착을 한 번 더 내리찍자 광장 바닥 전체가 떨렸다. 서리한의 푸른 동공이 짙어졌다. 오른쪽 목에서 뺨까지 번진 혈관이 검푸르게 부풀었다.
“죽여준다.”
서리한이 달려들었다. 몸을 낮게 깔고 독살검의 궤도가 나한철의 왼쪽 옆구리를 향했다. 단검 끝이 쇄골착 철환에 닿기도 전에, 나한철의 왼팔이 곡괭이처럼 날아왔다.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바위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소리였다. 서리한의 오른팔이 밀렸다.
나한철이 웃으며 손등으로 서리한의 어깨를 밀쳐냈다. 몸이 공중에 떴다.
“고작 이거냐!”
쇄골착이 돌아 들어왔다. 서리한이 몸을 꼬아 피했지만 철환의 풍압만으로 왼쪽 갈비뼈 언저리가 울렸다. 나한철의 전신에서 체독이 피어올랐다. 피부가 검푸르게 변색되고 근육이 팽창했으며 지네 흉터가 꿈틀거렸다.
“사부님 뼈를 부순 기술, 네놈 거랑 비교해보자.”
쇄골착을 양손으로 쥔 그가 뛰어들었다. 산이 통째로 밀려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서리한이 왼쪽으로 굴렀다.
쾅. 쇄골착이 바닥을 찍고 금이 세 갈래로 번졌다. 돌 파편이 서리한의 뺨을 긁었다.
나한철이 곧바로 팔을 횡으로 휘둘렀다. 서리한이 몸을 뒤로 젖혔지만 철환이 눈앞을 스쳤다. 밀렸다. 쇄골착의 리치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팔이 날아왔고, 체독으로 덮인 피부는 독살검으로 뚫기에 너무 두꺼웠다. 서리한이 광장 벽 쪽으로 몰렸다.
“왜, 더 안 와? 찔러봐. 네놈 독 따위로 내 체독이 뚫릴 것 같냐?”
나한철이 팔을 벌려 가슴판을 드러냈다.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껍질 같았다. 도발이었고 사실이었다. 체독은 기독보다 단단했다. 그러나 상성이 전부가 아니었다.
서리한이 칠절마독공의 기운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독기운이 발바닥에서 지면으로 흘러 푸른 안개가 바닥을 타고 나한철의 장화를 감쌌다. 체독은 외피에 집중돼 있고 발바닥은 독화가 덜 됐다. 서리한이 단검을 거꾸로 쥐고 나한철의 발등을 향해 찍어 내리려 뛰어들었다.
“그딴 잔재주!”
나한철이 발을 들어 올리며 상체를 기울였다. 독기운이 발을 떠나자 체독이 발바닥까지 재빠르게 번졌다. 쇄골착이 위에서 떨어졌다. 서리한이 단검을 들어 올렸다.
쩌저저적. 쇠가 갈리는 소리.
서리한의 손목이 접힐 듯 휘며 한 호흡 버텼다. 나한철이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서리한의 왼쪽 갈비뼈를 찔렀다. 체독이 실린 손끝이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서리한의 몸속에서 들렸다. 무언가 잘못 접힌 느낌. 숨이 멈췄다.
갈비뼈가 안으로 밀려들며 폐를 눌렀다. 입에서 신음이 새 나오고 피 맛이 혀끝에 퍼졌다. 무릎이 바위에 부딪혔다.
“그래. 그 자세다. 네놈 갈비뼈도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주마.”
나한철이 쇄골착을 높이 치켜들었다. 철환이 횃불 빛에 붉게 번뜩였다.
“기다리십시오.”
갱도 입구에서 맑고 순한 음색이 들렸다. 광장 전체를 침묵시킬 만큼 또렷했다. 검붉은 치마가 흔들리고 발목의 방울이 걸음마다 울렸다. 손목의 금줄도 조용히 화답했다.
소연화였다.
비녀 하나로 틀어 올린 흑발. 건조한 눈동자. 관자놀이의 거미줄 문신. 그녀는 마치 자기 집인 듯 편안한 걸음으로 광장 중앙으로 걸어왔다.
“소연화. 왜 끼어드냐.” 나한철이 쇄골착을 내리지 않은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소연화가 서리한 앞에 멈춰 섰다. 보라색 도는 검은 눈이 깜빡이지도 않았다. “한 팔이 없네요. 언제 그렇게 됐나요.”
서리한이 이를 악물었다. 칠절마독공의 기운이 부러진 갈비뼈 주변으로 흩어져 통증이 살짝 죽었지만 숨은 여전히 짧았다.
소연화가 나한철을 향해 돌아섰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죽이기 전에 말씀해 주셔야죠. 막내니까 알 권리가 있잖아요.”
“무슨 소리냐.”
“스승님 이야기요.” 소연화의 목소리가 광장 구석까지 닿을 만큼 올라갔다. 부하들이 숨을 죽였다.
서리한이 고개를 들었다. 소연화가 뒷짐을 지고 긴 손톱으로 손등을 스쳤다. 보랏빛 손톱 끝에서 가루 같은 독이 떨어져 바닥에 닿았다.
“스승님 뼈를 부순 건 철 오라버니예요. 맞죠? 쇄골착으로 척추와 갈비뼈를 전부 부수셨잖아요. 사마독 그 바보가 금독단으로 무력화시킨 뒤에. 기억나세요, 막내야? 금독단은 독공을 일시적으로 봉쇄하는 약이에요. 스승님은 움직일 수 없었죠.”
서리한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같았다. 사마독이 스승을 무력화시키고 나한철이 뼈를 부쉈다. 이미 갱도에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소연화가 덧붙였다.
“하지만 진짜 죽인 건 따로 있었어요.”
표정이 사라졌다. 미소가 있던 자리에 공허함만 남았다.
쾅. 나한철의 쇄골착이 떨어져 바닥이 갈라졌다. 그러나 서리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 목소리가 깨져 있었다.
소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요. 스승님을 죽인 건 저예요, 막내야.”
그녀의 오른손이 허공을 스치자 손톱에서 보랏빛 독이 안개처럼 번졌다.
“신경마비 독이라고 들어봤죠? 스승님이 직접 가르쳐주셨어요. 호흡 근육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심장만 뛰게 하는 독. 의식은 살아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연화가 손톱을 내려다봤다. “철 오라버니가 뼈를 부수고 있을 때, 저는 여기서 이걸 주입했어요. 목의 핏줄 쪽으로요.”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스승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죠. 부서진 뼈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면서도 소리조차 못 내고, 숨이 멎을 때까지 깨어 있었어요.”
광장에 정적이 내렸다. 서리한의 오른손이 바닥을 움켜잡았다. 손톱이 바위에 긁혀 부러졌다.
“네가.”
그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한철이 쇄골착을 뽑아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말했잖냐. 뼈를 부순 건 나지만, 진짜 죽인 건 소연화 신경 독이다. 현천명은 내 주먹에 맞으면서도 이미 네 년 독으로 꼼짝 못 했다.”
소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꼼짝 못 하셨죠.
하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보고 싶었어요. 고통스러워하는 스승님 표정을요.“
서리한의 몸이 떨렸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렀다.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왜.” 무너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연화가 그를 내려다봤다. 건조한 눈동자에 서리한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왜냐고 묻네요.
사실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그냥 가능했으니까요. 궁금했어요. 우리 모두를 굴복시킨 그가 죽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녀의 손가락이 서리한의 뺨을 스쳤다. 차가웠다.
나한철이 쇄골착을 어깨에 걸쳤다. “이제 다 들었지? 궁금한 거 있냐?”
서리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손이 바닥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을 뿐이다. 손톱 밑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갱도 입구에서 가벼운 발걸음이 들렸다. 백서린이었다. 그녀가 광장에 들어서다 멈췄다. 서리한이 무릎 꿇은 모습, 어색하게 굽은 왼쪽 옆구리, 입술에 번진 피, 그리고 그 앞에 선 나한철과 소연화.
백서린의 손이 침통으로 갔다. 떨렸다. 오른손 검지가 침 하나를 뽑아 쥐는 순간에도 진동했다.
그녀는 서리한의 상태를 훑었다. 골절. 내장 압박.
호흡 곤란. 시간이 없었다.
천천히 등을 바위 벽에 붙이고 침을 쥔 손을 허리춤 뒤로 감췄다. 호흡 한 번. 떨림 위로 침술 경락이 그려졌다.
나한철의 체독 경락이 보였다. 단단한 외피 아래 통로가 빛났다. 목의 핏줄 근처, 체독이 가장 얇은 지점. 거기에 침을 꽂으면 체내 독기가 역류하여 전신 경련이 시작된다.
백서린이 숨을 내쉬며 발끝을 돌렸다. 침을 감춘 채 소연화의 시선이 서리한에게 고정된 틈을 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을 감춘 손에 힘을 주며 광장을 가로질렀다. 횃불의 열기가 볼을 스치고 사라졌다. 발밑의 광석 부스러기가 점차 굵은 암반으로 바뀌었고, 공기는 한 걸음마다 축축하고 차가워졌다. 채 수십 보를 못 가 폐광의 어둠이 그녀의 어깨를 삼켰다.
나한철의 쇄골착이 허공을 갈랐다. 서리한이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쇠지레 끝이 왼쪽 갈비뼈를 스쳤다. 뼈가 우지끊 소리를 냈다. 숨이 막혔다.
“이게 사부님 기분이었겠지?”
나한철이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오른발이 바닥을 찍을 때마다 돌가루가 튀었다. 어깨 너머로 횃불이 그의 대머리를 비췄다. 정수리의 지네 흉터가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렸다.
“소연화가 독으로 신경부터 마비시켰어. 그 늙은이가 꼼짝도 못 하더군. 그 상태에서 이걸로——”
쇄골착이 다시 올라갔다.
백서린이 광장 입구 바위 뒤에서 손을 뻗었다. 침 하나가 집게손가락과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오른손 검지가 떨렸다.
다른 손으로 손목을 잡아 고정했다. 침 끝이 흔들리다 멈췄다. 나한철의 겨드랑이가 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쇄골착이 정점에서 멈추는 찰나, 그녀가 침을 던졌다. 은빛 가는 선이 어둠을 가르며 나한철의 왼쪽 어깨 견정혈에 박혔다.
나한철의 오른팔이 경직됐다. 쇄골착이 손에서 미끄러져 땅에 떨어지며 불꽃이 튀었다. 왼팔부터 목까지 푸른 핏줄이 솟아올랐다. 체독이 역류하는 것이었다. 근육이 돌처럼 굳어갔다.
“뭐야, 이게——”
나한철의 목소리가 끊겼다. 턱이 벌어지지 않았다.
백서린이 바위에서 뛰쳐나와 서리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일어나세요. 지금이에요.”
서리한이 이를 악물고 무릎을 폈다. 왼쪽 갈비뼈가 삐걱거렸다. 숨을 토해내며 따라 걸었다. 둘은 광장 북서쪽 낙석 더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신음이 터졌다. 나한철이 억지로 고개를 꺾으며 소리쳤다.
“잡아! 저 개새끼 도망친다!”
부하 셋이 움직였다. 앞장선 자가 쇠갈고리를 꺼내며 달려들었다.
백서린이 낙석 틈 사이로 서리한을 밀어 넣고 자신도 뒤따랐다. 돌 틈으로 기어들자 서쪽 폐갱도가 나타났다. 어둡고 좁았다. 통로 폭이 성인 어깨 하나 겨우 지날 정도였다. 공기에는 쇳가루 냄새가 배어 있었다.
“잠깐만.”
백서린이 서리한의 어깨를 벽에 기대게 했다.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가슴을 짚자 갈비뼈가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갈비뼈 두 개 정도 금 갔어요. 폐는 다행히 안 찔렸습니다.”
서리한이 눈을 감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가 끽끽 소리를 냈다.
바깥 광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낙석 틈 있다! 따라 들어가!”
백서린이 손을 뻗어 침 두 개를 뽑아 갱도 입구 바위 틈에 꽂았다. 침 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임시 진통이에요. 움직일 때마다 아프겠지만 호흡은 좀 편해질 거예요.”
침통에서 굵은 침 하나를 집어 혈위 두 곳을 빠르게 찔렀다. 침 끝이 푸르게 빛났다. 서리한의 숨소리가 조금 깊어졌다.
“십 분이에요. 그 안에 멀리 가야 합니다.”
서리한이 눈을 떴다. 동공이 초점을 찾았다.
“무슨 소리였지.”
백서린이 붕대를 꺼내며 물었다. “나한철의 말 말인가요?”
“끝까지.”
백서린이 잠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벽에 박혀 있었다.
“소연화란 자가 스승님께 신경 마비 독을——”
“그 부분은 들었어.”
서리한이 말을 잘랐다. 오른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그 후다. 뭘 더 말했나.”
백서린이 붕대를 그의 갈비뼈 쪽에 두르며 입을 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나한철이 뼈를 부쉈다고 했어요. 소연화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고——”
서리한의 손가락이 바위를 긁었다. 손톱 밑이 벗겨지며 피가 났다.
“셋.”
숨을 들이켰다.
“사마독은 독으로 무력화했다. 그조차 제대로 몰랐을 걸.”
“무엇을요?”
“소연화가 가담한 사실.”
서리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마독이 주도하고 나한철이 거들었을 거라 짐작했지만 처음부터 셋이었다.
“왜.”
입술이 바짝 말랐다.
“소연화는 왜.”
백서린이 붕대 끝을 찢어 매듭지었다. 손가락이 붕대 끝에 닿는 순간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검지부터 내려다봤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서리한이 숨을 내뱉었다. 차가워진 눈으로 벽을 응시했다.
“하나 더다.”
백서린의 손이 멈췄다.
“대상.”
서리한이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검지, 중지, 약지.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사마독. 나한철. 그리고——”
셋째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소연화.”
그때 백서린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 좀 보여주세요.”
서리한의 손가락 끝이 의지와 상관없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톱 밑으로 푸른 실핏줄이 번져나갔다. 백서린의 표정이 굳었다.
“만독지환.”
서리한이 손을 거두려 했으나 그녀가 놓지 않았다.
“언제부터예요.”
“방금.”
“언제부터 떨렸냐고 묻는 거예요.”
서리한이 대답하지 않았다. 백서린이 손목 맥을 짚었다. 맥박이 빠르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주기가 앞당겨지고 있어요. 원래라면 아직 최소 열흘은 남았어야——”
“안다.”
서리한이 손목을 뺐다. 손끝 경련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감쌌다.
“칠절마독공을 쓸수록 빨라진다.”
백서린이 침통을 집었다. 손끝 떨림이 침 끝으로 전해져 침이 울었다. 멈추고 다시 쥐었다. 손가락을 꺾듯이 힘을 줘 손목을 고정했다.
“이 속도라면… 닷새 안에 심각한 발작이 올 거예요. 제 침술로 막을 수 있는 한계를 넘을지도——”
“그 전에 끝낸다.”
백서린이 고개를 들었다. 서리한이 벽에서 일어났다. 떨리는 손을 소매 속으로 감추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한철을. 여기서.”
“지금 몸 상태로는——”
“의원.”
서리한이 그녀를 똑바로 봤다. 얼굴의 푸른 핏줄이 더 짙어져 있었다.
“목숨을 구한 건 인정한다. 다만 내 선택까지 막진 못 한다.”
백서린이 침통을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막는 게 아니에요. 안 막는 거예요.”
“동행 조건도 아니었고.”
“지금 그걸——”
말이 끝나기 전에 갱도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쪽이야! 서쪽 갱도로 갔다!” 나한철의 부하들이 낙석을 치우고 있었다. 바위가 움직이는 소리, 쇠지레로 찍어내는 소리가 갱도에 울렸다. 그 너머로 나한철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찾아! 기어 들어가서라도 끌어내!”
백서린이 침통을 허리춤에 달고 서리한의 팔을 부축했다.
“뒤로 가세요. 이 갱도는 폐갱도니까 어딘가로 통할 거예요.”
둘이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갱도가 점점 좁아져 천장이 내려앉은 곳은 허리를 굽혀야 했다. 서리한이 허리를 숙일 때마다 갈비뼈가 움직이며 숨이 짧아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갱도가 갈라지는 지점에 다다랐다. 왼쪽은 천장이 무너져 막혔고 오른쪽은 어둠이 더 짙었다. 습기 냄새가 풍겼다.
그때 오른쪽 갱도 깊은 곳에서 불빛 하나가 깜빡였다.
작고 희미했다. 등불인지 촛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둠에 잠긴 통로 저 끝에서 뭔가가 타고 있었다.
백서린이 걸음을 멈추고 서리한을 벽쪽으로 밀었다. 손이 침통으로 갔다. 서리한도 보았다.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듯 한 번 더 깜빡였다. 누군가 들고 움직이는 듯했다.
발소리가 들렸다. 매우 느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규칙적인 간격으로 바닥의 돌부스러기를 밟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리고 목소리.
맑고 고왔다. 오래전 잊었던 노랫가락처럼 어두운 갱도 안에서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여성의 음성이었다.
“사제, 이제야 오셨군요.”
서리한의 몸이 굳었다.
불빛이 천천히 다가왔다. 흔들리는 불꽃 뒤로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체형. 허리까지 닿는 장발의 그림자. 손목과 발목에서 작은 방울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소연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