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리셋
3화
그림자 미궁 내부. 축축한 공기. 벽 곳곳에 핀 푸른 이끼가 희미하게 빛났다.
A-3 분기점. 세 갈래 통로가 입을 벌린 교차점. 진입 47분째였다.
A급 선발대 둘이 좌측을 견제하는 동안, B급 넷이 중앙 통로 입구에 교전 대형을 짰다. C급 이하 인원은 후방 대기. 정도윤은 대기조 맨 끝에서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골랐다.
한세아가 태블릿을 접었다. 무전기를 든 손목에는 만년필 자국이 옅게 남아 있었다.
“국장님. A-3 분기점 도착. 매뉴얼대로 중앙 통로 진입하겠습니다.”
무전기 너머로 박성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연하지. 12년 전에도 중앙이었어. 지체할 이유 없네.”
정도윤의 시선이 오른쪽 통로 벽에 멈췄다. 푸른 이끼 사이,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전생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옅은 청색이 짙은 군청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가 한세아 쪽으로 다가갔다. 무전기에서는 박성렬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팀장님.”
낮은 목소리였다. 한세아가 한 손으로 무전기 볼륨을 틀어막았다. 정도윤이 벽 쪽을 턱짓했다.
“저 문양. 4분 전보다 색이 짙어졌습니다.”
한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벽과 태블릿을 번갈아 확인한다.
“변이 징후?”
“그렇습니다.”
한세아가 무전기를 다시 입에 댔다.
“국장님. 벽 문양 색이 옅은 청색에서 군청으로 바뀝니다. 3년 전 잠식된 회랑과 똑같은 전조입니다.”
짧은 정적. 박성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팀장님, 그 사건은 등급도 구조도 다릅니다. 예민하게 굴면 작전만 늘어져요.”
“데이터가 있습니다. 확인하지 않겠습니까.”
“12년 전 내가 직접 밟았을 땐 그런 변이 없었소. 그걸로 충분하지.”
정도윤이 한세아의 팔목을 짧게 잡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색이 바뀐 뒤 4분 안에 지형이 재편성됩니다. 통로가 뒤바뀝니다. 중앙으로 들어가면 함정 구역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한세아가 무전기를 어깨에 기댔다. 정도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확신?”
“해본 말은 아닙니다.”
한세아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올라갔다. 태블릿에 짧게 메모를 남겼다. 변이 문양 색변화, 시간 기록. 내부 기록 장치에만 저장.
무전기를 다시 집었다.
“국장님. 경고 남깁니다. 돌발 상황 시 제 판단으로 우회합니다.”
“그 경고가 추후 브리핑에서 어떤 의미가 될지 생각해보시길. 지금은 진군이나 하시지.”
한세아가 대기조를 향해 손을 들었다.
“탐지팀 2명. 중앙 통로 진입.”
C급 둘이 선발대로 앞으로 나섰다. 정도윤이 한세아에게 반 걸음 더 붙었다. 귀에 닿을 듯한 거리였다.
“우측 통로. 서른두 걸음 지점, 왼쪽 벽면. 빈 공간입니다.”
한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중앙 통로로 사라지는 탐지팀의 등을 쫓고 있었다.
통로가 그들을 삼켰다.
12분 후.
바닥에서 진동이 올라왔다. 진폭이 빠르게 커졌다. 천장에서 가루가 떨어졌다.
“변이다!”
누군가 외쳤다.
통로 벽면이 액체처럼 출렁이더니 뒤틀렸다. 중앙 통로 입구가 좁아진다. 문양 전체가 검붉은 색으로 번쩍였다. 무전기에서 탐지팀의 비명이 짧게 터졌다.
“갇혔습니다! 통로가—”
통신이 끊겼다.
잠시 모든 소리가 가라앉았다.
무전기 너머로 박성렬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본관 상황실. 타일 바닥의 잔향이 무전 배경에 실렸다.
“한 팀장. 지금 무슨 상황이오.”
한세아가 태블릿을 접었다. 손끝이 하얘질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중앙 통로 변이 발생. 탐지팀 2명 고립.”
“구조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우측 통로로 우회합니다.”
“안 됩니다.”
박성렬의 목소리가 상황실 스피커로 전환된 듯 음량이 커졌다. 배경에서 누군가의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상황실에 간부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매뉴얼에 우측 통로는 없습니다. 중앙 돌파만 인정됩니다.”
“매뉴얼은 변이를 상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변인지 뭔지를 확인해야 할 거 아닙니까. 매뉴얼을 무시하고 우회로를 썼다가 전원 몰살되면, 그건 전적으로 현장 지휘관 책임이오.”
정도윤이 한세아의 무전기를 보았다. 한세아가 그 시선을 받았다. 낡은 시계를 만지던 정도윤의 손이 멈췄다.
한세아가 무전기에 대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묻겠습니다. 상황실에서 여기 C급 2명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오.”
“못 하신다는 뜻이군요. 지금부터 지휘권은 제가 가집니다.”
“한—”
한세아가 무전기를 껐다. 대기조 쪽으로 돌아섰다.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B급 3명. 나와 정도윤 포함 우측 통로. 탐지팀 생존 확인까지 4분. 그 이상이면 즉시 철수한다.”
태블릿을 켜서 지도를 띄웠다.
“정도윤 씨. 경로.”
정도윤이 우측 통로 입구에서 서른 걸음까지 세며 걸었다. 왼쪽 벽면에 손을 댔다. E급 각성자의 얇은 마나로 벽을 두드렸다. 텅 빈 울림.
“여깁니다.”
B급 한 명이 전투 장갑을 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벽면이 갈라지며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깊은 어둠이 바닥으로 새어 들어갔다.
아르고 길드 본관 14층 상황실.
모니터 앞 간부들의 실루엣이 굳어 있었다. 게이트 내부에서 송출되는 감시 화면 하나가 노이즈를 뚫고 선명하게 떠 있었다. 한세아가 무전기를 끊는 순간, 우측 벽을 뚫고 진입하는 영상이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전략팀장이 방금 작전 교범을 찢어버렸는데.”
박성렬의 손에 든 아이스 커피가 미세하게 떨렸다. 화면 속, 한세아 일행이 좁은 통로로 빨려 들어간 직후였다.
환기구는 폭이 좁았다. 어깨를 비스듬히 틀어야 지나갈 수 있는 틈새였다. 한세아가 선두에서 손전등을 비추자, 마나 잔류물이 벽면에 푸르스름하게 번들거렸다.
“좌측 세 번째 파이프 아래.”
정도윤의 무전이 배경음을 뚫고 들어왔다. 게이트 밖 임시 지휘소에서 중계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한세아가 손짓했다. B급 대원 둘이 파이프를 들어 올리자, 50센티미터 남짓한 통로가 드러났다. 그녀가 먼저 몸을 밀어 넣었다.
B-1 구역은 변이로 천장이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바닥의 명암 반전 패턴은 깨졌고, 공기 중 마나 농도가 피부를 찔렀다. 구역 중앙 철제 빔 아래로 네 명이 웅크리고 있었다. 한 명은 이미 누워 있었다.
“한세아 팀장이다. 일어설 수 있는 사람부터.”
가장 상태가 나은 C급 대원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파랬다.
“다섯… 다섯 명입니다. 조장님이 10분 전부터 의식이…”
들것을 편다. B급 대원 하나가 조장의 목 옆줄을 짚었다.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한세아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만년필을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풀린다.
“나머지 넷 먼저 후송한다. 조장은 퇴로 확보 후 회수.”
그녀가 무전을 눌렀다.
“지휘소. 생존자 넷 확보. 한 명 사망. 우회로로 복귀한다.”
박성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길드 상황실에도 채널이 열려 있었다.
“한 팀장. 정식 루트 아닌 경로로 진입한 이유를——”
한세아가 채널을 돌렸다.
“우회 경로 유지. 4분 내 통과.”
정도윤의 지시대로 그녀는 진입 시와 다른 길을 택했다. 변이 구역의 마나 흐름은 불안정했지만, 미리 계산된 우회 통로는 아직 열려 있었다. 네 명의 생존자가 차례로 좁은 틈을 빠져나갔다.
게이트 입구가 가까워졌다. 밖에서 구조 대기 중이던 의무팀의 발소리가 들렸다. 한세아가 마지막으로 입구를 나서며 손전등을 껐다.
상황실 모니터에 그 장면이 그대로 중계됐다. 직원 셋이 박수를 치다 멈췄다. 누군가 낮게 중얼거렸다.
“정면 돌파였으면 전멸이었네.”
임시 지휘소. 구조 완료 35분 후.
모니터 두 대가 영상 연결을 알리는 푸른 불빛을 깜빡였다. 화면 속, 길드 고위 관계자 다섯 명의 상반신이 떠올랐다. 중앙 화면에는 박성렬. 넥타이는 반듯했지만 평소보다 매듭이 약간 틀어져 있었다.
한세아는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전투복 차림 그대로였다. 생존자 인계 보고서가 탁자 위에 반쯤 펼쳐져 있었다.
“지휘권 일탈입니다, 한 팀장.”
박성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안경 너머 눈은 웃지 않았다.
“공식 작전은 정면 돌파. 임의로 대안 팀을 편성해 우회로에 투입했고, 그 결과——”
“그 결과 넷이 살았습니다.”
한세아의 대답은 건조했다. 그녀가 태블릿을 들어 변이 로그를 띄웠다.
“정면 돌파 경로의 마나 밀도는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선발대가 진입했다면 변이 충격으로 전멸. 3년 전 잠식된 회랑과 동일한 패턴.”
박성렬이 안경을 벗었다. 천천히 닦는다.
“정보는 어디서 났습니까. 혼자 판단할 수준이 아닌데.”
“전략팀 자체 분석입니다.”
“거짓말.”
안경을 다시 쓴 박성렬의 손끝이 떨렸다. 이미 다 녹은 커피가 탁자에 닿지도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E급 각성자 정도윤. 그쪽 정보 출처를 확인했습니까. 길드 내부 기밀 무단 열람, 혹은 외부 불법 취득 가능성이——”
“증거는.”
한세아가 말을 잘랐다. 오른손이 만년필을 집었다. 뚜껑을 분리하고 다시 결합했다.
“징계를 요구하시려면 근거를 제출하십시오. 제 지휘권 행사에 대한 사후 검증은 내일 공식 회의에서.”
박성렬이 숨을 들이마셨다. 짧은 정적.
“정보 유출 및 내란 혐의로 정도윤을——”
“녹화 중입니다.”
한세아가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화면 위에 빨간 점이 깜빡였다.
“이 연결의 모든 발언은 녹화되어 전략팀 서버에 이중 저장됩니다. 내일 회의 자료로 제출 예정이니,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공식 기록으로 남습니다.”
화면 속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누군가 이어폰을 만졌다. 박성렬의 입꼬리가 굳어졌다.
“녹화본 확보하고, 전송 기록도.”
한세아가 옆의 하급 조제사에게 낮게 지시했다. 그 직원이 재빨리 노트북을 조작했다.
“내일 회의에서 뵙겠습니다.”
그녀가 먼저 연결을 끊었다.
지휘소 밖. 정도윤은 출입문 옆에 서 있었다.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던 동작이 멈췄다. 기자 셋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저기, 아르고 길드 관계자분이신가요? 우회 전술을——”
“E급 각성자라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정도윤은 한 발 물러섰다.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작은 수첩 가장자리가 손끝에 닿았다.
“전략팀의 결정입니다. 저는——”
“우회 전술 실무자로 확인됐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플래시가 터졌다. 정도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뒤에서 차량 경적이 짧게 울렸다. 검은색 세단이 주차장 입구에 멈춰 섰다. 한세아가 운전석 창을 내렸다. 수트 재킷은 이미 벗어 조수석에 걸쳐 있었다.
“정도윤. 탑승.”
지휘소에서보다 반 톤 낮은 목소리였다. 정도윤이 재빨리 조수석에 올랐다. 차량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백미러 속에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작아졌다.
차량이 한강 방면 우회도로에 접어들었다. 한세아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만년필이 콘솔 박스 위에서 굴렀다.
“기자들한테 찍혔네.”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정도윤이 조수석에서 앞만 보며 말했다. 차량 내부는 엔진 소리만 낮게 울렸다.
“언론 노출은 예상 범위. 문제는 박 국장 쪽.” 한세아가 사이드 미러를 확인했다. “징계 발의를 내일 회의까지 막아야 한다. 지금 가진 데이터로 반박 가능하지만——”
“부족합니다.”
정도윤이 조끼 안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냈다. 암호화 데이터 칩. 표면에 라벨 하나 없는 검은색 일체형이었다.
“박성렬이 문제 삼을 건 직무상 정보 출처. 제가 전략팀 데이터베이스 접근 권한이 없는 E급이라는 점. 거기서부터 공격할 겁니다.”
한세아가 칩을 힐끗 보았다. 차량이 신호에 걸려 멈췄다.
“그게 답인가.”
“일부입니다.”
정도윤이 칩을 콘솔 박스 위에 올려놓았다. 만년필 옆이었다.
“12년 전 기록입니다. 당시 아르고 길드가 첫 게이트 클리어 직후 내부에서 일어난——”
말을 끊었다. 엄지로 손목시계를 한 번 쓸었다.
“대숙청 사건 기밀 보고서 일부. 박성렬이 왜 12년 전 매뉴얼에 집착하는지와 연결됩니다.”
한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칩을 집어 태블릿에 꽂았다. 신호가 바뀌고 차량이 출발했다.
화면에 첫 파일이 열렸다. 빨간색 머리글자. '내부 검토용, 외부 유출 금지.' 그 아래로 명단이 떴다. 사망 처리된 각성자 열네 명의 이름과 등급.
마지막 줄.
'명령 하달자: 당시 전략국장 박성렬.'
한세아의 손이 핸들에서 떨어질 뻔했다. 차량이 중앙선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가 바로잡혔다. 그녀가 정도윤을 돌아봤다.
숨을 들이마셨다. 질문이 입술 끝까지 올라왔다.
정도윤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유리 너머 한강의 야경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차 안 시계의 초침만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입을 열지 않았다.
차량은 길드 본관 방향으로 계속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