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독문복수전

8화

제련소 잔해에 연보랏빛 안개가 바닥을 기어오듯 번졌다. 소연화의 발목에서 금줄 방울이 울렸다.

서리한의 목덜미 혈관이 움찔거렸다. 동공이 풀리고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백서린이 침통에서 은 침 세 개를 뽑으며 숨을 들이켰다.

“환혼향이에요.”

소연화의 미소가 안개 너머로 흐려졌다.

“사제, 나한철의 팔찌를 챙겼더군.”

서리한의 시야 한복판에서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름 깊은 이마, 제자들을 바라보던 눈. 환영인 줄 알았으나 형상이 또렷했다. 소연화의 목소리가 환영 속으로 스며들었다.

“스승님은 그렇게 보고 싶은 얼굴인가. 나는 아니었는데.”

환영 속 스승이 등을 돌렸다. 걸어가는 방향에 열두 살의 소연화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를 비녀로 막 올리던 첫해의 모습이었다.

백서린이 침을 움직였다. 풍지혈, 천주혈, 합곡혈. 서리한의 목의 핏줄 옆으로 침이 박혔다. 근육 경련이 멎고 호흡이 안정되었다.

“숨을 느리게 쉬어요. 신경계를 직접 교란하는 독이에요. 당신의 기억을 먹이로 삼아요.”

서리한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고통으로 시야를 붙잡았으나 환영은 물러나지 않았다. 스승의 뒷모습이 소연화 앞에 멈춰 섰다.

소연화가 손가락으로 등불 심지를 쓸자 불빛이 흔들리고 안개가 짙어졌다.

“스승님은 나에게 독을 가르쳤어. 칠절초의 중량을 외우고 독사의 사육 온도를 기록했지. 정확히 열아홉 가지 독의 조합법을 스스로 찾아냈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소연화가 스승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공부 잘했다, 연화야.’ 그것뿐이었어.”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안개가 서리한의 무릎까지 차올랐다. 백서린이 백회혈을 노리고 침을 하나 더 뽑았으나, 서리한이 손을 들었다.

“기다려.”

환영 속에서 스승이 소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연화의 작은 손이 스승의 소매를 잡았다. 스승이 웃으며 손을 풀고 서리한 쪽으로 걸어왔다.

“나를 딸이라고 부르면서.”

소연화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으나 눈은 건조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안아준 건 언제였을까. 칠절마독공을 완성한 자리에서였어. 네가 있었지, 사제. 그날 스승님은 네 등만 두드렸어.”

백서린의 손끝이 침을 쥔 채 멈췄다. 이 독은 기억의 편린을 추출해 가장 깊은 상처에 꽂는 것이었다.

“자는 독이 아니에요. 후회를 먹고 자라는 독이에요. 자신이 과거에 느끼지 못한 감정까지 왜곡시켜서 주입하는 거예요.”

소연화의 시선이 백서린에게 닿았다.

“의원이라는 이가 제법 아는군. 그런데도 네 침은 그의 가슴 한복판을 찌르지 못했지? 나한철 발바닥에 침 놓을 때는 떨리지도 않던데.”

백서린의 오른손 검지가 미세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침을 쥔 손을 허리춤으로 내렸다.

서리한이 일어섰다. 갈비뼈와 어깨의 부상이 항의했으나, 벽을 짚고 선 채 눈을 소연화에게 고정했다.

“죽인 이유가…… 그거냐.”

소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금줄 방울이 딸랑 울렸다.

“이유?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늘 생각해 왔어. 그런데 그날, 사마독이 금독단을 가져왔지. 나한철이 쇄골착을 들고 왔어. 나는 그냥—”

목소리가 가벼워졌다.

“가능했기 때문이야.”

서리한의 오른손이 떨렸다. 환영 속 스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되돌아왔다. 백서린이 내관, 신문, 소부혈을 따라 침을 놓으며 심경을 안정시켰다.

“심장 맥이 너무 빨라요. 계속 이런 속도로 뛰면 독공의 독혈이 역류해요.”

소연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제, 네 곁의 의원 참 재미있구나. 그렇게 네 몸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정작 자기가 왜 그토록 떠는지는 말하지 않았지? 왜 너 같은 독문 제자의 혈을 뚫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단 한 번도 치료하지 못하는지.”

백서린의 침이 멈췄다. 호흡이 짧아졌다. 서리한이 백서린을 보지 않고 소연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관계없다. 이미 알고 있다.”

백서린의 숨이 한 번 끊겼다. 서리한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넘어지지 않았다.

“네 독은 질병이 아니야.”

서리한이 아니라 백서린의 목소리였다. 침통을 다시 열며 말을 이었다.

“환혼향 자체는 신경을 교란하지만, 네가 퍼뜨리는 것은 환혼향 이상이에요. 네 피가 스며 있어요. 네 망상, 네 집착이 독에 녹아서 공기 중에 퍼지고 있어요. 이건 독공이 아니에요. 망상에서 비롯된 자가중독이에요. 네 몸이 네 마음을 따라 녹아내리는 거예요.”

소연화의 미소가 잠시 사라졌다. 안개가 흔들렸다.

백서린이 서리한의 풍부혈에 침을 꽂았다. 서리한의 동공이 수축하고 시야가 맑아졌다. 환영 속 스승의 형상이 금이 가고 무너졌다.

소연화의 입술이 열렸다. 공허한 미소가 다시 올라붙기까지 한 호흡이 걸렸다.

“의원 말이 맞아. 맞는 말이야. 내가 스승님을 사랑했어. 독문의 제자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모든 독을 가지고 싶었어. 그 독으로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 독을 주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스승님이 나만 바라봤거든.”

서리한이 걸음을 멈췄다. 주먹 쥔 손에서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가 안개와 닿자 검게 변색되었다. 백서린이 서리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것이 스승님을 죽일 이유가 되느냐.”

서리한의 목소리에 떨림이 없었다. 소연화가 웃었다. 방울이 연이어 울렸다.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제자는 모르는 거야. 너는 늘 그랬지. 스승님이 밤새 너만 가르칠 때, 네 독공이 한 단계 올랐다고 식사 자리에서 자랑할 때. 나는 그 옆에서 술을 따르고 있었어. 스물세 번.”

소연화의 손이 허공을 스쳤다. 검붉은 손톱이 서리한의 가슴을 향해 그어졌다. 백서린이 서리한을 옆으로 밀었다. 손톱이 빗나가 어깨의 도포를 찢었다. 찢긴 천 사이로 검게 부풀어 오른 혈관이 드러났다.

소연화의 다른 손이 그 혈관을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에 독침이 끼워져 있었다.

“기억나, 사제. 이건 스승님의 수법이야. 독공이 막힌 경맥을 뚫을 때 쓰는 침인데, 반대로 찌르면 어떻게 될지 너도 알고 있지.”

백서린이 몸을 던졌다. 너무 늦었다.

침이 서리한의 천돌혈 옆으로 박혔다. 목 아래, 독공의 독기가 순환하는 주요 경맥이었다. 서리한의 혈관이 푸른빛에서 검은빛으로 변했다. 무릎이 꺾이고 바닥에 쓰러졌다.

소연화가 한 걸음 물러서며 등불을 집어 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네 안의 만독지환을 활짝 피워줄게. 그게 내가 너에게 줄 마지막 선물이야.”

발걸음이 갱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방울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안개는 더디게 걷혔다.

백서린이 서리한의 목에 꽂힌 침을 잡았다. 손끝이 떨렸다. 깊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침 끝이 경맥을 거슬러 독기를 역류시키고 있었다.

“숨 쉬어요. 들이쉬고, 멈추지 말고.”

떨리는 검지로 침을 감았다. 침을 뽑는 순간 서리한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검은 피가 침 구멍에서 한 방울, 두 방울 솟았다. 그친 뒤에도 혈관이 검게 남아 있었다.

백서린이 서리한의 손목을 잡고 열다섯 호흡 동안 맥을 짚었다. 맥이 세 번 변했다. 처음엔 급하고 거칠었다. 두 번째는 깊고 느렸으나 힘이 없었다. 세 번째 맥은 실을 잣듯 가늘게,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소연화의 침이 만독지환을 앞당겼어요. 전에 내가 진단한 것보다 빠른 속도로 만독귀원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서리한의 눈이 떠졌다. 초점이 천천히 돌아왔다.

“얼마나.”

“정확한 숫자를 원해요?”

“모르는 것보단.”

백서린이 침통을 닫았다.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두 번. 칠절마독공을 앞으로 두 번만 더 쓰면, 만독지환 발작이 스스로를 삼켜요. 해독제도 침술도 소용없어요. 세 번째는 없어요.”

서리한이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녹색 동공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소연화 처리할 때 한 번. 그걸로 충분하다.”

백서린이 고개를 저었다. 해독약이 든 작은 병을 꺼내 서리한의 손에 쥐여주었다.

“당신 몸은 이제 계산이 안 되는 상태예요. 만독지환의 발작 주기가 닷새에서 사흘로 줄었고, 소연화의 침이 경맥을 손상시켜서 독공이 오히려 당신을 갉아먹고 있어요.”

서리한이 해독약을 받아쥐었으나 마개를 열지 않았다. 백서린이 손을 뻗어 그의 목 옆 혈관을 다시 짚었다. 손끝에 닿는 맥박이 예상보다 약했다. 시선이 서리한의 품 안에 든 나한철의 팔찌로 향했다.

막사는 제련소에서 동쪽으로 백 보 떨어진 곳이었다. 갱부들이 교대 전 머물던 공간이라 바닥엔 짚단이 깔려 있고, 천장엔 기름때 낀 등롱 하나가 걸려 있었다. 서리한이 먼저 들어가 벽에 등을 기댔다. 호흡이 채 가라앉지 않았다.

백서린이 짚단을 털고 그를 앉혔다. 침통을 열어 목의 혈관을 확인했다. 맥은 느리고 탁했다.

“소연화의 침에는 신경 마비 독 말고도 촉매가 섞여 있었어요. 만독지환의 독기를 인위적으로 깨우는.”

“버틸 만하다.”

“아니에요.” 백서린이 침을 단전 위 삼 촌에 꽂고 비틀었다. 서리한의 근육이 수축했다 풀렸다. “이 상태로 하루만 더 움직이면 다음 발작 땐 침으로도 못 막아요.”

“그 전에 끝낸다.”

“끝내고 죽겠다는 말로 들려요.”

서리한은 답하지 않았다. 백서린이 침을 더 뽑다가 멈췄다. 오른손 검지가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서리한이 그 손을 보았다.

“예전에도 그랬다고 했지.”

백서린은 침을 내려놓지 않았다. 떨림을 숨기지도 않았다.

“남만에서 유통되는 약재 중에 오수유라는 게 있어요. 진짜는 열매 껍질에 미세한 솜털이 있는데, 누군가 그 솜털 대신 비소 가루를 입혀서 팔았어요. 달여 마시면 사흘 안에 장이 녹아요.”

침을 다른 손가락으로 옮겨 쥐었다.

“제가 고치던 사람이 그걸 먹었어요. 약재 감별할 때 검지로 솜털을 확인하는데…… 그날은 떨려서 확인을 못 했어요.”

“이름이 뭐였지, 그 환자.”

백서린이 고개를 저었다.

“환자가 아니었어요. 약혼자였어요.”

등롱 기름이 한 방울 떨어졌다.

“가짜 약재의 유통 경로를 삼 년 동안 추적했어요. 남만에서 중원까지. 그 끝에 만독상단이 있었어요. 사마독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알게 됐고요. 그의 상단이 유통을 관리했어요. 누가 죽든 관심도 없었고요.”

“그래서 의원 일에 확신이 없던 거냐.”

“누굴 살리려고 할 때마다 그 사람 얼굴이 떠올라요. 손은 떨리고, 침은 빗나가고. 그러다 또 누군가 죽을까 봐 무서워서.”

백서린이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당신은 다르더라고요. 만독지환도 칠절마독공도, 그냥 병증일 뿐이에요. 과거는 방해하지 않아요.”

서리한이 몸을 약간 일으켰다.

“사마독을 쫓는 이유가 나뿐만이 아니었군.”

“네.” 백서린이 손을 풀었다. 검지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내가 당신의 독을 반드시 풀겠어요. 그게 나한테도 복수니까.”

서리한이 품에서 나한철의 팔찌를 꺼냈다. 무쇠와 가죽을 엮은 투박한 장신구였다. 등롱 불빛 아래 뒤집자 안쪽 가죽 사이로 작은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손톱으로 밀어내자 푸른빛이 불빛을 받았다. 스승의 비취 목걸이 조각이었다.

“사마독의 반지에 이게 있었지.”

백서린이 몸을 기울였다. “같은 걸 소연화의 비녀에도 달려 있겠네요.”

“그렇다.” 서리한이 비취 조각을 손바닥에 올렸다. 조각난 푸른 돌 세 개가 원래 하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깎임 자국이 보였다. “스승님이 셋에게 나누신 거다. 입문 순서대로.”

“소연화한테 독경통해의 마지막 페이지가 있을 거예요. 스승님의 의서를 찢은 게 그 사람이라면.”

서리한이 비취 조각을 품 안에 넣었다.

“소연화냐, 사마독이냐.”

“사마독을 먼저 쫓으면 소연화는 다시 사라질 거예요. 그런데 그보다 이 광산을 떠나기 전에 확보할 게 있어요. 칠절마독공 해독에 필요한 한빙석유라고, 폐광 깊은 곳 물웅덩이 바닥에서 나오는 유백색 액체예요.”

“위치를 아나.”

“갱도 서쪽 끝이에요. 아까 부상자 처치할 때 갱부 하나가 말했어요.”

두 사람은 막사를 나섰다. 서쪽 갱도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백서린이 침통에서 침 하나를 뽑아 쥐고 앞장섰다. 폐광 깊이는 추웠고 벽을 타는 물줄기가 얇은 얼음막을 만들었다.

동굴 끝이 넓어지며 작은 웅덩이가 나타났다. 수면에 반사된 등롱 불빛이 벽을 은빛 비늘처럼 물들였다. 웅덩이 바닥에서 유백색 빛이 우러났다. 한빙석유였다.

백서린이 한 걸음 다가서자 웅덩이 주변 암반이 푸르게 빛났다. 고대 독문의 결계 표식이 바닥 돌판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걸 채취하려면……” 백서린이 표식을 읽으며 손가락을 더듬다 멈췄다. “만독지환에 걸린 자의 독액을 대가로 요구하네요. 해독 전의 순수한 독기여야만 해요.”

서리한이 결계 앞에 섰다.

“얼마나 필요한가.”

“안 돼요. 지금 당신 몸에서 독기를 빼면……”

“닷새를 못 버틴다 했지.” 서리한이 오른손을 결계 위로 내밀었다. “닷새 후에 죽든, 지금 독을 빼서 나흘 뒤에 죽든.”

손바닥이 결계의 푸른 빛에 닿자 표식이 반응했다. 서리한의 손목 혈관이 검게 부풀며 만독지환의 독기가 결계로 빨려 들어갔다.

“소연화와 사마독을 처리할 시간이면 충분해.”

백서린이 침통을 움켜쥐었다.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결계의 빛이 흐려지자 웅덩이 바닥에서 한빙석유가 물 밖으로 떠올랐다. 유백색 액체 방울이 공중에 모여 작은 구체가 됐다.

서리한이 손을 거두자 혈관의 검은빛이 옅어졌지만 숨이 짧아졌다. 한쪽 무릎이 돌바닥에 부딪혔다. 백서린이 달려가 그를 받치고 품에서 약병을 꺼내 입술에 댔다.

“왜 이렇게 선택이 극단적이에요, 당신은.”

“시간이 짧으니까.”

백서린이 그를 부축하며 한빙석유를 도자기 병에 담았다. 갱도 바깥으로 돌아가자 동이 트기 시작했다. 산등성이 너머 첫 빛이 폐광 입구를 긴 그림자로 갈랐다.

서리한이 벽에 기대 걸으며 입을 열었다.

“소연화를 쫓는다.”

백서린이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호흡이 흰 김이 되어 두 사람 사이로 흩어졌다.

독문복수전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