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리셋
6화
오전 8시 30분. 한세아의 사무실.
블라인드가 반쯤 올라간 창으로 흐린 빛이 밀려들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태블릿과 김하사가 건넨 출력물이 펼쳐져 있었다. G1으로 시작하는 코드명 리스트. 종이 모서리가 그녀의 손끝에 눌려 살짝 구겨져 있었다.
정도윤은 문 옆에 서 있었다. 앉지 않았다.
한세아가 출력물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쪽이 건넨 칩에서 나온 데이터요. 게이트 1호점.
눈사태 길드. 대숙청. 12년 전 정부 차원의 은폐 사건이 기록된 기밀이 내 책상에 올라와 있소. 누가, 어디서 구했는지 아직 듣지 못했는데.”
“칩은 제가 구한 게 아닙니다. 전달만 했습니다.”
“전달자가 공급원을 모른다는 건가.”
“모르는 게 아니라 밝히지 않는 겁니다.”
한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분노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군. 내 오빠의 식별 번호를 꺼낼 때하고 똑같은 화법이오.”
“그 정보를 믿기로 결정하셨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소.” 그녀가 출력물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나는 지금 박성렬과 전면전을 시작하려는 참이오. 상대는 12년 전 실종자 14명의 명령 하달자로 지목된 인물이고, 그가 동원할 정치적 자원은 내 예상을 넘어설 가능성이 크오. 이 싸움에 정보원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로 뛰어들 수는 없소.”
“통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입니까.”
“똑같은 말이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도윤은 그녀가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았다. 뚜껑을 딸깍거리지 않았다는 걸 그때 알아챘다. 전과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제 입장을 말씀드리면,” 정도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E급입니다. 이 길드에서 제 목숨값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정보는 다릅니다. 정보는 제가 가진 유일한 가치고, 그걸 한꺼번에 털어놓으면 저는 이 협력 관계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됩니다.”
“당신과 나는 동맹이라고 하지 않았소.”
“동맹은 생존을 전제로 합니다.”
한세아는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직 나를 못 믿겠다는 거군.”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타이밍입니다. 이 데이터는 지금도 충분히 강력합니다. 박성렬이 은폐하려 한 사건의 편린이고, 그가 관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니까요. 하지만 완전한 진실은 아닙니다.”
“그렇소. 이 코드명들의 완전한 해독이 필요해요.”
“그 부분은 제 담당입니다. 김하사가 추가 해독을 진행 중입니다. 코드명이 현직 인물과 연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결과가 나오면, 이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무기가 됩니다. 그때 풀어야 효과가 큽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당신은 항상 정보를 쥐고 있다가 최악의 순간에 꺼내는 버릇이 있군.”
“그게 제 생존 방식입니다.”
한세아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만년필 뚜껑이 딸깍 한 번만 울렸다. “좋소.
지금은 그쪽의 정보 통제를 용인하겠소. 하지만 두 가지 경고를 남기오. 첫째, 독단적인 판단으로 정보를 숨겼다가 이 동맹이 깨질 정도의 손해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당신 혼자 짊어지는 게 아니오.
둘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었다. “오늘 오전 10시 전략 회의. 박성렬이 직접 소집했소. 의제는 ‘최근 작전의 비공식 전술 검토’.”
“저를 겨냥한 겁니까.”
“나를 겨냥한 거요. 당신은 명분일 뿐이오. 그가 어떤 논리로 공격해올지 예상해봤소?”
“‘사적 정보원에 의존한 비공식적 전술.’”
“정답.”
한세아가 문 쪽으로 걸어왔다. 손잡이에 손을 얹은 순간, 정도윤이 낮게 말했다. “박성렬은 오늘 회의에서 지지 않으려 들지 않을 겁니다.”
“근거는.”
“그의 과거가 드러날 위기니까요. 대숙청 코드명이 제 시계 각인과 동일한 패턴이라는 걸 제가 확인했습니다.”
한세아의 손이 멎었다.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시계?”
“선배의 유품입니다. 뒷판에 G1-Λ-7이 새겨져 있습니다. 김하사가 추출한 코드명과 같은 체계입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하오.”
“방금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계는 눈사태 길드와 연결돼 있습니다. 박성렬이 숨기려는 게 단순히 과거의 명령 하달 기록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연루된 게이트 1호점의 진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세아는 3초쯤 그의 시계를 바라봤다. “당신은 항상 한 박자 늦게 말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무게를 더하는군.”
“일부러 그럽니다.”
그녀가 짧게 웃었다. “회의 때는 그 무게를 숨기시오. 오늘은 내가 총대를 메겠소. 당신은 김하사를 만나시오. 나락 게이트와 저 시계 각인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오.”
“그럴 생각입니다.”
문이 닫혔다. 정도윤은 사무실에 잠시 더 서 있었다. 전생에서는 그 끝이 어둠이었다.
선배의 시계는 거기서 멈췄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 시계가 대숙청과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계단으로 내려가며 김하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 9시 58분. 아르고 길드 중앙 전략 회의실.
길쭉한 타원형 테이블을 따라 길드 간부들이 자리를 채웠다. 열다섯 명 남짓. 강민준은 검은색 맞춤 슈트 차림으로 앞쪽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박성렬이 회의실 정면에서 입을 열었다. “모두 바쁘신 와중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회의는 최근 작전에서 발생한 비공식적 전술 운용에 대한 검토가 주된 목적입니다.”
강민준이 손가락 하나로 팔걸이를 톡 쳤다.
한세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맨 앞자리로 걸어가 앉으며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박성렬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 팀장님, 마침 지난 그림자 미궁 작전 건으로 여쭤볼 게 있었습니다. 작전 도중 우측 통로로 우회하신 결정. 근거가 뭐였습니까.”
“벽면 문양의 색 변화와 마나 밀도 이상.”
“그건 사후 분석 결과고요. 실시간 판단의 근거를 묻고 있습니다.”
한세아가 태블릿을 켰다. “이 데이터는 작전 중 제가 내부 기록 장치에 남긴 로그입니다. 변이 전조인 청색에서 군청으로의 색 변화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경과 시간을 측정한 기록이 여기 있습니다.”
“그 변이 전조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중립파 간부 하나가 손가락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한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현장 분석입니다.”
“현장 분석.” 박성렬이 안경을 벗어 천천히 닦았다. “흥미롭군요. 3년 전 B급 게이트 ‘잠식된 회랑’에서 동일한 패턴의 변이가 발생해 선발대 6명이 전멸한 사례가 있습니다. 길드 내부 기록으로는 은폐되어 있어서, 정식 브리핑을 받은 간부 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한 정보였습니다. 팀장님의 현장 분석은 그 은폐된 사례와 지나치게 일치하는군요. 마치 누군가 사전에 알려준 것처럼.”
작전부 간부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결과적으로 탐지팀 4명을 구조했고, 변이 징후를 사전에 감지한 건 전략적 판단 아닙니까.”
“전략적 판단이라면 좋지요.” 박성렬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문제는 그 판단이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적 정보원에 근거했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전략팀 소속 E급 각성자 정도윤.”
강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E급이?”
“예. 그는 이번 작전뿐 아니라 이전부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왔습니다. 인사 기록을 확인한 결과, 출동 기록과 심리 평가 항목에 의도적인 공백이 존재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입사 시점과 그림자 미궁 작전의 첫 정보 입수 시점이 정확히 겹칩니다.”
한세아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국장님. 말씀하시는 요지는 결국 제가 부적절한 정보원에게 의존해 전술을 운용했다는 겁니까.”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사실 확인은 필요합니다.”
“그럼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박성렬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국장님께서 이번 작전에 적용하신 정면 돌파 교본. 결과적으로 초기 진입에서 실패했고, 그대로 따랐다면 전멸했을 겁니다. 그 사실에 대한 검토는 누가 합니까.”
회의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박성렬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부분은 이미 사후 경고 보고서로 공지되었고, 저는 그 판단에 대해 공식적으로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한 팀장님. 그 보고서가 업로드된 시점과 팀장님이 이 회의에서 그걸 인용하신 타이밍…… 묘하게 절묘하군요.”
“절묘하다는 건 기분 탓입니다.”
“아닙니다.” 박성렬이 손을 들어 옆자리를 가리켰다. 회의실 벽면 모니터에 화면이 띄워졌다. “이건 한 팀장님의 과거 작전 로그 일부입니다. 5년 전 C급 게이트 ‘붉은 지하수로’ 작전. 당시 팀장님은 매뉴얼을 무시하고 단독 판단으로 우회로를 선택했고, 그 결과……”
“그 결과 대원 3명이 사망했습니다.” 한세아가 말을 끊었다. “그 기록은 길드 공식 청문회에서 이미 검증된 사항이고, 제 징계는 면제됐습니다.”
“면제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당시 전략국장이었던 제가 팀장님의 잠재력을 믿고 감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그때와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면서, 이번엔 나를 공격하는 논리로 쓰고 있지.”
중립파 간부들 사이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강민준이 팔걸이를 한 번 더 톡 쳤다. “박 국장 말이 맞는 것 같은데. 한 팀장.
당신 능력은 인정해. 근데 요즘 방식은 너무 과격해. 게다가 E급한테서 정보를 받았다는 건…… 조금 심하지 않아?”
한세아가 강민준을 돌아봤다. “강민준 각성자님. 지금 이 자리는 작전 검토 회의입니다. 비공식적 의견 표명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비공식적이라.” 강민준이 웃었다. “내 이름이 길드 공식 이사회 명단에 있는 건 알지? 내 의견은 언제나 공식이야.”
박성렬이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강민준 님께서 동의하신다면, 저는 이 건에 대해 공식 감사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한 팀장님의 최근 작전들이 모두 사적 정보원에 의존한 것인지, 그리고 그 정보원의 배후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야 합니다.”
회의실의 눈치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중립파로 분류되던 재무팀 간부 하나가 박성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팀장도 태블릿을 켜서 메모하기 시작했다.
한세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장님. 감사는 권한 내에서 진행하시면 됩니다.
저는 그 절차에 협조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지금 국장님께서 문제 삼고 계신 건 비공식 전술이 아닙니다.” 그녀가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국장님의 과거를 제가 건드렸기 때문에, 그걸 막으려는 거죠.”
박성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한세아가 회의실 문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박성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퇴장하시는 겁니까.”
“회의 의제는 충분히 검토됐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감사 절차에서 다루시죠.”
문이 열리고 닫혔다.
강민준이 팔걸이에 기대며 코웃음 쳤다. 박성렬은 그의 반응을 재빨리 훑은 뒤,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저 마셨다.
회의실 밖. 복도에 선 한세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눌렀다. 박성렬이 과거 작전 기록까지 끄집어낸 것은 예상 밖이었다.
5년 전 붉은 지하수로 사건. 그때 그가 자신을 감싼 이유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는 걸 오늘 분명히 알았다. 정치적 지뢰를 미리 심어둔 셈이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내부 전산망에 접속했다. 검색창에 입력한 것은 자신의 오빠 이름, 그리고 ‘E급 식별 번호’. 박성렬이 건드리려는 게 과거 작전 기록이라면, 자신도 과거를 무기로 맞서야 했다. 그리고 그 무기는 이미 정도윤이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폰을 가방에 넣고, 한세아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 상가의 네 번째 골목. 형광등 세 개 중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정도윤은 철제 셔터 앞에서 멈춰 섰다. 오른손으로 노크 세 번, 멈춤, 두 번.
문 옆 인터폰에서 잡음이 튀었다.
“누구.”
“나야.”
잠긴 소리. 김하사가 셔터를 허리 높이까지만 올렸다. 정도윤이 몸을 숙여 들어가자 곧바로 내렸다.
좁은 사무실. 벽 한쪽은 서류함으로 덮여 있었고 모니터 세 대가 각기 다른 파형을 띄우고 있었다.
“밥은.”
“됐어.”
김하사가 의자에 앉으며 턱짓으로 맞은편 접이식 의자를 가리켰다. 정도윤이 앉았다.
“네가 준 칩. 추가 해독 돌렸더니 재밌는 게 나왔다.”
김하사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중앙 모니터에 그래프 하나가 떠올랐다. X축은 연도, Y축은 마나 밀도 수치.
“대숙청 당시 게이트 1호점의 마나 파동 로그야. 사고 직전 72시간.”
그래프가 서서히 상승하다 마지막 6시간 구간에서 급격히 치솟았다. 정도윤의 눈이 그래프를 훑었다.
“이 패턴.”
“눈치 빠르네.”
김하사가 다른 창을 열었다. 또 다른 파형 그래프. 날짜는 올해. 관측소 코드는 'NA-RK-03'.
“나락 게이트 비공식 관측 데이터. 정부는 함구 중이지만 정보는 새고 있어. 봐.”
두 그래프를 겹쳤다. 대숙청 직전 12시간의 파동과, 나락 관측소의 최근 12시간 파동. 상승 곡선의 기울기, 중간 미세 진폭, 정점 직전의 불규칙 스파이크까지 거의 같았다.
“우연으로 보기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김하사가 담배를 꺼내려다 테이블 위에 던졌다.
“네 시계. 아까 전화로 말한 대로야.”
정도윤이 왼쪽 손목을 풀었다. 뒷판 각인을 모니터 옆에 댔다. 김하사가 확대경을 꺼내 각인을 비췄다.
“G1-Λ-7. 대숙청 코드명 체계랑 동일 패턴이야. 시그마, 오메가, 람다. 그리스 문자 24자 순서대로 게이트 내부 구역을 표시한 거라면.”
“람다는 일곱 번째 구역.”
“Λ7이면 충분히 다르게 읽힐 수 있어. 날짜일 수도 있고, 인원 수일 수도 있어. 그런데 이걸 봐.”
김하사가 대숙청 해독 데이터의 마지막 페이지를 띄웠다. 깨진 텍스트 사이로 복원된 한 줄.
『Λ 구역 진입 팀 – 전원 미귀환』
“선배가 Λ 구역에 있었던 거냐.”
“아니면 Λ 구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거나.”
김하사가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낡은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이쯤 되면 묻자. 네 선배, 정말 평범한 E급이었냐.”
정도윤이 시계 줄을 다시 여미며 입을 열었다.
“모릅니다. 전생에서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전생이라.”
김하사가 코웃음을 쳤다. 믿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여간 이 데이터는 네 거다. 써먹든 말든.”
USB 하나가 테이블 위를 미끄러졌다. 정도윤이 집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한 가지 더.”
김하사가 말을 낮췄다.
“대숙청 코드명 중에 현직 아르고 간부의 옛 소속 부대 코드랑 겹치는 게 나와. 해독 더 진행되면 이름이 뜰 수도 있어.”
“누군지는.”
“아직 말할 단계 아냐. 확실해지기 전엔 나도 이 선 넘기 싫어. 네가 괜히 휘말릴 필요도 없고.”
정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후 세 시 반. 한세아의 사무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모니터 하나에만 불이 들어왔다. 개인 데이터 단말기. 길드 내부망과 분리된 회선.
익명의 보고서였다. 발신자는 기술팀 중립파 소속으로 추정되는 사내 메일 주소. 본문은 짧았다.
『아래 데이터는 폐기 예정이었던 훈련장 마나 측정 로그입니다. 공식 기록과 불일치합니다.』
첨부 파일 두 개. 하나는 그래프, 하나는 원본 로그 CSV.
한세아가 CSV부터 열었다. 훈련 일시는 일주일 전. 피측정자 코드는 'ARGO-S-001'. 강민준.
데이터 열을 훑었다. 초당 마나 출력량, 안정성 지수, 파형 주파수.
안정성 지수 열에서 눈이 멈췄다.
훈련 시작 12분까지는 94~96%. 정상 범위.
13분 07초. 안정성 74%로 급락.
13분 22초. 61%.
13분 41초. 43%.
그 후 2분간 데이터 공백. 계측 장비가 리셋된 흔적.
재개된 16분 02초. 안정성 98%.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세아가 CSV를 닫고 그래프를 열었다. 13분부터 16분까지의 파형이었다. S급 각성자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불규칙 진폭. 마치 두 개의 다른 마나 코어가 충돌하는 듯한 이중 파형.
그리고 공백 직후, 파형은 인위적으로 평탄화된 직선에 가까워졌다. 자연 회복으로는 불가능한 패턴.
후천적 개입.
누군가 강민준의 마나 코어를 증폭시켰다. 게이트 진입 전에, 훈련 중에, 여러 번.
한세아가 만년필을 집어 테이블 위에서 한 번 굴렸다. 엄지로 뚜껑을 살짝 밀었다 닫았다.
이 정보를 정도윤과 공유할지, 혼자 쥐고 있을지.
5초 후 그녀는 보고서를 암호화 폴더로 옮겼다. 폴더 이름은 '비공개-임시보류'. 비밀번호는 16자리.
결정은 나중이었다.
저녁 일곱 시. 한세아의 사무실.
창밖으로 도심의 불빛이 층층이 켜지고 있었다. 한세아는 두 번째 커피를 식힌 채로 두고 부길드장 권한으로 전략 기록 보관소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사무실 터미널을 통해서였다.
검색 조건: 작성자 박성렬. 기간 12년 전. 게이트 유형 A급 이상.
세 건의 보고서가 떴다. 그중 맨 위의 제목.
『A급 게이트 '심연의 탑' 작전 종료 보고서 – 전략국장 박성렬』
열었다. 48페이지. 그녀는 요약본이 아닌 원본을 읽기 시작했다.
15분째.
통계 요약 표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투입 인원: 32명. 사망: 8명. 생존: 21명.
합계는 29명. 3명이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스크롤을 더 내렸다. 부록 F. 생존자 명단. 이름, 등급, 소속, 전출일.
21명의 이름. 페이지 끝에 공란 세 줄. 이름 없이 사원 번호만 남아 있었다.
『KR-E-2207』 『KR-E-2219』 『KR-E-2241』
모두 E급.
한세아가 데이터베이스의 교차 검색 기능을 켰다. 번호를 하나씩 입력했다.
KR-E-2207: 기록 없음. 모든 인사 데이터에서 삭제됨.
KR-E-2219: 동일.
KR-E-2241: 동일.
세 명의 E급 각성자. 게이트에서 살아 나왔으나 보고서의 생존자 명단에는 없고, 길드 인사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박성렬이 직접 결재한 보고서에서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길드의 공식 기록 자체에서 깨끗이 증발했다.
한세아가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로 이동했다.
결재란. 당시 전략국장 박성렬의 서명. 그 아래로 당시 부길드장의 승인 도장. 그리고 맨 아래 줄.
『본 보고서의 모든 내용은 사실과 다름없음을 확인함.』
그녀는 보고서 전문과 교차 검색 결과를 암호화 사본으로 저장했다. 사본 저장 경로는 개인 단말기의 '비공개-임시보류' 폴더.
박성렬의 전략적 권위는 거짓 보고서 위에 세워져 있었다.
창을 닫으려던 순간, 새 메일 알림이 화면 구석에 떴다.
발신: 박성렬. 수신: 아르고 길드 전체 임원. 제목: 『긴급 길드 청문회 소집: 한세아 부길드장 전략적 무능 및 사적 감정 개입 건』
한세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밤.
원룸의 불은 켜지 않았다.
정도윤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USB에서 추출한 나락 마나 파동 데이터를 펼쳐 놓고, 오른손 검지로 손목시계의 유리를 한 번 톡 쳤다.
전생의 날짜. 시계 뒷판에 메모해둔 것과, 지금 화면의 임계치 도달 예상일.
일치했다.
그가 시계를 손목에서 풀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줄을 감아쥐었다.
가죽 줄이 살을 파고들었다.
모니터의 파형 그래프가 마지막 스파이크를 찍고 있었다.