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리셋
5화
아르고 길드 중앙 전략 회의실.
이른 오전, 블라인드 너머로 희뿌연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회의실은 텅 빈 회의실이었다. 타원형 테이블 위엔 어제의 브리핑 자료가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고, 벽면 모니터는 대기 상태로 깜빡였다.
한세아가 먼저 와 있었다.
탁자 끝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왼손엔 만년필. 오른손 검지로 뚜껑을 분리했다 결합했다—딸깍, 딸깍. 리듬이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문이 열렸다.
정도윤이 들어왔다. 검은색 조끼, 회색 셔츠. 손목시계가 소매 안에서 살짝 드러났다. 그가 문을 닫고 탁자 건너편에 섰다. 앉지 않았다.
한세아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제 준 문서. 검토는 끝냈소.”
“결과는.”
“눈사태 길드의 변이 로그와 박성렬의 작전 명령. 교차 검증에서 오류는 없었소.”
만년필 뚜껑이 딸깍 닫혔다.
“하지만 한 가지. 당신이 이 정보를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그 출처는 끝내 밝히지 않았소.”
정도윤이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한세아가 돌아섰다. 눈이 마주쳤다.
“내 동맹의 조건이었소. 정보 출처를 묻지 않는다—그건 잠정적 유예였을 뿐이오. 이제 대답을 들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말할 수 없습니다.”
“못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
“둘 다입니다.”
한세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만년필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 말이오. E급이 가질 수 없는 정보를 매번 정확한 타이밍에 꺼내놓고, 출처는 비밀이오. 그걸 내가 계속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뭐요.”
“받아들일지 말지는 팀장님 판단입니다.”
정도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다만 정보의 가치는 결과로 증명됐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출처보다 중요한 건—”
그가 잠시 멈췄다.
“누가 이 정보를 악의적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느냐는 거겠죠.”
한세아가 입을 열려다 말았다. 그가 정확히 그녀의 의심을 먼저 짚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은.”
정도윤이 손목시계를 한 번 쓸었다.
“박성렬 국장님이 입증하실 겁니다. 내부 감사든, 정보 유출 혐의든. 곧 시작될 테니까.”
한세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박성렬이 움직일 거라는 예측. 그걸 이 남자는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다.
“당신을 믿지 않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정보는 믿기로 했소.”
정도윤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걸로 충분합니까.”
한세아가 대답하려는 순간, 정도윤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만년필. 엄지손가락으로 가려진 펜촉 근처, 각인된 일련번호.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번호.”
한세아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KE-2047-E.”
정도윤이 번호를 정확히 읽었다. 외운 것이 아니라, 본 순간 인식한 눈빛이었다.
“당신 오빠의 E등급 식별 번호죠.”
회의실 안의 공기가 멈췄다.
한세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상태였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
만년필을 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도윤은 더 말하지 않았다. 시선을 그녀에게서 거두지도 않았다. E급 각성자. 정보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 남자.
오 초.
십 초.
한세아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떨림이 멎었다. 그녀가 만년필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깨지기 쉬운 물건처럼.
“어디서.”
목소리가 바뀌어 있었다.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그 아래 깔린 무언가가 드러났다.
“오빠의 등급 번호를 어떻게 알았소.”
“말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대답.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의 무게가 달랐다. 한세아가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냉철한 전략팀장의 눈이 아니라, 한 사람의 눈으로.
“당신은 대체 누구요.”
“E급 각성자. 장비고 소속. 그게 전부입니다.”
정도윤이 팔을 내렸다. 손목시계가 다시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당신이 누군지 알게 된 것뿐입니다.”
한세아가 눈을 감았다 떴다. 감정을 정리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탁자 가장자리를 짚었다. 손끝이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걸로 균형이오.”
목소리가 평소의 톤을 되찾고 있었다.
“정보 출처를 추궁하지 않는 대가로, 당신은 내 가장 사적인 걸 꺼내 들었소. 그걸로 동맹의 무게는 같아졌소.”
정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군화 밑창이 리놀륨을 긁는 소리. 리듬이 불규칙했다.
문이 노크 없이 열렸다.
김하사였다.
때 묻은 가죽 점퍼, 허리엔 열쇠와 USB가 주렁주렁 달린 카라비너. 구겨진 와이셔츠 깃이 한쪽만 세워져 있었다. 얼굴엔 수염이 이틀 치 올라와 있었다.
그가 회의실 안을 한 번 훑고는 한세아를 보며 턱짓했다.
“여기 있었군. 팀장님 찾느라 B3까지 내려갔다 왔네.”
한세아가 탁자에서 손을 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미 전략팀장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결과가 나왔소.”
김하사가 점퍼 안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액정에 금이 간 구형 모델이었다. 그가 탁자에 태블릿을 올리며 말했다.
“네가 준 그 칩. 거의 망가진 데이터였는데 꽤 오래 붙잡고 늘어졌다.”
화면에 해독된 텍스트가 떠올랐다. 일부는 깨져 있었고, 군데군데 복원 불가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맨 위의 코드명은 선명했다.
『게이트 1호점 대숙청』
한세아의 눈이 코드명에 고정됐다.
“'대숙청'이오.”
“그래. 작전 명칭도 아니고, 사고 보고 코드도 아니야. 세상에 공개된 적 없는 단어라고.”
김하사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두 번째 페이지. 희생자 명단이었다. 대부분이 검은색 복원 불가 바에 가려져 있었지만, 두 개의 이름은 읽을 수 있었다.
김광진. B급.
윤재호. C급.
“눈사태 길드 소속.”
김하사가 담배를 찾는 버릇으로 가슴 주머니를 더듬다 말고 손을 내렸다.
“나머지는 다 깨졌어. 복원돼도 시간이 좀 걸릴 거고.”
“사망 원인은.”
한세아의 질문에 김하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상한 부분이야. 사인 란에 '마나 역류'라고 적혀 있어. 근데 그 아래—”
그가 화면을 확대했다.
“처리 주체가 각성자 관리청도 아니고, 아르고 길드도 아니야. '국방부 특수대응과'. 이건 정부가 개입한 사건이라는 거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도윤이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눈빛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손이 조끼 주머니 쪽으로 살짝 움직였다—수첩을 확인하려는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그는 손을 도로 내렸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같은 코드명이 있었다. 게이트 1호점. 대숙청.
사망 처리된 각성자들. 그리고 현장 책임자였던 박성렬. 기억은 파편적이었지만, 지금 화면에 뜬 데이터가 그 파편과 정확히 겹쳐졌다.
“정부 차원의 은폐.”
한세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박성렬의 과거와 눈사태 길드의 해체, 그리고 이 '대숙청'. 같은 선상에 있소.”
김하사가 한세아를 슬쩍 쳐다봤다.
“이거 건드리는 순간, 우리 셋 다 조용히 묻힐 수도 있어. 팀장님, 그 정도 각오는 있는 거야?”
한세아가 만년필을 집었다. 손에 쥐지는 않고 탁자 위에 그대로 둔 채, 엄지로 펜촉 부분을 살짝 눌렀다.
“묻히기 전에 증거를 모으는 거요. 지금 이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해.”
“추가 해독은.”
정도윤이 입을 열었다.
“김하사가 이어받는 게 낫습니다. 여기서 더 가져오면 박성렬 쪽에서 의심할 만한 움직임이 나올 겁니다.”
김하사가 코웃음을 쳤다.
“이 녀석, E급 맞아? 눈치가 너무 빨라서 탈이네.”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정도윤의 건조한 대답에 김하사가 피식 웃었다.
한세아가 태블릿을 밀어 김하사에게 돌려주었다.
“기간은.”
“일주일. 더 걸릴 수도 있어. 깨진 섹터가 생각보다 많아.”
“충분하오. 서두르면 실수하니까.”
김하사가 태블릿을 점퍼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자크를 올리며 말했다.
“한 가지 더. 희생자 명단 중간에 이상한 패턴이 보였어. 마나 파동 기록이 붙어 있는데—”
그가 잠시 멈췄다.
“일반적인 게이트 변이랑 주파수가 달라. 내가 본 것 중엔 초고밀도 던전에서나 나오는 파형이야.”
정도윤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락.
마음속에서만 떠오른 단어였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김하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간다.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인사팀 새끼들이 눈치챌지도 모르니까.”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춰 서서 어깨 너머로 말했다.
“팀장님. 이 칩 원본이 어디서 나온 건진 몰라도, 보관은 내가 알아서 할게. 사무실 금고에 넣어둘 테니까.”
한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군화 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회의실에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한세아가 창가로 돌아섰다. 블라인드 사이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탁자 위의 만년필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대숙청.”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게 드러나면 길드 내부 정치 구도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소.”
정도윤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혼잣말을 한 것이지, 그에게 묻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세아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수요일 여섯 시. 잊지 마시오.”
“잊지 않습니다.”
정도윤이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회의실 안, 한세아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KE-2047-E. 오빠의 번호.
그녀가 만년필을 천천히 손바닥 위에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얼굴에선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오전 11시 무렵, 전략부 사무실 공용 구역.
바닥을 굴러다니던 먼지 한 줌이 형광등 불빛에 흩어졌다.
누군가의 모니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짧았다. 곧 옆자리, 그 옆자리로 번졌다. 침묵이 달라붙기 전의 사무실 공기. 하나둘 키보드를 멈추는 손가락들.
“이거……”
하급 조제사 한 명이 말끝을 흐렸다.
모니터에 팝업이 떴다.
[내부 공지] 게이트 “그림자 미궁” 작전 사후 경고 보고서.
줄을 읽는 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박성렬 국장. 초기 작전 명령.
인명 손실. 장비 피해. 각 항목 옆에 박힌 숫자들이 마치 서류에 핀 금처럼 번들거렸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수치가 생각보다…….”
끝맺음은 테이블 아래로 흘러내렸지만, 말의 골자는 공기 중에 남았다. 여섯 명이 부상. 정찰조 2명, 실종 후 사망으로 최종 분류. 작전 경로 이탈 시점에 대한 각주 번호가 어색하게 붙어 있었다.
입회 진행관 하나가 태블릿을 내려놓고 말했다.
“누가 올린 거지, 이걸.”
“기획조정실인가.”
“경고 단계면 실무 라인 결재는 없었을 텐데.”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무실 구석 칸막이 너머로 누군가 전화기를 집어드는 기척이 났다.
정도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자리, 모니터 왼편에 낡은 키보드가 놓여 있었다. 화면 밝기를 낮췄다. 팝업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는 커서를 한 번 움직이고 멈췄다.
한세아가 전략팀장 집무실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왼손에 든 태블릿 화면이 보고서의 마지막 문단을 띄우고 있었다. 그녀는 스크롤을 한 번 올리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잠시 옆쪽 칸막이를 스쳤다. 정도윤의 뒷모습. 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구두 굽이 소리 없이 바닥을 딛고 문이 닫혔다.
박성렬은 복도 중간쯤에서 알림을 확인했다.
비서가 건넨 태블릿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뒤집어 손에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케이스 가장자리를 한 번, 두 번 눌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가던 하급 직원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옆 복도로 꺾어졌다. 박성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국장실로.”
말은 앞서 걸어가던 비서의 등을 겨냥했다. 발걸음은 빨라지지 않았다. 다만 한 번 멈췄다 이어질 때 보폭이 미세하게 넓어졌다.
전략부 사무실 한켠. 개인 사물함 앞.
공기가 다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소근거림이 점차 줄어들고, 대신 자판기의 진동음과 복사기 소리가 뚜렷해지는 그 사이. 정도윤이 자신의 사물함 앞에 섰다.
나사 하나가 살짝 풀려 있었다.
열쇠를 돌리지 않았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당기고, 오른손을 안으로 넣어 겉옷 주머니 사이에 끼워둔 봉투를 꺼냈다. 크라프트지. 표면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가 김하사에게서 건네받은 기밀 칩 해독 메모의 사본.
그리고 왼쪽 손목.
시계를 풀었다. 낡은 가죽 줄. 전생에서 선배가 차고 있던 그대로였다. 뒤집었다. 뒷판에 새겨진 각인은 육안으로도 읽을 수 있었다.
G1-Λ-7.
메모를 사물함 선반 위에 펼쳤다. 김하사의 손글씨. 연필로 눌러쓴 획이 곳곳에서 삐걱거렸다.
추출된 코드명 리스트.
G1-Σ-4. G1-Ω-9. G1-Λ-2.
손가락이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시계의 각인을 다시 보았다. G1-Λ. 그리스 문자 ‘람다’.
김하사의 메모에는 세 개의 코드명 중 두 개가 시그마와 오메가로 끝나 있었다. 람다는 단 하나. 시계의 각인과 동일한 패턴.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G1.”
게이트 1호점.
눈사태 길드. 10년 전 해체. 12년 전 대숙청.
시계를 쥔 손의 힘이 조금 들어갔다. 전생에서는 알지 못했던 각인. 전생에서는 이 시계가 그냥 선배의 유품이었고, 그 끝은 나락 게이트의 어둠 속이었다.
두 개의 시간이 메모 위에서 겹쳐졌다.
전생의 기억. 김하사가 추출한 대숙청의 편린. 시계 뒤판의 암호. 코드명의 머리글자가 가리키는 게이트 번호. 그리고 람다가 암시하는 어떤 순서.
그가 시계를 손목에 다시 찼다.
단단히 조이지 않았다. 가죽 줄이 살갗에 닿는 감촉을 가볍게 두 번 확인했다.
모니터가 깜빡였다.
아까 닫았던 내부 공지 창이 아니었다. 새 알림. 하단에 짧은 배너 하나가 떠올랐다.
[비공개] 강민준 S급 재검증 요청 – 마나 파형 이상 관련.
배너 제목만 떠 있었다. 본문 미리보기는 없었다. 읽기 권한이 없는 문서라는 회색 잠금 아이콘이 옆에 붙어 있었다.
정도윤의 시선이 모니터에 고정됐다.
사무실 건너편에서 누군가 복사기 뚜껑을 열고 닫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배너가 4초 만에 사라졌다. 그는 메모지를 반으로 접어 조끼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커서를 움직여 로그아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