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리셋
4화
아르고 길드 본관 14층 전략회의실. 오후 2시.
탁자 위 네임플레이트가 반듯하게 정렬돼 있었다. 전략부, 작전부, 인사부. 벽면 모니터엔 그림자 미궁의 단면도가 정지 상태로 떠 있었다.
박성렬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안경을 벗었다. 천천히 닦았다.
“사흘 전 게이트 작전에 대한 사후 보고를 개시하겠습니다.”
탁자 중앙으로 태블릿을 밀어 넣었다.
“먼저 지휘 체계 일탈 건부터 다루겠습니다. 한세아 팀장. 본인 재량으로 작전 경로를 변경한 사유를——”
“그 전에.”
한세아가 박성렬의 말을 잘랐다. 자신의 태블릿을 회의실 메인 모니터에 연결했다. 화면 하나가 살아났다.
“게이트 변이 로그 전문입니다. A-3 분기점 벽면 이끼의 색변화 시각은 진입 47분 12초.”
그래프가 떴다. 청색에서 군청으로 치닫는 곡선이 선명했다.
“국장님의 진군 명령은 그로부터 2분 14초 후입니다.”
박성렬의 손이 안경테를 멈췄다. 모니터를 올려다봤다. 그래프 아래로 숫자들이 빨간 선을 따라 흘렀다.
한세아가 클릭했다. 두 번째 파일.
“탐지팀 조장 진술서. B-1 구역 함정 활성화 이후, 본대의 진입 경로가 완전히 차단됐으며——”
입회 진행관이 손을 들었다. “해당 진술서는——”
“작전 종료 직후 게이트 밖에서 녹취했습니다. 현장 기록관 입회.”
한세아가 파일의 타임스탬프를 확대했다. 탁자 너머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박성렬이 안경을 다시 썼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한 팀장. 지금 이 자료가——”
“국장님의 초기 작전이 실패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입니다.”
회의실 공기가 멈췄다. 벽 쪽 보조 의자에 앉은 정도윤은 태블릿을 보지 않았다. 시선은 박성렬의 왼손에 붙박혀 있었다. 안경을 닦던 손이 멈춰 있었다.
한세아가 세 번째 파일을 열었다. “마나 밀도 측정치입니다. 중앙 통로는 변이 3분 전부터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국장님의 정면 돌파 교본에는——”
“그 교본은 12년 전 검증된——”
“12년 전 그 게이트엔 변이 자체가 없었습니다.”
한세아가 손목시계를 보지 않았다. 만년필을 집어 뚜껑을 분리했다. 다시 결합했다. 탁자 위에 떨어진 소리가 유난히 컸다.
“게이트는 진화합니다. 이번에 증명됐죠.”
박성렬의 얼굴이 굳어졌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래프만으로 작전 실패라 단정하시는 건——”
“단정하지 않습니다. 데이터가 말할 뿐.”
한세아가 태블릿을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화면에 로그 전체가 펼쳐졌다.
“검증하시죠. 누구든.”
참석자들 사이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작전부 소속 간부 하나가 자신의 태블릿으로 로그를 열었다. 또 하나가 따라붙었다. 숫자를 훑는 눈빛이 빨라졌다.
박성렬이 한세아를 똑바로 쳐다봤다. 입술이 살짝 말려들었다.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묻겠습니다. 그 변이 로그를 왜 작전 종료 후 사흘 동안 제출하지 않았습니까.”
“징계 발의가 먼저였으니까.”
한세아의 대답은 예상보다 빨랐다. 마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국장님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현장에서 제 지휘권을 부정하고, 게이트 밖에서 언론에 정보를 흘렸으며——”
“정보 유출은——”
“E급 각성자 정도윤을 정보 유출 혐의로 지목한 건 그 직후입니다.”
박성렬의 손이 탁자 위에서 멈췄다. 콧등에서 땀이 반짝였다.
한세아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묻겠습니다. 국장님. 초기 작전 실패를 인정하시겠습니까.”
침묵.
3초. 5초.
벽 쪽의 하급 조제사 한 명이 숨을 삼켰다.
박성렬이 입을 열려는 순간——
탁자 끝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잠깐.”
최치수 부장이었다. 오른손을 살짝 들어 회의실을 멈췄다. 회색 양복 소매가 테이블에 닿지 않았다.
“지금 이 회의의 목적은 사후 보고입니다. 변이 대처의 적절성. 그게 본안이죠.”
박성렬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핏기가 조금 돌아왔다.
최치수가 말을 이었다. “로그 검증은 기술팀에서 별도로——”
“부장님.”
한세아가 태블릿을 한 번 더 넘겼다. 모니터 구석에 작은 창이 떴다. 박성렬의 무전 녹음 파일. 현장에서 “그 경고가 추후 브리핑에서 어떤 의미가 될지 생각해보시길”이라는 대사가 선명하게 울렸다.
“이건 기술 검증이 아닙니다.”
한세아의 시선이 최치수를 똑바로 관통했다. “전략부 국장이 현장에서 변이를 묵살한 기록입니다. 본안입니다.”
최치수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렇다면——”
말이 끝나기 전에,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었다.
강민준이었다.
190cm의 실루엣이 문틀을 가득 채웠다. 금색 마나 아우라가 어깨선을 따라 희미하게 번졌다. 전투복이 아니라 평상복 차림에 가까운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왼쪽 광대뼈의 흉터가 형광등 아래에서 옅게 빛났다.
침묵이 무거워졌다.
강민준이 걸어 들어왔다. 발소리가 규칙적이었다.
한세아 쪽으로 네 걸음. 멈춤.
“팀장.”
반말이었다. 호탕하게 올라가는 어조는 아니었다. 약간 낮게 깔린 톤.
“잘했네.”
회의실 전체가 긴장으로 굳었다. 최치수가 강민준을 올려다봤다.
“강민준 씨. 지금——”
“부장님은 잠깐 입 닫으시죠.”
강민준이 한세아를 보며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눈에 온기가 없었다. 금색 동공이 회의실 전체를 훑었다.
“변이 게이트에서 매뉴얼 버리고 판단한 거. 그거 S급도 못 해.”
한세아가 대답하지 않았다. 만년필을 다시 집었다. 뚜껑을 분리했다.
강민준이 탁자 위 태블릿을 힐끗 봤다. “데이터도 깔끔하고.”
박성렬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국장님.”
박성렬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번 건 현장 혼란으로 묻자. 사과 한 마디면 충분하지.”
박성렬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안경을 벗지 않았다. 손가락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명백한 지휘권 일탈입니다.”
강민준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박성렬의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허리를 살짝 숙였다.
“일탈 아니면 네 명 더 죽었어. 자네 작전대로 갔으면.”
작은 목소리였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박성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강민준이 일어서며 웃었다. 이번엔 더 컸다. 호탕한 소리가 회의실 벽을 때렸다.
“자, 사과하시지.”
박성렬이 천천히 일어났다. 안경을 벗었다. 닦았다. 다시 썼다.
“......전략부 국장으로서 초기 대응에 미흡함이 있었음을——”
못 들을 소리로도 아니었다. 너무 정확하게 들렸다.
탁자 주변에서 누군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작전부 간부가 헛기침을 했다.
최치수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멈췄다.
강민준이 손바닥을 두 번 마주쳤다. “됐네. 수고.”
한세아를 향해 돌아섰다.
“팀장, 나중에 저녁이나 하자고.”
말투가 한순간 부드러워졌다. 한세아는 만년필 뚜껑을 결합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강민준이 문 쪽으로 걸었다. 열 걸음. 뒤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최치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태블릿을 챙겼다. 회의실을 나갔다.
박성렬은 서 있었다. 안경을 벗지 않았다. 닦지도 않았다.
한세아가 태블릿을 닫으며 말했다. “이상입니다.”
의자들이 밀리는 소리가 흩어졌다. 간부들이 한 명씩 빠져나갔다. 박성렬이 가장 늦게 움직였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안경 너머로 정도윤을 한 번 쳐다봤다. 말은 없었다. 문이 닫혔다.
정도윤이 벽 쪽 의자에서 일어났다. 강민준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마나 파형이었다. 강민준이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금색 아우라가 번지는 패턴. 전생에서 본 적이 없는 진동이었다.
0.3초 주기로 파형이 갈라졌다 합쳐졌다. 마치 내부에서 뭔가가 맥박을 치는 듯했다.
나락. S급 게이트의 코어 앞에서 죽음을 맞기 직전. 그때도 이랬다. 다만 그건 게이트 쪽이었다. 장소 자체가 불안정했고, 마나 밀도가 이상치를 찍었고.
강민준에게선 지금 그 진동이 개인한테서 나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나락 클리어 작전 브리핑. 강민준이 단독 선발로 나선 이유. 공식적으론 S급의 프라이드. 하지만——
정도윤이 손목시계를 만졌다. 엄지가 유리를 한 번 쓸었다.
코드 레드. 붉은 경광등 아래서 작전 지휘관이 내뱉은 짧은 한마디. “강민준 마나 파형 관측됨. 이상 없음.” ‘이상 없음’을 굳이 보고한 이유를 지금 다시 생각한다.
그건 이상이 있었으니까다.
정도윤이 걷기 시작했다. 복도 쪽으로 천천히. 머릿속에 파형 패턴을 새겼다.
0.3초 주기의 진동. 금색 번짐. 관찰 지속. 전생보다 앞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변수다.
복도에 인적이 드물었다. 한세아가 다가왔다.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느새 왼쪽에 서 있었다. 태블릿을 팔에 끼고 있었다. 만년필은 재킷 안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정도윤 씨.”
존대였다. 단둘이라는 증거.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메모 한 장. 작은 종이.
“내일 저녁 7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정도윤이 메모를 받았다. 종이를 펴지 않고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한세아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복도 끝으로 가는 구두 소리가 균일했다.
정도윤은 메모가 든 주머니 쪽을 한 번 만졌다. 걸음을 반대 방향으로 옮겼다. 오른손은 손목시계 위에 그대로였다.
회의실을 나와 집무실로 향하는 짧은 복도에서 박성렬의 손끝이 차가웠다. 브리핑 내내 느낀 수치가 목덜미를 따라 아직 식지 않았다. 그는 안경을 벗지도 않은 채 문을 닫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녹아내리는 책상 앞에 섰다. 유리창 너머 로비가 흐릿하게 굴절됐다.
오후 네 시. 박성렬의 집무실.
책상 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반쯤 녹아 물이 고였다. 박성렬은 안경을 벗어 천천히 닦았다. 유리창 너머 길드 본관 로비가 내려다보였다.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
“들어와.”
검은 양복의 수행 비서가 들어섰다.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섰다.
“정도윤. E급 신규 각성자.”
박성렬이 안경을 썼다.
“다 아는 얘기지.”
“아닙니다.”
비서가 태블릿을 책상 위에 올렸다. 화면에 정도윤의 인사 사진이 떠 있었다.
“해당 인물, 오늘 현장 브리핑에서 게이트 변이를 사전에 예측했습니다. 공식 자료에는 없는 정보를.”
박성렬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유를 대.”
“방금 인사팀에서 1차 신상 정보를 받았습니다. 특이점이——”
“말해.”
“출동 기록이 대부분 누락돼 있습니다.”
비서가 태블릿을 넘겼다. 날짜별 출동 이력 표. 빈 칸이 절반 이상이었다.
“게이트 정보 접근 로그도 마찬가지. 일반 E급은 열람조차 불가능한데, 이 자는 마치——”
“알고 있었단 말이지.”
박성렬이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주름진 눈가가 좁아졌다.
“알고 있었고, 한세아에게만 전달했다. 공식 라인은 무시하고.”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렬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허리에 손을 얹고 잠시 로비를 내려다봤다.
“출동 기록 복사본 확보해.”
“이미 요청했습니다. 인사 파일 원본도 인사팀에——”
“아니. 원본은 놔둬.”
박성렬이 몸을 돌렸다.
“사본만 충분히 남겨. 빈틈이 많은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비서의 손가락이 태블릿에 닿았다. 박성렬이 팔짱을 꼈다.
“한세아가 이 남자한테 뭘 받았는지도 확인해. 그리고——”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이번 일을 정치적 문제로 가져가는 건 길드장님도 원하는 그림 아니다. 조용히 처리해.”
비서가 목례하고 물러났다. 문이 닫혔다.
박성렬은 책상으로 돌아와 녹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웠다.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B3 장비고 인근 사무실.
복도 끝 방. 철제 문에는 ‘비품 보관’이라 적힌 명판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문 옆 벽의 전원반은 일반 사무실용으로 개조돼 있었다. 한세아가 먼저 와 있었다.
그녀가 책상 위에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열린 태블릿 화면에는 B3 복도 폐쇄회로를 정지시킨 관리자 명령이 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정도윤이었다.
“늦었습니다.”
한세아가 손목시계를 보지 않고 말했다. 정도윤이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3분 늦었습니다. B2 계단 통제가 예상보다 길었습니다.”
“박성렬 쪽이오?”
“하급 조제사 한 명이 순찰 돌고 있었습니다. 치우는 데 걸렸어요.”
한세아가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정도윤이 앉았다. 조끼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질문은 단순합니다.”
한세아가 말했다. 만년필 뚜껑을 분리했다가 다시 결합했다.
“당신은 어떻게 이 게이트의 변이를 알았죠. 박성렬이 놓친 걸.”
정도윤이 종이를 한세아 쪽으로 밀었다. 손가락 끝에 작은 멍 자국이 나 있었다.
“설명보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종이 위에는 그림자 미궁의 내부 구조도가 수기로 그려져 있었다. 중앙 통로 우측 벽면에 군청색 점선. 변이 트리거 지점이었다.
“변이 규칙입니다. 마나 밀도 임계점 초과 시 지형 재편성. 트리거는 벽면 문양의 색변화.”
한세아가 종이를 집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길드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정보요.”
“압니다.”
“어디서 얻었죠.”
정도윤이 시계를 만지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출처는 밝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종이의 한 지점을 짚었다.
“이 구조가 12년 전 눈사태 길드 작전에서 한 번 등장했습니다. 정식 보고서에는 누락됐고, 당시 생존자는 은폐 서약을 했습니다.”
한세아의 만년필이 멈췄다.
“눈사태는 10년 전 해체된 길드요. 당신——”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묻지 않겠소. 그쪽도 답할 생각 없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한세아가 종이를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녀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정보의 유효성은 이번 작전으로 증명됐소. 문제는 출처를 나만 모르는 게 아니란 거요.”
“박 국장.”
“그래. 내일 회의에서 틀림없이 공격할 거요.”
한세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의 태블릿 화면이 꺼졌다.
“내가 막을 수 있는 선은 지휘권 일탈 건까지요. 정보 출처 추궁엔 둘 다 답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정도윤의 목소리가 반 박자 느렸다.
“그래서 이 자리를 요청했습니다.”
조끼 안주머니에서 얇은 봉투를 꺼냈다. 크라프트지. 표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눈사태 길드 잔여 자료. 변이 규칙 원본 일부와 12년 전 박성렬의 작전 명령을 교차 검증한 요약입니다.”
한세아가 봉투를 받았다. 뜯으려는 손을 멈췄다.
“조건이 뭐요.”
“정기 접선.”
정도윤이 한세아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 같은 장소에서. 정보는 제가 제공합니다. 다만——”
“다만.”
“공식 경로에 올리지 마십시오. 이 정보들은 출처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사용은 당신 판단에 맡기고, 저는——”
그가 시계를 한 번 쓸었다.
“E급으로 남아야 합니다.”
한세아가 봉투를 만년필 옆에 내려놓았다. 십 초 동안 침묵이 책상을 덮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좋소. 수요일 오후 여섯 시. 이 방.”
정도윤이 일어났다. 한세아가 손을 들었다.
“한 가지 더.”
그녀의 시선이 정도윤의 손목시계에 닿았다.
“당신이 이 모든 걸 알게 된 이유. 지금은 안 묻겠소. 하지만——”
만년필 뚜껑이 딸깍 닫혔다.
“언젠가 필요해질 때가 오면, 그땐 묻겠소.”
정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박성렬의 집무실.
해가 지고 창밖이 어두워졌다. 탁상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비서의 전화가 울렸다. 박성렬이 스피커폰을 눌렀다.
“말해.”
“—정도윤 인사 파일, 추가 확인했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긴장을 머금고 있었다. 박성렬이 안경을 벗었다.
“뭐가 나왔나.”
“출동 기록은 3년 치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전부 말소 상태입니다. 그리고——”
숨소리.
“인사 파일의 심리 평가 항목. 2년 전 기록이 통째로 공백입니다. 부자연스럽습니다.”
박성렬의 손가락이 책상 가장자리를 천천히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말소된 기록. 공백.
그가 수화기를 집었다.
“이 빈틈. 이용할 수 있겠군.”
스탠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