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복수전
9화
해질 무렵 숲의 독무가 옅어졌다. 땅에 깔린 연무 사이로 구관의 처마가 드러났다. 이끼 낀 기와, 부서진 담장, 반쯤 열린 대문.
서리한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왼쪽 소매가 바람에 흔들렸다. 한 걸음 뒤, 백서린은 묵묵히 등을 바라봤다. 이틀 내내 말이 없었다. 한빙석유를 채취한 뒤로도, 막사를 떠난 뒤로도.
대문 앞 열 걸음. 오른손이 허리춤에서 독약병 하나를 빼냈다. 엄지로 마개를 밀어 열었다.
첫 번째 그림자가 담장 위에서 일어섰다. 검은 복면, 손에는 단도. 이어 둘, 셋.
좌우 수풀에서 일곱. 지붕에서 둘. 대문 안쪽에서 셋.
열셋.
서리한이 손목을 틀었다. 독약병에서 짙은 자색 가루가 뿜겨 나왔다. 바람을 타고 앞쪽으로 번졌다.
세 명이 비틀거렸다. 복면 아래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명이 무릎을 꿇자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머지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백서린이 뒤로 물러서며 침 하나를 뽑았다. 첫 상대의 손목을 비틀어 단도를 빼앗고, 칼날을 뒤집어 자루로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한 명.
두 번째가 왼쪽 허리를 노렸다. 오른발로 땅을 박차며 반보 회전했다. 왼쪽 의수로 팔뚝을 쳐내고 무릎으로 복부를 찍었다. 두 명.
세 번째와 네 번째가 동시에 덤볐다. 발끝으로 차 올린 독약병이 허공에서 터졌다. 푸른 액체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어깨와 가슴에 닿자 옷감이 지글댔다. 비명은 짧았다. 둘 다 뒷걸음치다 쓰러졌다.
다섯째가 등 뒤에서 쇠사슬을 휘둘렀다. 상체를 숙여 피했다. 오른팔로 바닥을 짚고, 다리를 한 번 휘둘러 상대 발목을 걸었다. 넘어지는 순간 정수리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여섯, 일곱. 백서린이 침을 날렸다. 두 상대의 손등에 꽂히자 손아귀가 풀리며 병장기가 떨어졌다. 마비침이었다.
여덟째와 아홉째가 백서린에게 달려들었다. 서리한이 몸을 날려 앞을 막았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서 검은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칠절마독공의 초식 하나, 독영섬. 손가락이 두 상대의 목 옆줄기를 스쳤다. 둘 다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열 명.
남은 셋이 서로 등을 맞대고 물러섰다. 손가락에 묻은 독기를 털어내며 서리한이 걸음을 옮겼다.
“소연화에게 전해.”
대문 안을 향한 목소리. 낮고 건조했다.
“사형이 왔다고.”
마지막 셋이 대문 안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백서린이 침을 거두며 곁으로 다가왔다.
“도망이 아니라 불러들이는 거예요.”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 독약병을 하나 더 꺼냈다. 손바닥에 단단히 쥐었다.
대문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실내에서 울리는 것처럼 낮고, 벽을 타고 번지는 소리였다. 구관의 빈 복도가 소리를 증폭시켰다.
“사형.”
목소리만으로는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사방에서 동시에 들리는 듯했다.
대문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았다. 앞마당은 황폐했다. 깨진 독항아리, 부서진 훈련 목인, 말라붙은 약초밭. 구관 본채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서리한의 말에 소연화의 웃음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기다렸다는 말, 사형에게 어울리지 않는걸요. 평소에는 오지 않던 분이.”
본채 문틈으로 붉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느리게, 살아 있는 것처럼 바닥을 기며 퍼졌다.
“환혼향.”
백서린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통에서 가는 침 두 개를 꺼냈다. 서리한이 앞을 막아섰다.
“사형은 항상 그랬죠. 스승님의 눈에 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소연화의 말투는 차분했다. 꾸밈없는, 담백한 음색. 손에 쥔 독약병이 반응했다.
만독지환이 약하게 울렸다. 전조 증상. 왼쪽 가슴 깊은 곳에서 독기가 한 번 수축했다.
“사매.”
본채를 향해 말했다.
“네 비녀를 받으러 왔다.”
잠시 침묵. 붉은 연기가 문지방을 넘어 앞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내 비녀라면.”
소연화의 음성이 미묘하게 낮아졌다.
“스승님이 주셨던 물건인데. 사형도 가지고 있나요, 그런 물건.”
백서린이 소매를 붙잡고 재빨리 맥을 짚었다.
“맥박이 불규칙해요. 만독지환이 반응하고 있어.”
팔을 거두려 했지만 백서린은 손을 놓지 않았다. 검지와 중지가 손목 안쪽에 단단히 밀착됐다.
“닷새라고 했죠, 폐광에서.”
숨을 들이켰다. 붉은 연기가 발밑까지 다가왔다. 침 하나를 꺼내 자신의 목 아래 움푹한 곳에 꽂았다. 방어용 청심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한빙석유를 채취할 때 독액을 대가로 주면서 만독지환의 독기 균형이 깨졌어요. 발작 주기가 앞당겨지고 있어.”
서리한이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얼마나.”
“지금 상태라면 사흘.”
침을 뽑아 서리한의 엄지손가락 쪽 혈에 놓았다. 독기 흐름을 일시 억제하는 자리였다.
“칠절마독공을 한 번이라도 더 쓰면 시간은 더 줄어요. 어쩌면 하루.”
붉은 연기가 두 사람의 발목을 감쌌다. 숨을 가다듬었다. 왼쪽 의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독기 수축의 여파였다.
“사흘이면 충분해.”
“충분하지 않아요.”
백서린의 음성이 처음으로 높아졌다. 반말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침통 가장자리를 눌렀다.
“당신은 들어가서 싸울 생각만 하고 있어요. 내 진단은 듣지도 않고.”
대꾸하지 않았다. 본채 안에서 소연화의 발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규칙적인 걸음. 신발이 돌바닥을 스치는 소리.
“사흘 안에 소연화를 처리하고, 해독제를 완성해야 해요. 불가능한 시간이 아니에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침통을 닫았다. 품에서 한빙석유가 담긴 도자기 병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 유백색 빛이 흘러나왔다.
“이걸로 해독제를 만들 거예요. 한빙석유는 칠절마독공의 독기를 중화하는 유일한 약재예요. 독경통해에 기록된 그대로예요. 다만 마지막 장이 없어서 배합 비율은 모르는 상태.”
잠시 멈췄다. 붉은 연기가 치마자락을 타고 올라왔다. 한 걸음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소연화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해요. 그러니까 이번엔 단순한 복수가 아니에요.”
서리한이 뒤를 돌아봤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붉은 연기 너머로 백서린을 응시했다.
“진단을 마저 해.”
“만독지환 발작이 사흘 안에 올 거예요. 그 전에 소연화를 제압하고, 찢긴 페이지를 찾아 해독제를 완성해야 해요. 독공을 한 번이라도 더 쓰면 발작이 앞당겨져요. 이것만은 기억해요.”
숨을 들이켰다. 손가락이 침통을 떠나 서리한의 오른손을 잡았다.
“당신의 복수는 당신이 해야 해요. 나는 막지 않을게요. 하지만 살아서 나올 방법도 생각해야 해요.”
소연화의 발소리가 멈췄다. 본채 안에서 등불이 하나 켜졌다. 흔들리는 불빛 너머로 실루엣이 보였다. 마른 체형, 길게 늘어뜨린 머리.
“사형. 그리고 의원님.”
문 안쪽에 서서 말했다. 손에 든 등불이 얼굴을 아래에서 비췄다.
“들어오세요. 차를 준비했어요. 스승님이 즐겨 드시던 국화차.”
걸음을 옮겼다. 백서린이 팔을 놓지 않았다. 손바닥이 맥박 위에 그대로 있었다. 독기가 한 번 더 수축했다. 사흘.
“시간을 정했으면 가자.”
서리한의 말에 손을 거두었다. 침통을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한빙석유 병을 품 깊숙이 넣었다.
“해독제를 만들겠습니다. 사흘 안에.”
두 사람이 본채 문을 향해 발을 디뎠다. 붉은 연기가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소연화의 등불이 한 번 깜빡였다. 손톱이 등불 유리면을 스친 소리가 났다. 보랏빛 손톱이 불빛에 반사됐다.
문지방을 넘기 직전, 백서린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지막 진단이었다.
“사흘째 해질 무렵. 그때까지 끝내지 못하면 만독지환 발작이 시작돼요. 두 번은 막을 수 있어요. 세 번째는, 막을 수 없어요.”
구관으로 향하는 길 내내, 백서린은 침묵 속에서 해독제의 마지막 배합 비율을 가다듬었다. 사흘째 해질 무렵이라는 시한이 손가락 끝에서 맥박처럼 뛰었다. 서리한은 붉은 연기 너머로 구관의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등불은 이미 꺼졌고, 소연화는 따라오지 않았다. 돌문 앞에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반쯤 열린 틈새로 먼저 스며들었다.
구관 입구의 돌문은 반쯤 열린 채 멈춰 있었다. 백서린이 등롱을 높이 들자 문틈으로 스며든 빛이 바닥 먼지를 얇게 비췄다. 서리한이 먼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들숨에 섞인 냄새가 낯익었다. 말린 지네 가루와 사향, 거기에 썩은 풀내 비슷한 단내. 독문 제련실에서 늘 풍기던 냄새였다.
백서린이 코를 막으며 따라 들어왔다. 등롱 빛이 홀 기둥을 스치자 벽에 걸린 촛대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심지는 다 타버렸고 굳은 밀랍만 남아 있었다.
“공기가… 이상해요.”
등롱을 내려놓으며 침통을 열었다. 서리한도 느꼈다. 목구멍 뒤쪽이 쓴맛으로 조여들었다. 공기가 단순히 탁한 게 아니었다. 독이 섞여 있었다.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그 순간 홀 중앙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그림자가 아니었다. 빛 자체가 굴절하며 사람 형체를 빚었다. 어깨 너비, 목을 약간 숙이는 버릇, 도포 자락이 바닥을 스칠 듯 말 듯한 높이까지.
현천명이었다.
“리한아.”
환영이 입을 열자 칼자루가 떨렸다. 그 목소리는 십 년 전 제련실에서 “손목 각도가 틀렸네”라고 말하던 그대로였다. 느리고 온화하며, 한 음절 한 음절이 칼날처럼 정확했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스승님…….”
“왜 나를 구하지 않았느냐.”
현천명의 환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도포 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 중의 쓴맛이 짙어졌다. 숨이 가빠졌다. 만독지환의 독기가 혈관을 타고 경련하듯 뛰었다.
“내가 가르친 독공으로,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나를 저택 바닥에 눕혔을 때.”
환영의 눈이 똑바로 응시했다. 동공은 짙은 녹색이었다. 스승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소연화의 눈 색이었다.
“넌 어디에 있었느냐.”
대답하지 못했다. 무릎이 돌바닥에 부딪혔다. 칼자루를 놓치지 않았지만 손아귀에 힘이 빠져나갔다. 열여섯 살 겨울밤, 북쪽 상단 일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 스승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 장면이 환영과 겹쳐졌다.
“스승은 나만의 것이었다.”
소연화의 목소리가 벽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방향을 짐작할 수 없었다. 모든 벽에서 동시에 울리는 듯했다.
“사형은 몰랐을 거예요. 스승님께서 내게만 보여주신 표정이 있었어요. 독을 조제할 때, 손이 떨리지도 않고…….”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스승님은 나를 끝까지 제자로만 두셨어요. 그게 견딜 수 없었다는 걸, 사형은 이해할 수 있나요?”
백서린이 옆으로 다가왔다. 침 하나를 뽑아 자신의 손등에 꽂았다. 얕게 찌르는 소리만 났다. 입을 열었다.
“환혼향을 개량했군요. 지네 분말에 사향을 섞은 기반독 위에, 후회의 감정을 촉매로 쓰는 구조.”
말투가 평소보다 빠르고 또박또박 끊겼다. 독 성분을 분석하는 의원의 목소리였다. 침통에서 가는 침 하나를 더 꺼냈다.
“후회는…… 당신의 독을 먹고 자라는 씨앗 같은 거예요.”
손등의 침을 뽑아 자신의 미간에 얕게 찔렀다.
스승의 환영이 일그러졌다. 어깨 윤곽이 깨지고 도포 자락이 연기처럼 번졌다. 호흡이 깊어졌다. 눈앞의 흐릿함이 절반쯤 걷혔다.
“죄책감을 자극하는 독이에요. 스승을 향한 미안함이 클수록 깊이 침투해요. 그 감정을 먹어치우면서.”
셋째 침을 준비하며 서리한을 돌아봤다. 미간에 박힌 침이 이마에 작은 핏방울을 남겼다.
“듣고 있어요? 이건 당신의 기억을 왜곡하는 독이에요. 진짜 스승님이 아니에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숨은 아직 거칠었지만 시선은 돌아와 있었다. 칼자루를 다시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붙었다.
“소연화.”
목소리가 돌바닥을 기는 듯 낮았다.
“네놈이 감히.”
환영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발걸음 소리도 없이 웃음만 홀 전체에 퍼졌다. 소연화의 목소리가 천장 쪽에서 들렸다.
“독문 구관에 온 걸 환영해요, 사형. 이곳은 내가 스승님과 처음 만난 장소예요. 기억나시나요? 사형은 이미 입문하고도 한 달이 지나서야 이곳에 왔죠.”
백서린이 셋째 침을 뒷목에 꽂았다. 풍부혈. 독기 역류를 막는 자리였다. 침이 들어가자 혈관의 검은빛이 옅어졌다.
“해독은 일시적이에요. 환혼향이 아직…….”
말을 끝맺지 못했다. 천장에서 마른 바스락 소리가 났다.
수십 개의 작은 구멍이 천장 돌판 사이로 열렸다. 바늘들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백서린을 옆으로 밀치며 칼을 뽑았다. 칼날로 빗겨 낸 독침들이 바닥에 튕겼다.
몇 개가 도포 소매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이 입구의 돌문이 덜컹, 하며 닫혔다. 돌과 돌이 맞물리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백서린이 허겁지겁 침통을 챙기며 문 쪽으로 달려갔다. 손바닥으로 밀었지만 돌문은 꿈쩍도 않았다. 틈새로 칼날을 넣으려 했지만 이음매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잠겼어요. 안쪽에서 여는 장치가 아니에요.”
소연화의 웃음소리가 복도 깊숙이 물러났다. 한 걸음씩 멀어지는 기척과 함께.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독의 양이 아직 부족하니까.”
목소리에 확신이 배어 있었다.
“만독귀원이라는 게, 사형의 복수보다 한 발 앞서 있는 것뿐이니까.”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어둠 너머로 검붉은 치맛자락이 마지막으로 스치고 사라졌다.
백서린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스친 상처가 보라색으로 부풀고 있었다. 약병에서 짙은 녹색 가루를 꺼내 상처에 뿌렸다.
“일단 이걸로…… 독침의 확산은 막을 수 있어요.”
환영은 완전히 사라졌다. 홀에는 식은 촛농 냄새와 독 가루만 남았다. 칼을 거두며 등을 벽에 기댔다.
“안쪽 복도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목의 혈관이 다시 검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칼끝이 복도 방향을 가리켰다.
백서린이 등롱을 들어 올렸다. 흔들리는 불빛이 앞길을 비추자 길고 좁은 복도가 드러났다. 벽 양옆에 독약 병들이 빈 선반째 늘어서 있었다. 모두 먼지를 뒤집어쓴 채였다.
“앞으로 가는 길밖에 없네요.”
두 사람이 복도로 발을 들였다.
공기가 다시 쓴맛으로 변했다. 이번에는 환혼향이 아니었다. 더 묵직하고 차가운 독기였다. 걸음을 늦추며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복도 끝에서 빛이 스몄다. 등불도 횃불도 아닌, 푸르고 차가운 형광이었다. 그 앞에 형체가 다시 어른거렸다. 도포 자락이 바닥에 스치듯 멈췄다.
현천명이 서 있었다.
“너는 나를 구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라 선고였다. 칼끝이 바닥을 향했다. 오른손이 칼자루에서 미끄러졌다. 스승의 환영이 정확히 한 걸음 다가왔다.
백서린이 손목을 붙잡았다. 침을 꽂는 대신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맥박 위에 올라갔다.
“이건 진짜 스승이 아니야.”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의원이 아니라 동료의 말투였다.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그녀가 더 세게 붙잡았다.
소연화의 웃음소리가 벽 너머에서 새어 나왔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진짜와 다를 게 뭐가 있지?”
시선이 환영의 눈동자에 닿았다. 짙은 녹색. 소연화의 눈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스승의 얼굴을 빌린 채, 스승의 목소리로.
현천명의 환영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