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리셋
1화
공기가 비릿했다. 피와 오존, 게이트가 붕괴할 때 풍기는 특유의 금속성 냄새가 뒤섞인 공기.
정도윤은 나락의 중심, 던전 코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른손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어깨 아래로 축 늘어진 팔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코어의 마지막 방어 기제에 당한 거였다.
코어는 그가 예측한 대로 세 겹의 규칙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첫 번째 거울 복제. 두 번째 역방향 중력장. 그리고 세 번째, 생명체 접촉 시 발동하는 부식 저주.
규칙을 알았기에 두 번째까지 뚫었다. E급의 육체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규칙을 상쇄할 물리적 수단이 없었다. S급 탱커라면 버텼을 것이다. A급 딜러라면 회피했을 것이다. 그는 E급이었다.
코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전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정도윤은 피 묻은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의 시계를 더듬었다. 선배가 남긴 낡은 아날로그 시계. 유리가 금 갔고 금속 밴드가 헐거워졌지만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걸로 끝인가.”
목소리는 놀랄 만큼 담담했다. 통증이 극에 달하자 오히려 고통이 멀어졌다.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그 순간, 시계 초침이 멈췄다.
게이트 붕괴의 굉음이 사라졌다. 모든 소리가 증발한 것 같은 정적. 어둠이 시야를 삼켰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정도윤은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회색 철제 프레임에 먼지 낀 형광등 커버. 딱딱한 침상이 등을 받치고 있었다. 왼쪽 벽면에 걸린 소화기와 장비 점검표.
그는 몸을 일으켰다. 팔이 움직였다. 어깨가, 손목이, 손가락이 멀쩡하게 말을 들었다.
시선을 내렸다. 검은색 작업복. 왼쪽 가슴에 작은 글씨로 '아르고 길드 자산관리팀'이라 적힌 명찰. 자신의 사진과 이름.
정도윤.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 B3 장비고의 공기. 윤활유와 방청제, 오래된 합판 냄새. 그가 E급 각성자로 입사한 지 사흘 째 되던 날 아침, 이곳에서 깨어났었다.
1년 전이다.
전생의 기억이 쏟아졌다. 단편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첫 출동, 팀원들의 죽음, 포기하지 않고 게이트 구조를 읽던 시간들. 그리고 나락. 마지막 코어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까지.
정도윤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목에는 낡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전생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것과 똑같은 시계. 단지 금도 없고 흠집도 없는 상태라는 점만 달랐다.
“……돌아왔군.”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다. 개인적인 발견에 불과하다는 어조로, 그는 상황을 인지했다.
침상에서 내려섰다. 장비고 한쪽 구석, 방탄복과 방패가 쌓인 옆에 그의 사물함이 있었다. 번호 14.
기억과 같았다.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자, 낡은 수첩 한 권이 보였다. 출동 전날 밤 사물함에 넣어둔 빈 수첩.
정도윤은 수첩을 집어 들었다. 펜을 찾아 첫 장을 넘겼다. 빈 종이.
그는 펜을 눌러 한 줄을 썼다.
‘나락 — 거울→중력→부식. 거울은 빛 굴절률 1.0 이하. 빛으로 잡는다. 중력은 주기 3.7초.’
전생의 죽음에서 얻은 데이터.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아르고. 1차 폐쇄형 게이트에서 팀 전멸 사건. 일주일 뒤. 원인은 2차 변이 예측 실패.’
‘한세아. 전략팀장. 현장 지휘관. 보고 체계상 브리핑 수용자.’
적어 내려가면서도 눈은 차분했다. 공포도, 감격도 없었다. 마치 늘 해오던 일처럼 손이 움직였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있던 구형 스마트폰. 그는 펜을 멈추고 전화기를 꺼냈다.
화면에 ‘비상 출동 — 전 직원 장비고 집합’이라는 알림이 떠 있었다. 발신은 아르고 길드 종합상황실. 전생에서도 똑같았다. 사흘 차 신입인 그를 포함해, B3 장비고에 있던 하급 각성자 전원에게 오는 단체 메시지.
정도윤은 수첩을 접어 품속에 넣었다.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7시 3분. 정확히는 기억보다 3분 빨랐다. 미세한 차이.
장비고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이 복도로 몰려나가는 소리.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야, 신입! 출동이다. 빨리 안 나와?”
문을 열자 같은 팀의 하급 각성자가 서 있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얼굴. 그는 정도윤의 눈이 전과 다르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간다.”
정도윤은 짧게 답했다. 목소리는 평소대로 낮고 무심했다. 그는 복도로 나섰다.
품안의 수첩이 심장 근처에서 단단하게 느껴졌다. 1년 전의 정보가 빼곡히 적힌 종이 뭉치. 전생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 충분한 이유.
복도 끝 엘리베이터 앞. 하급 각성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이에 섞여 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이 켜지는 걸 바라보며, 정도윤은 한 가지 사실을 정리했다.
아르고를 몰락시킬 시간이다.
손목 시계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장은 흐린 하늘 아래 낮게 깔린 습기로 후텁지근했다. 게이트 진입구 앞으로 길드 소속 각성자들이 대기 라인을 따라 늘어서 있고, 방호복을 입은 하급 조제사 한 명이 응급 키트를 점검하는 손끝이 바빴다.
정도윤은 지급된 기본 E급 방탄 조끼의 벨크로를 손끝으로 한 번 더 눌렀다. 전생과 똑같은 장비, 똑같은 습도. 그리고 전방에서 태블릿을 든 한세아가 작전 브리핑을 준비하는 모습도 똑같았다.
“전원 주목.”
한세아의 목소리가 확성기 없이도 대기 라인 끝까지 닿았다. 전략팀장 배지를 단 그녀는 슬랙스 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이번 게이트 '그림자 미궁'은 C급으로 분류됐다. 12년 전 마지막 출현 당시 아르고 길드가 정면 돌파로 4시간 만에 코어를 파괴했다. 기존 매뉴얼을 준수할 것.”
12년 전. 정도윤은 오른쪽 손목의 낡은 시계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그 매뉴얼은 틀렸다. 아니, 정확히는 이 게이트가 두 번째 출현 때 보인 2차 변이를 고려하지 않은 매뉴얼이었다. 기억 속에서 그날 선발대 열두 명이 첫 번째 분기점에서 전멸했다. 비가시 트랩. 바닥의 명암이 3초마다 반전되는 구간이었다.
“진입 순서는 A급 2명이 선두, B급 4명이 후속, 나머지 C급 이하 인원은 중앙에서 지원.”
한세아가 말을 이었다.
정도윤은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면 똑같은 결과다. 그는 E급이다. 발언권 같은 건 원래 없다. 그래도.
“팀장님.”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앞줄에 있던 B급 각성자 하나가 어깨 너머로 힐끗 쳐다봤다. 정도윤은 한 걸음 더 나갔다.
“팀장님,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한세아의 태블릿을 쥔 손가락이 멈췄다. 회색 눈이 그를 정면으로 포착했다. 2초쯤 침묵이 흘렀다. 대기 라인에서 누군가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
“E급, 정도윤입니다.”
“E급이면 생존 훈련 외에 작전 브리핑 발언 자격은 없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한세아는 만년필을 집어 태블릿 모서리를 한 번 톡 쳤다. 습관처럼.
“짧게.”
정도윤은 입술을 축였다. 전생의 정보를 어디까지 말할지 판단하는 사이, 땀방울 하나가 관자놀이를 타고 내렸다.
“게이트 진입 후 80미터 지점, 12년 전 기록에는 없는 바닥 패턴이 있습니다. 조명이 일정 주기로 명암 반전을 반복하는 구간이고, 그 반전 타이밍이 트리거입니다.”
“근거는.”
한세아의 질문이 칼날처럼 되돌아왔다.
“게이트 개방 직후 관찰한 진입구 가장자리 마나 흐름입니다. 12년 전 기록과 비교했을 때 주기적 파동이 한 종류 더 있습니다.”
반쯤은 즉석에서 지어낸 설명이었다. 진입구 마나 흐름 분석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거기서 게이트 깊숙한 곳의 트랩을 유추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걸 정도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세아도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한세아는 그 점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녀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만년필로 손바닥 가장자리에 무언가 짧게 적었다.
“가장자리 마나 흐름에서 내부 트랩을 유추했다?”
“게이트 구조엔 반복 규칙이 있습니다. 입구가 그렇다면 안쪽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세아의 만년필이 멈췄다.
“좋다. 그 반전 패턴의 주기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 순간이었다. 전생에서 이 질문에 더듬거리다가 무시당했던 기억이 스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도윤은 기억을 더듬는 척 짧게 멈췄다가 정확히 답했다.
“3초. 어두운 타일이 밝아지는 순간 구조물이 열립니다. 그 직후 1.5초 안에 발을 떼야 합니다.”
대기 라인이 술렁였다. “무슨 E급이...” 라는 말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한세아가 손을 들자 잡음이 가라앉았다.
“선발대 구성 변경. A급 1명은 후속조로 빼고, 정찰 가능한 인원 2명을 최전방에 세운다. 밟는 면적이 넓은 중장비형은 제외.”
태블릿을 다시 든 그녀의 손끝이 빨라졌다.
“그리고 진입 전 대기 라인에서 바닥 명암 구분 훈련을 5회 실시한다.”
정도윤은 숨을 내쉬었다. 수정 브리핑이 이어지는 동안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대기 라인으로 돌아갔다. 발언 자격 이상의 일을 했다. 이제 남은 건 이 지식이 실제로 통하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곧바로 대기 라인 각성자들이 2인 1조로 바닥 명암 구분 훈련에 들어갔다. 하급 조제사가 휴대용 등의 조도를 낮추자 땅바닥에 희미한 콘 표시가 번졌다.
“다음 조.”
입회 진행관이 손을 올렸다. 정도윤은 끼어들지 않고 지켜봤다. 이미 전생에서 수백 번 밟은 패턴이었다. 여기서 틀리는 놈은 내부에서도 죽는다.
3초, 스위치, 1.5초.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 진입구. 검고 푸른 빛이 공기를 일렁이듯 휘어져 있었다. 전생에서 열두 명이 죽은 첫 분기점이 저 너머에 있었다.
시계를 만졌다. 손끝에 닿는 낡은 금속의 차가움이 방아쇠처럼 전생의 마지막 비명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엔 다르다. 최소한 저 구간은.
그때였다.
구두 굽 소리가 젖은 콘크리트를 짧게 찍으며 다가왔다. 향수인지 섬유 유연제인지 구분 안 되는 옅은 냄새가 습기와 섞였다.
“당신, 뭔가 알고 있군요.”
한세아였다. 태블릿은 이미 부관에게 넘겼는지 손에 쥔 건 만년필뿐이었다. 그녀는 정도윤의 바로 옆에 서서 진입구를 함께 응시했다. 목소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낮았다. 질문의 형태를 띠었지만 의문문이라기엔 너무 단정적인 억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