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리셋
2화
아르고 길드 본관 14층 전략회의실. 오전 10시.
유리벽 너머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렸다. 회의실 안은 간부들로 절반쯤 찼고, 타원형 테이블 중앙의 전술 홀로그램이 그림자 미궁의 단면도를 푸른 빛으로 띄우고 있었다. 정도윤은 가장 끝자리, 벽 쪽 보조 의자에 앉았다. E급 배정 자리였다. 발언권은 없었다.
박성렬이 일어났다. 회색 포마드의 머리칼이 형광등 아래 반짝였다. 안경을 벗어 천천히 닦으며 입을 열었다.
“그림자 미궁은 12년 전, 저희 아르고가 최초로 공략한 C급 게이트입니다. 당시 매뉴얼은 정면 돌파. A급 3인을 전위에 세우고 B급 4인이 후속 교전을 맡는 편제였죠. 사상자 단 2명.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테이블 중간쯤에서 낮은 동의가 이어졌다. 국장이 말을 덧붙였다.
“당시와 달라진 점은 없습니다. 동일한 게이트 구조, 동일한 등급. 교본대로만 진행하면 됩니다.”
정도윤은 손목의 시계를 만졌다. 낡은 금속 테두리가 손끝에 차갑게 닿았다. 전생에서 이 회의는 없었다.
E급은 소집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은 있다. 정면 돌파가 변이를 유발한다는 건 1년 뒤 내부 보고서가 되어서야 밝혀졌다. 그때는 이미 열두 명이 죽은 뒤였다.
박성렬이 홀로그램을 넘기려 손을 뻗는 순간, 정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장님.”
목소리는 낮았다. 테이블 위로 시선들이 꽂혔다. 박성렬의 손이 멈추고, 안경 너머로 끝자리를 응시하는 눈빛이 좁아졌다.
“……자네는.”
“E급 정도윤입니다.”
“발언권이 없는 걸로 아는데.”
“알고 있습니다.”
침묵이 2초. 누군가 머그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림자 미궁의 12년 전 데이터에는 누락된 변수가 있습니다. 게이트는 고정된 구조가 아닙니다. 동일한 형태로 출현해도 내부 규칙은 진화하죠. 특히 이 유형의 미궁형 게이트는 내부 마나 밀도가 일정 수준을 초과할 경우 2차 변이를 일으킵니다. A급 전위대의 마나 방출량이 그 임계점을 넘깁니다.”
테이블 중간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박성렬의 얼굴에서 온화함이 한 겹 벗겨졌다.
“참 흥미롭군. E급 각성자가 접근할 수 없는 데이터를 인용하시다니.”
“데이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도 있습니다. 공개된 붕괴 보고서의 시간축만 교차 대조해도, 지난 3년간 유사 미궁형 게이트 4건에서 전위대 전력이 높을수록 내부 지형 재편성이 빠르게 시작됐습니다.”
“경험 없는 자의 책상 물림이군.” 박성렬은 안경을 다시 썼다. 동작은 느리고 정확했다. “나는 12년 전 그 게이트에 직접 들어갔던 사람이야. 자네가 태블릿으로 확인한 숫자와, 발밑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현장은 다르다는 걸 이해하긴 어렵겠지.”
“현장 경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게이트가 그 경험보다 빠르게 변했다는 겁니다.”
탁. 박성렬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그만. 자넨 E급이다. 이 회의에서 발언할 수 있는 건 전투 배치에 관한 확인뿐이야.”
“그럼 제안 하나만 하겠습니다.” 정도윤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전위대 구성을 바꾸십시오. A급 3인이 아니라 B급 2인을 최전방에 세우고, 마나 억제 보조 장비를 지급하는 겁니다. 지형 함정 구간은 마나 감지가 아닌 육안 명암 판별로 돌파합니다. 이렇게만 해도 변이 확률은 60% 이상 낮아집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한세아는 그동안 말 없이 만년필을 돌리고 있었다. 태블릿은 켜져 있었지만 손은 메모에 집중돼 있었다. 회색 눈이 정도윤의 옆얼굴에 멈췄다.
박성렬은 잠시 침묵했다.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히 들었다.”
노트패드를 접어 손에 쥐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이런 비과학적인 발상으로 회의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전략부는 원안대로 준비하게.”
문 쪽으로 걸어가며 어깨 너머로 한 마디를 던졌다.
“경험 없는 자의 용기는 때로 만용이 된다는 걸 명심하게.”
문이 닫혔다. 유리벽 너머로 트렌치코트 자락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회의실 안은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세아는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딸깍. 태블릿에 입력한 메모를 한 번 훑은 뒤 화면을 끄고 일어났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회의실을 나갔다. 정도윤은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저렸다.
오전 10시 45분. 복도.
인원들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흩어져 가는 틈에 정도윤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인기척을 지우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잠시.”
한세아였다. 태블릿은 없었다. 손에는 만년필만 쥐고 있었다. 그녀는 정도윤의 반 걸음 앞에서 멈췄다. 복도 양끝을 한 번 확인한 뒤 시선을 돌렸다.
“방금 회의에서 말한 2차 변이. 구체적으로.”
질문은 짧았다. 억양은 회의실에서보다 낮았다. 정도윤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근거의 출처는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징후만 말해요. 변이가 시작되기 전에 무엇이 보이는지.”
정도윤은 1초쯤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벽면의 문양 색이 청색에서 적색으로 변합니다. 육안으로는 희미해서 못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바닥의 진동 주기가 짧아집니다. 처음에는 4초, 변이가 가까워지면 1.5초 이하로 줄어듭니다.”
한세아가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손바닥에 짧게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잉크는 검은색이었다.
“셋째.”
“공기 밀도가 달라집니다. 숨이 얕아지고 귀에 압박이 오죠. 이건 B급 이하만 느낄 수 있습니다. 마나 저항이 낮은 쪽이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한세아의 만년필이 멎었다.
“그걸 현장에서 누가 확인합니까.”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짧은 침묵. 한세아는 손바닥에 적힌 메모를 한 번 더 훑었다. 암호 같은 약어와 숫자가 빼곡했다. 뚜껑을 닫았다. 딸깍.
“검토하겠습니다.”
그 한 마디에 실린 무게는 가벼운 약속이 아니었다. 그녀가 손바닥을 가볍게 접었다. 공식 기록 장치가 아니라 자신의 피부 위에 적힌 정보였다.
정도윤은 그 손을 보며 생각했다. 만년필은 개인 물품이다. 이 대화는 기록되지 않는다.
한세아가 그를 지나쳐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 3미터쯤 거리가 벌어졌을 때,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가 말했다.
“당신, 발언 자격 이상을 가진 사람이군요.”
정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소리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진 뒤에도 잠시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손목의 시계가 10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밤 9시. 한세아의 사무실.
블라인드는 이미 내려져 있었다. 컴퓨터 화면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그녀는 손바닥의 메모를 한 번 더 훑었다. 게이트 내부에서 받아 적은 서른두 글자. 잉크가 약간 번져 있었다.
‘벽면 문양 청색→적색 변환 시 2차 변이 개시, 3년 전 유사 사례 존재 가능.’
한세아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공식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별도 네트워크. 전략팀장 이상에게만 허용된 아카이브 접속 계정이었다.
검색창에 ‘변이 전조, 색상 변화’를 입력했다. 결과는 세 건. 모두 C급 게이트였다. 그중 두 건은 전조 식별에 실패해 전멸. 나머지 한 건은 보고서가 비공개로 분류되어 있었다.
“덮어놨군.”
만년필을 꺼내 뚜껑을 분리했다. 클릭.
비공개 보고서를 열었다. 3년 전, B급 게이트 ‘잠식된 회랑’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벽면 문양이 청색에서 적색으로 변한 뒤 4분 17초 만에 게이트 내부 구조가 재편성됐다. 선발대 6명 전원 사망. 생존자는 후방 대기 중이던 정찰조 2명뿐.
숫자가 정확했다. 정도윤이 말한 변이 징후와 일치했다. 한세아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E급 각성자가 공식 기록에도 없는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만년필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별도 파일에 검증 결과를 기록했다. ‘정보 신빙성: 확인. 출처: 미상. 위험 등급: 분류 보류.’
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내일 작전에서 이 데이터를 쓸 수 있다면 선발대 손실을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공식 채널로는 쓸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박성렬이 모든 작전 보고서를 사전 검토하기 때문이었다.
한세아는 파일을 암호화한 뒤 개인 단말기에 저장했다. 만년필 뚜껑을 다시 결합하며 결론을 내렸다. 정도윤은 위험한 정보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니터를 끄자 실내는 어둠에 잠겼다. 손끝으로 손바닥의 메모를 문지르며 계획을 세웠다. 내일 작전 중 변이가 발생하면 우회 전술을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재량. 그 재량을 얻으려면 정도윤의 실시간 정보가 필요했다.
다음 날 오전 5시 30분. 길드 B3 장비고.
형광등 절반이 꺼져 있었다. 침침한 조명 아래 장비대가 길게 늘어섰다.
정도윤은 벤치에 앉아 등반용 카라비너를 점검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낡은 금속의 이음매를 따라 움직였다. 잠금 장치가 헐거웠다. 불량이다. 불량품을 왼쪽으로, 정상품을 오른쪽으로 분류했다.
복도 저편에서 굽 소리가 울렸다. 한 발, 한 발, 일정한 리듬.
정도윤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찾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한세아가 장비대 뒤에 멈춰 섰다. 회색 정장 차림이었다. 잠을 거의 못 잔 듯 눈언저리가 얇게 부어 있었다. 만년필은 쥐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뚜껑을 분리했다 결합하는 동작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전에 알려준 정보. 검증했습니다.”
“결과는.”
“3년 전 비슷한 변이가 있었군요.”
정도윤은 카라비너를 내려놓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회색 눈동자에 피로보다 더 짙은 무언가가 스며 있었다. 판단을 유보한 사람의 시선.
“공식 명령은 정면 돌파입니다. 박성렬 국장이 직접 승인한 12년 된 매뉴얼이죠.”
한세아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당신이 말한 변이가 실제로 발생하면, 그 매뉴얼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인원 손실을 막으려면 우회 경로를 확보해야 해요.”
“저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변이 직전 무전으로 신호를 보내주세요. 제 개인 채널로.”
그녀가 손바닥을 펼쳤다. 작은 종이 한 장이었다. 무전 주파수와 암호화 코드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장비대 위로 밀어 넣었다.
“이건 공식 작전 명령이 아닙니다. 박성렬 국장의 승인도 없고, 길드 기록에도 남지 않아요.”
정도윤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한 번 뒤집었다. 암호화 코드는 숫자 8자리였다.
“팀장님 재량으로 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의심스러운 정보원에게 맡기기엔 큰 재량인데.”
한세아의 입술이 얇게 당겨졌다. 미소라기엔 날카로운, 어금니가 살짝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의심스러우니까 직접 씁니다. 변이가 발생한 뒤에는 내가 우회 판단을 내릴 수 있어요. 그 전까지는 당신을 정보원으로만 운용할 생각이에요.”
정도윤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E급 지급 조끼의 가슴 쪽 지퍼 포켓.
“알겠습니다. 신호는 변이 전조 발견 즉시 보냅니다.”
“전조 식별 기준은.”
“벽면 문양이 청색에서 적색으로 변하는 순간. 변환 후 4분 안에 지형이 재편됩니다.”
한세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4분. 보고서에는 4분 17초로 기록된 수치였다. 만년필 쪽으로 손을 약간 당겼다.
“그 디테일은 보고서에도 없던 내용이군요.”
정도윤의 손이 시계를 향하다 멈췄다.
“마나 패턴 분석으로 도출한 수치입니다.”
“또 그 말입니까.”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변이 발생 후 4분 안에 우회로로 진입하지 않으면 선발대는 전멸합니다. 그 사실만 확인하시면 됩니다.”
한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장비대 위로 내려갔다. 불량품으로 분류된 카라비너 무더기 옆에, 정상품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집어 들었다.
“정도윤 씨.”
처음으로 이름에 존칭을 붙였다.
“당신 정보가 맞으면 전략팀 차원에서 보호하겠습니다. 틀리면——”
“없을 겁니다. 틀리는 경우는.”
한세아는 카라비너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금속이 장비대에 닿으며 짧게 울렸다. 돌아서서 복도로 향했다.
복도 끝.
박성렬은 거기 서 있었다.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빙수가 반쯤 녹아 있었다. 안경을 벗어 천천히 닦고 있었다. 장비고 문에서 나오는 한세아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안경을 다시 썼다.
한세아의 시야에서는 복도가 비어 있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박성렬은 기둥 뒤로 반 발 물러섰다.
한세아가 모퉁이를 돌자 휴대전화를 꺼냈다. 저장된 번호 하나를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다.
“김 팀장. 아직 출근 전이지? 미안하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인사팀 기록 말이야. E급 각성자 하나 신상 털어줘. 이름은 정도윤. 오늘 중으로 과거 이력 전체.”
잠시 침묵. 상대의 질문이 있었는지 박성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유는… 한세아 씨가 새 장난감을 찾았더라고. 어떤 녀석인지 정도는 알아둬야겠지.”
전화를 끊었다. 녹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장비고 방향을 한 번 더 응시한 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굽 소리가 하나, 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